2013 불교평론 가을 학술세미나-‘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명상 또는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명상을 통해 무엇을 치유하려는지, 무엇을 성취하려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종종 혼란이 일어난다. 깨달음과 윤리적 행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도 이런 혼란과 무관하지 않다.
불교평론이 9월 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명상에 대한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서재영 박사(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사회로 7명의 학자들이 명상과 불교의 관계, 명상은 개인과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명상 붐 시대에 불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주제 발표를 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명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는 것을 증명하듯 200여 청중들이 참석, 자리가 없어 서서 듣는 이들도 많았다. 또 이번 세미나 자료를 담은 <불교평론 55>가 순식간에 동이 나는 상황이 발생하는가 하면, 토론시간에는 날카로운 질문이 발표자에게 던져지기도 했다.

▲ 불교평론은 9월 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날 세미나에 참여한 발표자들. (사진 왼쪽부터) 전현수 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장현갑 영남대 명예교수, 서재영 박사(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인경 스님(동방대학원대 교수), 허우성 경희대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박재현 동명대 교수, 오원칠 한산사 간화선 수행학교장.


“마음 수행이 뇌 바꾼다”
(기조발제 ‘왜 현대인들은 명상에 열광하는가?’)

삶을 맑고 건강하게 치유
면역기능강화·긍정성 높여
의료·교육 분야 활용 넓혀야

장현갑 영남대 명예교수
 미국에서는 초기 불교에서 비롯된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 수행법이 심신치료분야에 널리 확산되어 심리치료의 ‘제 3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심리치료가의 40%이상이 이 명상법을 활용하게 되었고, 매년 명상관련 논문이 천여편 이상 발표되고 있으며 700여곳 이상에서 ‘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감소(MBSR)’프로그램이 활용되고 있다.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방황하는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서게 하며 마음의 동요를 막는 마음의 훈련, 즉 명상수련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마음의 동요를 그대로 두면 가상의 생각이 신경망을 작동시켜 점점 더 괴로운 마음의 향연을 계속해나가는데, 이것이 바로 번뇌의 불길이 퍼져나가 괴로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 즉 스트레스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면 다양한 신체기능이 교란되어 끝내는 온갖 종류의 질병을 야기하게 된다.

불교에서 마음수행의 목적은 “삶의 괴로움을 넘어 안락한 세계로 가는데” [離苦得樂]있다. 명상은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으로 나눈다. 전자를 사마타수행(samatha)이라 부르는데, 어떤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으로 만트라 명상이나 참선이 이에 속한다. 후자는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이라 부른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 느낌 또는 생각 등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판단하지 않은 채, 고요히 살펴보는 것으로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이라고도 부른다.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과 몸의 안정에 이르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 사마타형의 명상인 이완반응(일종의 진언수행) 명상을 하면 뇌파가 알파파와 세타파를 보인다.

결과에 의하면 명상을 한 집단은 하지 않은 통제집단에 비해 좌측 전전두피질의 우세성이 높아졌고 긍정적 정서도 높아졌으며 업무에도 보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또 명상집단은 비명상집단에 비해 면역기능이 보다 상승되어 감기에 덜 걸렸으며 비록 감기에 걸린 경우라 하더라도 증상이 경미하였다.

결국 마음을 수행하면 뇌가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천년간 이어져온 명상수련이 고뇌에 찌든 우리의 삶을 보다 맑게, 보다 건강하게 치유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뇌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명상을 통해 자기 자신의 관점에만 집착하는 이기적 관점에서부터 보다 큰 자연과 서로 연결되어있는 존재라는 관점으로 바뀌게 되면 치유가 일어날 것이란 것이다.

또한 주의집중능력이 커지면 치유능력 또한 커지며 자신의 반응에 대한 탐지력의 증가가 치유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며 비판적 태도의 함양과 수용성의 증가를 통해 치유의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렇다면 명상은 어떤 분야에 응용 될 수 있을까? 첫째로는 의료분야로 만성통증이나 우울증과 같은 스트레스 관련 질병의 치료는 물론 암환자의 치료까지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무절제한 폭력, 심지어는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청소년들의 치유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노인들과 후천적 장애인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을 통한 즐거운 마음가짐은 행복으로 가는 고속도로다.

 

 

“한국미래 좌우할 문화 트렌드”
(명상 붐의 국내외적 현황과 추이) 

오원칠한산사 간화선 수행학교장
병자를 치유하고 사회를 ‘힐링’하기 위한 명상은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내 명상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지는 앞으로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주요한 과제이다.

서구의 명상산업은 개인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수행 방편을 넘어 심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으며, 과학과 의학 등의 전문적인 학문 영역에 까지 확장되어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서구유럽의 명상산업은 공동체의식과 환경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선 불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불교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관행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새로 유입되고 있는 명상법들은 서구에서 겪은 혼란과 같이 법에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이나 수행 방법에만 의지하고 있어 일부 부작용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불교와 전통적 명상 수행법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나 남북문제 등의 사회적 갈등을 바르게 풀어낼 수 있는 안목과 관점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상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쪽으로 가려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 쪽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에 더해 국내외적인 명상 붐을 잘 이용하여 이를 보다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첫째, 종교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생활에 가장 가깝고 일상에서 활용가능한 명상법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안들과 사회통합에 기여 할 수 있는 공동선적인 방법론들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사회전체의 소통과 통합을 추구하고 자비로 대변되는 사회적 공감 능력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으로 명상을 활용하여 현재 한반도가 겪고 있는 첨예한 남북대립, 빈부 격차 등의 모순을 극복하고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통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명상을 그저 힐링이나, 트렌드, 사업화시킴으로써 본래 명상의 목적과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사성제와 팔정도’, ‘연기법’, ‘보리심’, ‘육바라밀’, ‘공성’ 등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을 바르게 지키고 수행해나가지 않는다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듯, 이러한 명상 붐도 붓다의 올바른 가르침과 상관없는 일시적인 사회 현상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즉, 현대의 상황과 사회에 맞는 다양한 명상법과 가르침의 계발의 바탕에는 법에 대한 철저한 통찰과 본래 부처님이 가르친 명상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

 

“몸·마음의 속성, 인과 깨달아야”
(명상으로 무엇을 치유하는가)

전현수 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우리는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 알기 △생각 줄이기 △ 집중력 상승 △실제를 보게 됨 △인과의 법칙 깨달아 △세상의 이치터득 △관찰적 자아가 강해짐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명상은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의 대상이 몸과 마음인 경우 관찰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명상을 통해 생각이 줄어든다. 생각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로 마음이 간 것이다. 명상을 통해 마음이 현재 여기에 있으면 과거, 미래로 갈 수 없다. 생각이 났을 때 알아차리고 명상의 대상으로 자꾸 가다보면 명상의 대상으로 가는 새 길이 나게 된다.

정신적인 문제를 보이는 사람의 특성은 △(부정적 )생각이 많음 △실제를 못 봄 △세상의 이치나 인간관계에 밝지 못함 △만족 못함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상은 우리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대로 돌아간다. 정신적인 문제나 고통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충돌의 정도만큼 문제가 발생하고 고통이 있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그에 맞게 마음을 쓰면 마음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을 쓰는 것에 문제가 생긴 것이 정신장애다. 불안이 커지면 불안장애가 되고 우울한 것이 커지면 우울장애가 되고 세상을 보는 것이 왜곡되어 실제와 완전히 다르게 보면 정신병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나아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면 순리대로 살게 되고 문제가 없게 된다.

특히,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알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이 힘들 때 그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지 않게 된다.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있다면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명상훈련을 통해 한 대상에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면 부정적인 생각 나아가서 어떠한 생각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있다.

또한, 실제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생각한대로 안 될 때 괴로움이 생기고 문제가 생긴다.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에 맞게 할 때 의도하는 대로 되어 인생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정신적인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치료는 환자가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실제를 그대로 보려면 자신이 하는 생각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 문명의 종말까지 명상하라”
(명상은 십악을 극복하게 하는가?)

 

허우성 경희대철학과 교수 (불교평론편집위원장)

 십악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오는 용어로서 살생, 도절, 음란, 기망, 양설, 악구, 기어, 간탐, 질투, 사견 등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도 십악은 넘쳐난다. 언론은 날마다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를 쏟아낸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성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불량식품의 4대 악은 모두 십악의 일부가 아닌가? 풍광이 좋은 전국의 명산에 사찰과 불교문화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1천만 불교도는 그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십악을 줄이는 데 기여한 바가 있을까?

일부의 사람들이 명상한다고 해서 살인, 음란, 거짓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정치와 사법 당국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십악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다면 오계를 명상하는 편이 낫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명상은 십악을 범해도 ‘마음 편히’ 살게 해줄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면 악의 극복은 더 쉬워진다.

명상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증오나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나온 마음 챙김이나 사마타(집중)는 침팬지 등 인간 이외의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행위로 보인다. 그림을 그리는 침팬지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명상하는 침팬지를 들어본 적은 없다.

21세기의 명상은 더욱 진화했다. 이제 명상의 대상은 지구의 고통이다. 명상은 긴장의 이완, 부정적 감정의 제거, 자비심의 배양을 통해서 개인을 개조해야 하고, 전쟁과 테러, 환경파괴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도록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시대의 선어록(禪語錄)과 화두를 포기해야 할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이다. 고통은 현실 안에 있지 어록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고통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다. 불교는 시대의 고통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 바로 이런 진리를 틱낫한과 달라이라마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현대문명의 종말도 명상하라. 죽음에 대한 명상이 우리를 한없이 겸허하게 하고 필요한 것만 추려내게 하듯이, 문명의 종말에 대한 명상은 일상의 자유, 생활습관, 정치경제 제도, 문화 등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집단적인 각성도 줄 수 있다.

지구 윤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명상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냉담한 것이다. 한국의 승단은 현대문명의 종말까지를 명상하고 행동할 때, 존경을 받을 것이다.

“내면 성찰이 사회적 고통 성찰과 자비행으로 이어져야“
(명상은 사회적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가?)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명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과 그것을 통해 마음의 평온 또는 고통의 해소를 의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 명상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명상의 목적에 더해서 다르마의 깨침을 통한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붓다가 강조하는 명상의 핵심은 ‘홀로 있는 것을 피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의 멈춤에 드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괴로움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해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사성제이고, 그 사성제에 이르는 수행법이 곧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요약되는 멈춤과 통찰의 불교 명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과 실천의 연계성을 연기(緣起)와 공(空)이라는 사회현상의 본질과 연결지으면서 사회적 고통을 유발시키는 원인을 찾아 해소시키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고통은 탐욕을 근간으로 삼아 이기성과 고립성을 강화하는 사회체제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명상은 이러한 사회구조와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고 주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자칫 개인적 고통의 치유라는 환상 또는 착각을 심어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는 ‘힐링(healing) 열풍’은 자칫 상업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곧 소멸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고는 불교 명상 또는 힐링이 본래의 연기적 기반을 상실한 채 고립된 개인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진행될 경우에 현실화될 수밖에 없는 적절한 경고다.

불교 명상이 다른 명상과 차별화될 수 있는 핵심 지점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 곧바로 자신과 연기적 관계 속에 있는 타자는 물론 가족과 국가, 지구공동체라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고통에 대한 성찰과 연민, 그리고 자비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불교 사회윤리적 정언명법의 논리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단순히 분리된 자신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자신의 심리적 평안을 얻는데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불교 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명상 “치유 주종관계 형성” VS 禪 “중생본래 완결성 전제”
(불교 수행과 명상, 접점은 어디인가: 禪을 중심으로)

 

▲ 박재현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명상을 통해 심리적 고통이나 병리상태가 치유되고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분명 좋은 일이다. 다만, 명상이 치유라면 필연적으로 치유자와 피치유자 사이에 주종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주종관계는 지속될수록 강화되고, 주종관계가 강화될수록 피치유자는 더욱 종속되고 나약해진다. 이것이 모든 치료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치유와 행복이 목적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이 병들어 있고 불행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전제가 없으면 치유와 행복이 목적으로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자신의 중생성을 안타깝게 여기고 깨닫기 위해 애쓰는 것은 분명 장한 일이다.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 그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으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박수쳐줄 일이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선은 이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 정면으로 대적한다. 이런 식의 인식론적 전제는 중생을 더욱 중생스럽게 할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전환을 모색했다. 불성과 돈오는 중생의 본래 완결성을 전제로 하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의 결과물이다.

돈오의 인간관에서 중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조리 부처다. 남김없이 다 부처이니 목적태로 설정할 것이 따로 없고, 목적이 없으니 그것을 얻거나 거기에 이르기 위해 애쓸 이유도 없다. 심지어 그런 일체의 애쓰는 짓은 다 옳지 못하니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까지 공언한다. 돈오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치유를 모색하는 등의 행위는 이미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한, 치유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치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명상의 논리와, 일체의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미망(迷妄)을 양산할 뿐이라고 보는 선의 논리 사이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은 아직 깊고 멀어 보인다. 선 수행과 명상의 접점은 아직은 희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접점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접점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다는 사실에 있다.

“명상 붐, 기존문화와 융합돼 전문화 과정으로 진화“
(명상 붐과 불교계의 대응)

▲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 교수)

급격한 정보화 사회로의 이동과 함께 명상 붐이 확산될수록 현실문제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했다.

이런 시대적 요청은 내부적으로는 전통적인 수련회를 템플스테이로 확대하였고, 승가교육의 개혁으로 이어졌고, 외부로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새로운 분야에 응용되면서 불교명상의 사회적 역할확대(청소년문제, 사회복지)로 연결되었다.

명상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모든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된 인간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명상을 문화현상으로서 이해하고 특별하게 불교적인 관점으로 제한해서 이해한다면, 명상의 유입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명상의 상담과 심리치료에 활용은 미국에서 1990년에 시작되어 국내에는 2000년 이후에 유입되면서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 영역은 불교계보다는 상담학과 심리학계, 혹은 의학계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2010년에 사띠의 번역(마음챙김인가, 알아차림인가)문제로 2차 사띠 논쟁이 발생했다.
외형적으로는 명상의 핵심개념인 사띠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와 연결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불교명상이 심리치료 분야에 활용될 때,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런 논쟁은 불교명상의 활용에 관한 논의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전통적 문헌적 관점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유용성의 분야로 돌렸다.

또한 이것은 불교명상이 이웃 학문영역인 심리학과 결합되면서 ‘명상심리치료’, 혹은 ‘명상상담’과 같은 새로운 학문영역을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새로운 분야는 대학과 다양한 전문학회로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구체적으로 대학에서는 명상과 관련된 학과(명상상담, 불교상담심리)가 설치되고 대학원에서는 전공분야(명상학, 명상심리)가 생겨났으며, 명상과 관련된 연구소나 학회(명상상담(치료)학회, 불교심리치료학회, 명상치유학회)가 설립되었다. 이제 명상은 단순한 대중적 명상 붐이 아니라, 기존문화와 융합되어 토착화되고, 연구되면서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전문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 이날 세미나에는 명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는 것을 증명하듯 200여 청중들이 참석, 자리가 없어 서서 듣는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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