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지극한 신심…모든 장애 극복
뿌리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아


원력과 신심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절에서는 매년 백중 백일 전부터 백중까지 백일동안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회향 후 영가들의 위폐를 모시고 방생을 떠난다. 올 해는 여수 향일암과 흥국사로 가기로 했다. 도중에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올리고 위폐는 태우고 극락왕생을 축원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일 만도 한데 여전히 폭염이 이어진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좀 올 기세다. 부산은 비 구경한지가 너무 오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우린 박수로 비를 맞이했다. 기도 덕택 인 것 같았다. 버스 네 대로 나눠 탔다. 세 대는 우리 스님들이 각각 나누어 타고 나머지 한 대는 내가 맡아 가게 되었다. 우리 신도들 중엔 연로한 어르신들이 많아 오늘도 무사히 잘 다녀오게 되길 기원하며 길을 떠났다. 여수라면 얼마 전 세계 박람회를 개최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이순신 다리를 건널 때는 우리 토목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드디어 향일암에 도착했다. 아랫마을에서 내려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야 했는데 어르신들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분도 뒤처지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법당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정성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깊은 신심을 읽을 수 있었다.
공양 후 다시 내려올 때도 부처님을 뵙고 오는 길이라서 그런지 어르신들의 모습에는 힘든 기색이 없었다. 그런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지극한 신심은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향일암을 떠나 다시 흥국사로 향했다. 흥국사는 보물이 9개나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고려때 지은 원통전은 1624년(인조 2년) 계특 대사가 다시 지은 당우로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법당이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은 당시 지역 불상의 양식적 특징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목불로서 조각 수법도 매우 뛰어나다. 몸채의 균형과 변화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이와 같은 크기의 보살상을 동반한 삼존불이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지 스님이 절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후불탱화는 1693년 숙종 19년에 왕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여 화가였던 의천과 천신 두 스님이 그렸다고 한다. 보물로는 대웅전, 후불탱화, 목조석가여래 삼존상, 홍교, 목조지장 삼존상(시왕상 일괄), 노사나불 괘불탱화, 수월관음도, 십육나한, 동종이며, 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로 원통전, 팔상전, 흥국사 삼장 보살도, 제석도 등이 있다.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흥국사는 다른 절 보다 더욱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단청을 하지 않은 나무결이며, 높게 지은 법당이며,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니 선인들의 불심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소중한 이 보물들을 잘 지켜야 함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앞서 들렀던 향일암도 전국의 신도님들의 정성으로 아름답고도 화려한 금빛 절을 이루어 놓았지만 몇 년 전 타 종교인의 광신으로 도량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다. 향일암의 아픈 기억을 생각하면 도량의 소중함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말이지 싶었다. 새로이 짓는 것보다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들을 잘 지켜야 할 일이다.
이렇게 사찰을 다니다 보면 사찰에서 보고 느끼는 불심들이 있다. 그런 불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가볍고 뿌듯하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도반들과 부처님 말씀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어디를 가도 우리는 부처님의 품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기에 그 누구도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의 개종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48가구의 반장을 맡고 있다. 반장을 하게 된 동기는 우리 앞집에 살던 젊은 부인이 반장을 했었는데, 이사를 가면서 장부를 내게 맡기고 간 뒤부터 얼떨결에 맡게 됐다.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그때만 해도 잠깐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하게 되었다.
오늘은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오던 아랫집 아저씨가 위암을 앓아오다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이웃사람들과 병원 영안실로 문상을 갔었다. 그런데 영전에 향을 올리다 발견한 영가의 세례명(베드로)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불자였고 아내는 어느 사찰 다도회 사범으로 열심히 활동해오던 집안이었다. 이곳 성모병원으로 입원하면서 타종교인들로부터 헌신적인 간병을 받은 것 같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교화된 듯했다. 그러다보니 장례식도 천주교식으로 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자인 나로서는 섭섭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온 가족이 시간 맞춰 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이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내가 운전하고 갈 때, 지금쯤 어느 스님께서 오셔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 했는데…. 오래도록 불자로 살아온 집이었기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그래도 “49재는 어느 절에서 할 거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49재도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고인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들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 불교에서도 많은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이 말년에 죽음 앞에서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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