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蓮花] → 영기꽃[靈氣花]

드디어 연꽃의 정체를 밝힐 때가 왔다. 불교미술에서 역사적으로 표현된 연꽃을 연꽃이 아니고 영기꽃[靈氣花] 혹은 영화[靈花]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깜짝 놀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귀면(鬼面)을 귀면이 아니고 용면(龍面)이라 깨달은 이후 10년 만에 각 박물관에서 귀면을 용면이라고 바꿀 때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일 것이다.

조형미술의 역사에서 연꽃의 무한한 변형은 왜 이루어져왔을까? 그 무수하고 다양한 연꽃들의 조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티브만 연꽃 모양처럼 보일뿐, 연꽃이 영화(靈化)되었음을 즉, 다른 차원의 신령스러운 꽃으로 변형되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왜 이토록 변형되어 왔는지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연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인식하여 왔기 때문에 오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연꽃이라고 하면 누구나 현실에서 보는 연꽃을 상기할 것이지만 그 연꽃에서는 만물이 탄생할 수 없다. 그 연꽃을 조형적으로 영화시켜서 차원이 전혀 다른 ‘영기꽃[靈氣花]’으로 변형시켜야 비로소 만물이 화생할 수 있다. 영기화는 영화(靈花)라고 약하여 쓸 수 있으나 반드시 한자(漢字)로 써야 한다.

그 밖에 예를 들면, 연꽃 이외에 모란 또는 국화, 보상화 등도 올바른 용어가 아니다. 이 용어들을 바로 잡으려면 앞으로 상당한 시간과 증거자료를 들면서 설명해야 하므로 후일을 기한다.

나는 영화된 다양한 꽃들을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는 영기꽃’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를 줄여서 ‘영기꽃’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슨 꽃이든 모두가 씨방 안에 생명의 근원인 수많은 씨앗을 지니고 있기에 꽃이 중요한 것이다. 아름다운 꽃잎모양은 다만 씨방을 감싸며 보호해왔던 겉껍질 같은 것인데 우리는 그 겉껍질에만 관심을 가지고 눈길을 던져왔다. 본질은 씨앗에 있다.

바로 그 씨앗을 고차원의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씨앗을 더 강력한 생명의 근원인 ‘보주’로 변형시키며 영화된 상태로 만들어서 만물을 탄생케 해왔다. 말하자면, 형이하학적 상태를 탈바꿈하여 형이상학적인 조형으로 변형시킨 것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변형된 형이상학적 상태를 보여주는 조형을 보고 현실의 형이하학적 용어로 불러왔으므로 오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서 명명한 것이 바로 ‘영기꽃’ 혹은 ‘영화’다.

일찍이 석가여래께서 아무 말도 없이 연꽃을 들어 올리자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역시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것이다.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을 염화미소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연꽃이 아니다. 그 때 만일 석가여래가 막대기를 들었어도 가섭은 같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광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마음’의 문제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후세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연꽃에 불교의 진리가 숨어있다고 들어오면서 연꽃 즉 불교, ‘연꽃=불교’라는 등식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연꽃과 관련된 상징적 행위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날이 갈수록 그 상징이 강화되어 갈 뿐이다. 진흙탕에서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꽃피는 유일한 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진흙탕에서는 파피루스도 피고 수련도 피고 그 밖에 그런 꽃은 무수히 많이 있으며, 더구나 대부분의 꽃은 온갖 균이나 벌레들이나 득실거리는 딱딱한 땅에서 기적적으로 순수한 생명이 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아미타경>에서 말하기를, 중생 가운데 선업을 쌓으면 극락세계 연지(蓮池)의 연꽃에서 ‘연화화생(蓮花化生)’한다는 말이 유일하게 있으므로 더구나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더구나 연화화생이라는 경전의 기록 때문에 우리는 여래와 보살을 탄생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읽을 수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다. 불교미술에서는 여래가 연꽃에서만 화생하지 않고 수많은 화생의 도상이 있음을 찾아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더구나 경전을 읽어보면 여래나 보살이 연꽃에서 화생했다는 기록은 일체 없는데도 우리는 여래나 보살의 연화화생이라는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사용해 왔다.

불화 같은 조형미술을 살펴보면 현실에서 보는 연꽃 모양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형태가 다른 수많은 꽃에서도 탄생하는데 대부분 꽃 밑에 ‘물’이나 ‘영기문’이 반드시 있으며, 우리가 염화미소를 나타내는 도상에서 석가여래가 지물(持物)로 들고 있는 것도 자세히 보면 연꽃이 아니며 제2영기싹 갈래 사이에서 생기는 영기꽃이며 모란모양 영기꽃도 있다. 그런 까닭에 연화화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영기화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연꽃이 왜 아닌지는 우선 고구려 천정 벽화의 대연화(大蓮花)의 조형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들 조형은 원래 채색이 있으나 필자가 파악하기 쉽게 채색분석한 것이다. 고구려 삼실총 천정벽화 연꽃을 살펴보자.(그림 ①)

중앙에 씨방이 있고 주변으로 연잎 같은 것이 있는데 잎 모양마다에 제1영기싹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잎 갈래 사이에서 보주 같은 모양이 생겨나고 그 곳에서 각각 제1영기싹들이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노란색의 큰 잎이 생기는데 각 잎마다 빗금들이 쳐있고 그 끝이 매우 뾰족하고 길게 뻗어나가고 있다. 다시 그 잎들 사이에서 무엇인가 역시 끝이 뾰족하고 길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조형은 갈래 사이에서 연속적으로 무엇인가 생겨나는 ‘제3영기싹의 연속적인 전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날카롭게 역동적으로 확산(擴散)하는 느낌을 준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꽃잎 같은 형태가 아니고 단지 꽃 같은 형태를 빌려서 표현한 영기문의 여러 가지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무한한 확산의 상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형태에 붙잡혀서 중요한 영기의 속성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연화는 만물생성의 근원으로써 천정에 표현된 것이며 그러기 위해 꽃 같은 형태에 제1영기싹이나 빗금들을 부여하여 강력히 영화시키고 있다. 그래야만 만물이 영기화생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벽화 천정의 꽃이 연꽃으로 보입니까? 세상에 이런 연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여래를 형상으로 보지 말라’ 라는 금강경의 말과 같이, ‘이 연꽃도 형상으로 보지 말라’ 라고 역설하고 싶습니다. 여래가 무한한 생명의 확산이듯이 대연화도 무한한 생명의 확산이다. 그런데 이 조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의 씨방이다. 씨방 안의 만물 생성의 근원인 무량한 씨앗들이 점차 조형적으로 보주의 형태와 상징을 띠게 되므로 이 조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씨방이기 때문에 그 만물의 근원으로부터 중첩하며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것은 잎이 아니라 강력한 영기문의 확산이다.

연화총(蓮花塚) 천정벽화의 영기꽃도 마찬가지다.(그림 ②) 장천1호분 벽화의 연꽃에서는 중심의 씨방을 아예 커다란 보주하나로 나타내어 그 보주에서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영기문을 표현하여 보주의 무한한 확산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③)

천정 벽화의 대연화(大蓮花) 혹은 천연화(天蓮花)는 10년 동안 주저하며 흡족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모두 현실에서 보아온 연꽃이라는 형상에 집착하여왔었는데, 마침내 그 형상과 오류에서 벗어나니 꽃이 바로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오늘 큰 깨침이 있었다. 여래와 영기꽃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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