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상의 예술 세계

대상의 정신을 묘사한  ‘신사’
동양에만 있는 중요 미학 개념
유명 나한상, ‘신사’ 평가 많아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사실과 환상의 경계 미묘히 유지
종교·과학도 사실성 근거는 믿음

 

▲ 거조암의 오백 나한상. 예술작품에서 ‘사실’은 궁극적으로 가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종교적인 경험도 비슷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예술작품의 비평기준은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였다. 예술작품과 그 원본이 된 실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서양에서는 “미메시스(모방)”이라고 하고 동양에서는 ‘似(닮음)’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들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동양에서는 대상의 외관을 유사하게 그린 것을 ‘형사(形似)’라고 하고 대상의 정신성이나 기운을 생동적으로 그려낸 것을 ‘신사(神似)’라고 하여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를 높이 평가하는데, 서양미학에는 이러한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아예 예술작품의 대상이 실존하지 않는 종교예술작품은 무엇으로 모방의 대상을 삼을 수 있을까? 이처럼 신화적 인물이나 초인간적인 대상을 묘사한 종교적 도상에 대해서도 ‘미메시스’나 ‘似’라고 하는 비평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나아가 과학과 상식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현대사회에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을 재현하는 종교예술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나한도에 대한 옛 사람들의 글에 “핍진하다”, “살아있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1618년 양양부사 정엽이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쓴 <금강록(金剛錄)>에는 금강산 장안사에 모셔진 나한상이 “그 모습이 각각 다르고 자세가 기이하지만 아름답거나 추한 모습이 극진하여 묘하기가 승려의 모습을 조각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조선 후기 예림의 총수였던 강세황이 1788년 금강산을 유람한 후 남긴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도 장안사의 나한상에 대한 감회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안사는 이미 쇠락했으나 “이른바 사성전에는 흙으로 빚은 십육나한상이 있었는데, 교묘하기가 입신의 경지에 들었으며 완연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라고 한다. 김창흡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도 나한상이 “극히 정교하고 오묘하며 빽빽이 늘어서 생기가 있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사실, 실존하지 않는 종교적 도상에 대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생기가 있다”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엄격히 말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나한상에 대하여 어떻게 옛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일까?

미술사 연구에서 나한상은 도석인물화로 분류된다. 중국에서 나한상은 남북조시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여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오대와 송나라, 원나라 때는 나한신앙이 크게 성행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수의 나한도가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북송시대 나한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재 일본 경도의 청량사에 소장되어 있는 십육나한도 16폭인데, 현존하는 십육나한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와 불교의 종교적 인물을 그린 도석인물화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제작되었지만, 오대 이후에는 도석인물화에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불상이나 보살상보다 나한과 관음의 상이 더 많이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나한상은 직업화가나 승려화가뿐 아니라 문인화가들도 즐겨 그렸다고 하는데, 송대 문인화가 이공린(李公麟, 1049~1106)의 나한도가 유명하다.

옛 사람들은 나한도를 그릴 때 무엇을 그렸을까? 상상속의 나한을 그렸을까? 아니면 그들만 특별히 볼 수 있었던 나한이 있었을까? 나한은 부처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 곁을 지켜주는 존재로 알려졌기 때문에 불교의 다른 도상들과 달리 인간적인 특징을 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한은 부처와 인간의 중간쯤 되는 존재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는데, 승려화가 관휴(貫休)가 그린 나한도 중 한 인물이 그의 초상을 투영했다는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실제 승려, 특히 조사스님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호인(胡人), 즉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를 한 서역인의 모습으로 재현된 나한상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나한도의 사실성을 논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괴하게 과장된 얼굴과 백발, 긴 눈썹과 같은 것들은 아무리 나한의 비범하고 초월적인 특징을 재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성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호랑이에 기대거나 드러누워 있거나 등을 긁는 모습은 세상을 초탈한 나한의 신통자재를 표현한다고 생각했지만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서 어울리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 도상들이 “살아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나한들도 실존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과학과 상식은 눈에 보이고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것들만 사실이라고 믿는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한 청년과 호랑이의 표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가족을 잃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홀로 살아남은 인도 청년 파이는 아버지의 동물원에서 기르던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그리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작은 구명보트에 있게 된다. 곧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다시 파이를 공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의 밥이 되고 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는데, 호랑이와 함께 있다니! 살아남은 두 생명, 호랑이와 파이는 어떻게 이 구명보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파이는 구조된 뒤 그를 조사했던 일본인 선박회사 직원들에게 그가 작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지냈으며 아름다운 식인섬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누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3D 영화로 보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별빛에 빛나는 바다와 고래, 식인섬의 환상적인 장면은 영화사에 남을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장면이지만 호랑이와 식인섬의 이야기는 합리적인 지성을 적용하면 도저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지에 불과하다. 과연 파이는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함께 있었을까? 식인섬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파이의 조난 이야기는 그의 환각이 아닐까?

그래서 파이는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물들 대신 그는 프랑스 요리사와 다리를 다친 일본인 선원, 그리고 파이의 엄마와 파이의 이야기로 바꾸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리사가 선원을 죽이고 그 다음 엄마를 죽인다. 그것을 보고 분노한 파이가 요리사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먹으며 살아남았다는 새로운 이야기는 동물들의 이야기와 달리 믿을 만하지만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가 된다. 동물 이야기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었던 식인섬의 이야기도 파이가 식인에 대한 죄의식을 은폐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은 파이가 가족을 잃고 망망대해를 떠돌며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뿐이다. 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로 해주었다. 하나는 아름답고 환상적이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듯하지만 삭막하고 잔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믿기 어렵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믿을만하지만 잔혹한 이야기-영화는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말하지 않고 선택을 관객에게 맡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 자체는 공상적이지 않다. 환상과 과학 사이에서 놀랍도록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호랑이와 인간의 우정을 말하지 않으며, 호랑이의 야수성과 인간 파이의 지성을 파이의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여지도 계속 열어놓는다.

또한 파이는 순수하게 신을 믿고 호랑이와의 소통을 꿈꾸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가 가르쳐준 과학과 합리적 지성, 그리고 구명보트에 준비된 비상구조용 책자를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호랑이를 길들이며 조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간다. 영화는 우리에게 파이의 이야기를 믿게 하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믿는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사실’이 거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일까?
예술작품에서 ‘사실’은 궁극적으로 가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경험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호랑이를 길들이고 낚시를 하는 과학적 지식이, 다른 한편으로 호랑이와 친구가 되고 식인섬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파이의 생명을 구한 것처럼, 어쩌면 과학도 종교도 ‘사실성’의 근거는 믿음일 것이다.

환상이고 꿈일지 모르지만 호랑이와 식인섬의 이야기와 믿을 만하지만 조리사와 항해사, 엄마가 살인을 하고 식인을 하는 이야기 중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동아시아의 옛 사람들은 나한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한을 바위에 걸터 앉았거나 나무 아래 쉬고 있는 현실적인 선승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했지만 호랑이를 타고 용을 안고 있는 공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매우 생동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선택하면 우리는 또 다른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나한을 선택한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산신과 호랑이, 조사와 까치 등등 연속되는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옛날이야기가 전하는 환상적이지만 진실한 이야기를 동아시아 예술에서 읽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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