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정연정 교수(동국대 생태환경연구소)

▲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생태환경연구소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생태학, 생태문화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시의 전통성과 불교생태의식>, <에코토피아를 위한 풍경과 시선> 등이 있고,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김시습 한시에 구현된 불교생태학적 세계관>, <조지훈 시의 불교생태학적 세계관 연구> 등이 있다.


인간 몸에 의식 결합하는 것이

불교적 생명체․중생
현재 장기이식 대기자 2만 명
생명나눔은 행복사회 밑거름

 박노해 시인의 ‘인다라의 구슬’에는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난다’는 구절이 있다. ‘세상의 관계 그물에서 세상도, 인생도, 나도, 생동하는 우주 그물에 이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8월 24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진행된 법회. 정연정 교수는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과 무아설을 설명하며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와 보시의 보살행이, 장기기증이라는 나눔의 실천과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반생명의 시대
21세기가 되면서 우리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했습니다. 20세기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마라’ 등과 같은 부정성과 강제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에 대한 제재로 이어져 범죄율의 증가를 가져오기도 했죠. 반면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도 자기착취라는 부정적 한계가 깃들어있습니다. 사회가 실적위주, 결과위주다 보니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지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게 되는 거죠.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은 신경성 질병으로 고통 받고, 사회에는 소진증후군이 만연하게 됩니다. 사회가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반생명의 시대로 거꾸로 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의 동체대비가르침에 따라 생명을 살리고, 생명 나눔의 실천적 지혜를 불교인으로서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부처를 발견하다

병은 항생제로 치료가 되지만 현대 사회가 가진 질병에는 가장 강력한 침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낯선 마주침입니다. 아마 우리 일생일대에 가장 강력한 정문일침일 겁니다. 서로를 마주 바라보십시오. 민망하고 낯설지 않나요? 상대의 눈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상대의 눈에서 부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색함을 느꼈다면 거대한 벽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수라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아가의 눈을 들여다보며 부처님을 발견했답니다. 그리고 국어사전을 뒤져가며 발견한 단어가 바로 ‘눈부처’였답니다. ‘상대의 눈동자에 나타난 사람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따라 상대를 부처로도, 벽으로도, 아수라로도 느끼겠죠. 잠시 정호승 시인의 ‘눈부처’라는 시를 감상해보겠습니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누군가의 눈부처가 되길 바라며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의 생명관
불교의 생명관이란 무엇일까요.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이렇다 할 보편적 정의가 없기에, 생명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가 내려지곤 합니다. 생물학은 인간과 식물,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란 DNA 사슬에 담긴 유전 정보가 조성된 몸을 말합니다. 자기복제가 가능하죠. 불교에서는 죽여서는 안 되는 생명체인 중생을 생명으로 봅니다. 육도중생을 떠도는 존재죠. 인간, 축생, 천신, 아수라, 아귀, 지옥을 오가는, DNA와는 무관한 중생이죠. 생명에 대한 생물학과 불교적 관점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겁니다. 생물학에서는 식물을 생명으로 보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식물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거죠. 불교에서는 인간의 몸에 의식이 결합되어야만 불교적 생명체, 중생으로 봅니다. 반면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마음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논의에서 넘어가 이제는 불교적 인간관과 죽음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불교는 ‘불상생’이라고 생명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걸림 없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고, 자비와 윤리의 보시 또한 강조합니다.
불교에서 보자면 인간은 오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존재의 다발이죠. 인간은 오온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이는 바로 고(高)와 연결됩니다. 즉 오온이 고인 셈이죠. 그러나 이러한 인간도 연기론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아론은 장기이식의 불교적 근거
무아설을 보면 비실체성, 탈집착 이런 말들을 많이 하죠. 이런 의미에서 무아설은 불교의 근본적 인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존재에 대한 실체적 인식이 담겨있죠.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불교에서는 보기에, 무아설은 장기이식을 위한 불교적 근거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죽을 때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장기이식을 한다면 불교적 생명윤리로 봤을 때 더욱 좋은 일 아닐까요.
의사들은 장기이식에 있어 뇌사상태가 적합하다고 합니다. 뇌사는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뇌사 상태를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수명(壽命), 체열(體熱), 의식(意識)이 없다면 육체는 동물을 위한 희생물, 즉 고기로 버려진다고 원시불교에서 이야기하니까요.
예전에는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발달은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식물인간은 회생 가능성이 있지만 뇌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자가호흡이 불가능하기에 호흡기를 떼는 순간 뇌사환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더 이상 살 가능성이 없는데 호흡기에 의지할 경우 이는 환자 가정의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왜 요즘 뇌사자의 장기기증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논의되는 걸까요. 의료인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증, 즉 생체기증보다 뇌사기증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뇌사기증은 한사람의 기증자로부터 동시에 여러 장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거죠. 또한 생체기증과는 달리 기증자의 건강과 안정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뇌사장기기증 활성화 돼야
혹시 ‘은서법’에 대해 아시나요? 법에서 정한 이식 허용 장기를 확대하자는 주장으로, 작년에 은서가 7개의 장기를 이식받아서 살아났는데 이게 법적으로는 불법이었습니다. 장기이식을 한꺼번에 7개씩 할 수가 없었던 거죠.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의사의 윤리적 행동과 법률상의 충돌로 수술을 집도한 의사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은서법’을 만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소장을 이식할 때 대장·위·십이지장·비장 등 연결부수 장기의 동시 이식이 꼭 필요한 경우 이를 허용하도록 법이 개정됐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측면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소아 환자에게 장기이식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으나, 한국은 어른이 우선입니다. 우리나라는 가부장적 유교 전통이 강하다보니, 소아어린이 장기기증자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면 어른이 먼저 가져가고 없답니다. 소아기증자의 경우 소아한테 가는 게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서는 허용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다시 ‘제2의 은서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거죠.
현재 우리나라 장기 이식 대기자가 2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금 이식 신청을 하면 2~3년이 걸린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급한 환자들은 더 이상 삶을 유지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중국이나 저소득 국가로 관광을 핑계 삼아 암암리에 장기이식을 목적으로 건너가는 실정입니다. 이렇듯 장기 대기자가 많다 보니까 불법매매가 통용되고 신장 하나는 3억 정도에 거래가 된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생체기증자가 이식자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기 불법 매매를 법적으로 허용해 놓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암암리에 서로 거래가 오가면 제재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장기기증의 형태는 뇌사기증, 사후기증, 생체기증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생체기증 비율이 높습니다. 가족 전통과 유대감이 끈끈하다 보니 주위에서도 종종 가족 간에 신장과 간이식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 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존재하는 것도, 우리나라 생체 기증 비율을 높이는 데 한 몫 합니다. 법적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죠. 장기기증의 역사는 40년이나 넘었고 되었고 신장이식은 3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장기이식 성공률 또한 95%이상이고 항생제도 개발이 잘 되어 있기에 장기이식의 부작용은 없는 편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우리나라 장기이식법에 대한 문제는 뇌사판정 절차가 복잡하다는 겁니다. 뇌사판정에 관한 제도가 복잡하기에 판정까지는 절차상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기증을 하려해도 그 시간동안 기증 장기의 기능 손상을 가져오는 것도 문제죠. 물론 뇌사판정을 너무 빠르게 하는 것도 문제가 되긴 합니다.
뇌사기증 희망자수를 세계별로 비교해보면 1위는 스페인입니다. 뇌사기증자수가 100명당 32명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100명당 5.5명 수준입니다. 한국은 장기기증 희망신청자에 한해서만 장기를 기증받지만, 스페인은 장기를 기증하지 않겠다는 사람 빼고는 자동적으로 장기 기증 희망자 명단에 등록되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잠재적 장기기증자인 셈이죠. 때문에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기간은 스페인의 경우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몸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는 유교적 전통문화 문화와 함께 타인의 장기이식에 대해 갖는 부정적인 두려움 때문에 장기기증 활성화가 안 되는 실정입니다. 설사 본인이 희망한다 해도 가족이 반대하면 결코 기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장기기증에는 연기론 담겨 있어
오늘날 자비는 하나의 낱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 ‘자(慈)와 비(悲)는 별개의 말입니다. 자(慈)란 생명 있는 모든 일체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것을 뜻하며, 비(悲)란 불행을 없애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 윤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 즉 중생(衆生)의 윤리라는 점을 특색으로 삼고 있으므로, 자비사상은 일체의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평등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비와 연계된 보시 원칙을 말씀드리면 첫째, 귀하고 아까운 것을 보시하고 둘째,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고 셋째,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며 넷째, 인과법을 믿으면서 보시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킬 때 공덕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선업이 됩니다. 따라서 나눔의 실천으로서 장기이식은 연기론의 관점에서 볼 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데 좋은 밑바탕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