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 대사 열반 1300주년 기념 특집 순례기

혜능 대사 등신불
9월 7일(음력 8월 3일)은 동아시아 불교와 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혜능 대사의 원적 13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력 638년에 태어나 75세의 일기로 713년에 입적한 혜능 대사는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불교 대표종단인 조계종(曹溪宗)과 한국불교 1번지로 꼽히는 조계사(曹溪寺)의 명칭은 혜능 대사가 주석했던 조계(曹溪)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의 법어(法語)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과 함께 조계종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다.

몇 해 전 필자는 제2조 혜가 대사에서 제5조 홍인 대사까지의 유적지를 모두 답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남부 지방에 위치해 있는 제6조 혜능 대사의 유적지는 보지 못했다. 인도불교가 전공이지만 오래 전부터 혜능 대사의 유적지를 답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불자로서 나에게 <육조단경>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몇 년 전 서울시내의 한 불교대학에서 나의 강의를 들었던 분이 갑자기 전화를 하였다. 마카오에서 불교미술전람회에 초청받았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자는 요청에 필자는 마카오 인근 광동성(廣東城)에 위치한 혜능 대사의 유적들이 생각났다. 특히 올해가 혜능대사 원적 1300주년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큰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카오 일정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버스를 타고 광동성 수도인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바로 광주 시내에 있는 광효사(光孝寺)와 육용사를 참배하였다.

현재의 광효사는 <육조단경>의 법성사(法性寺)다.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뒤 16년간 은둔하며 지내다가 767년에 대중에게 그 진면목을 발휘한 곳이다. 혜능 대사의 진면목은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으로 드러난다. 풍번문답이란 ‘바람이 움직인 것인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가로 설왕설래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혜능 대사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는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이후 혜능 대사는 구족계를 받고 삭발한 머리카락을 철제탑에 봉안했는데 이 철제탑은 광효사에서 가장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유적물이다.

남화선사 입구의 조계 현판.
필자를 놀라게 했던 것은 도량에 있는 보리수였다. <단경>에 인도의 지약삼장이 인도로부터 가지고 와서 심었다고 하는 그 보리수의 후손일 것이다. 혜능 대사는 이 나무 옆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전 다른 중국 선종 사찰의 유적지에서 인도의 보리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의 보리수는 진짜 인도의 보리수라서 감격스러웠다. 이전에 중국도 보리수가 있다면 우리나라처럼 ‘피나무’를 보리수라고 여기고 있는 것 정도로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로 보리수였다.

나중에 보니 혜능 대사가 오래 머물렀던 남화선사(南華禪寺)(<단경>의 보림사(寶林寺)나 육용사 그리고 대감사 등에서도 우람한 보리수를 볼 수 있었다. 이를 보면서 시대를 초월하여 인도불교와의 연결점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보리수는 과거나 현재에도 부처님 대신 숭배가 될 정도 중요하게 여기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인도의 보드가야는 물론 스리랑카나 미얀마 등지의 열대나라는 사찰 건립 시 반드시 보리수를 심고 숭배하는 종교문화가 있다. 과거에는 중국의 남부지방에서도 그러하였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필자는 보리수가 절에만 있는지 아니면 중국 남부에 자생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보리수 잎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서도 끝내 물어보지 못하고 현재 내 책상에까지 와 있다.

혜능 대사의 탄생지와 활동무대는 보리수가 살 수 있는 무더운 지역이었다.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광동성의 수도는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조계(曹溪)가 있는 소관의 산간지역에는 가끔 눈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소관은 혜능 대사가 오래 머물렀던 남화선사가 있는 지역으로 광주에서 약 233km 정도의 거리이다. 대략 혜능 대사의 활동무대는 광주를 중심으로 소관과 그리고 탄생과 입적지인 신흥에 걸친 지역으로 대략 400km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혜능 대사가 30년 간 법을 펼친 남화선사를 들어가는 4km 전의 도로에는 거대한 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판에는 ‘혜능 대사 원적 1300주년’이라는 문구와 함께 대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남화선사에 이르기까지 양 길가는 <단경> 구절과 불기(佛旗)로 장엄됐다.

원적일인 9월 7일부터 15일까지 9일 동안에는 1300주년 기념법회와 다양한 문화 축제 등을 진행한다고 한다. 또 혜능 대사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한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중국이 불교문화유산에 대한 가치를 드높이려고 노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남화선사에 도착하여 함께 했던 불광연구원의 서재영 박사와 함께 1300년 전의 혜능 대사의 흔적을 찾아보려 여기저기 탐색을 하였다.

안타깝게도 혜능 대사의 진신상을 모셔놓은 조전(祖殿)은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대신 혜능 대사가 법의를 세탁하기 위해 주장자로 내리 친 땅에서 샘이 생겼다는 <단경>의 이야기는 지금도 ‘탁석천(卓錫泉)’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떠 마시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혜능 대사는 <단경>에 ‘조실(祖室)’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당대에 광동성에서는 크게 법력을 펼쳤던 것이 확실하다. 원적한지 5~6년 뒤에 누가 와서 자신의 머리를 훔칠 것이라는 예견은 흥미롭게도 신라출신이 그 역할을 맡았다. 신라 말엽 김대비라는 스님이다.

조전의 혜능 등신불은 김대비의 실패를 이야기하지만 쌍계사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은 한반도로 성공적인 이운을 의미한다. 이는 혜능의 원적 이후 동아시아에서 혜능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남화선사 경내의 ‘조계불학원’에는 100여 명 이상이 수행을 할 수 있는 선방이 잘 꾸며져 있었다. 들어가 보니 휴식 시간인지 한 노스님과 재가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좌복에 앉아 좌선의 자세를 취해 보았다. 중국의 선방은 우리처럼 마루에 방석이 아니라 길다란 단 위에 좌복이 설치되어 있어 졸면 바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노스님은 선방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차를 한 잔씩 대접해 주었다. 무더운 날씨에 우리는 한 참이나 혜능과 <단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화선사 입구의 혜능 열반 1300주년 간판
필자는 조계(曹溪)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알고 싶었다. 아직 우리나라는 <단경>의 번역 시에 조계산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조계는 산이 아니라 남화선사 앞의 개울이다. 개울을 중심으로 조(曺)씨들이 많이 살았기에 조계라는 것이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개울물은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조계종과 조계사 등등, 그토록 오랫동안 상상력을 펼쳤던 조계를 직접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1300년 전 혜능 대사도 바라보고 건넜을 조계, 그리고 1300년 뒤 중국본토를 넘어 조계라는 이름이 바다 건너 한반도에 계승되고 있으리라고 혜능 대사는 예견했을까. 그러면서 혜능 대사의 가르침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곳은 현재의 남화선사도 중국도 아닌 바로 조계종의 한국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혜능 대사와 관련한 궁금점이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왜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 대사와의 만남을 끝으로 결국 자신의 고향인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단경>의 이야기대로라면 신수 대사와의 관계 속에서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필자로서는 만족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중국의 선종지도를 보면 강호(江湖)는 강서(江西)와 호남(湖南)을 일컫는 지역으로서 선불교의 중심지이다. 하지만 혜능의 광동성은 강호 아래인 변두리에 위치한다. 혜능 전에도 후에도 기라성 같은 걸물들은 모두 강호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데 왜 법력이 증명된 혜능은 강호 불교에 진출하지 못했는가? 이 번 답사를 통해 광동성을 직접 밟아 보면서 서서히 의문이 풀렸다.

<단경>에 의하면, 그는 영남(嶺南) 오랑캐 출신이다. 이는 오조 홍인 대사와의 대화에서도 이야기된다. 방앗간 앞을 지나는 동자도 혜능 대사를 오랑캐 취급했다.

정확히는 <단경>은 혜능을 ‘갈료(獦獠)’라고 한다. 갈료는 한족 중심으로 볼 때 중국의 광동성과 같은 남서지방의 오랑캐 사람을 말한다. 때문에 어린 아이도 혜능을 보았을 때 자신들과 다른 모습이었기에 바로 갈료라 불렀다. 처음 <단경>을 공부할 때 영남의 오랑캐라는 오조 홍인 대사의 차별적 발언에 의아심을 품었다. 그저 이해하는 측면에서 혜능 대사의 공부를 가늠해 보기 위해 던지는 문답 정도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혜능 대사는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승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답변을 하게 됐다.

혜능 대사는 스스로 인정하듯이 강호의 한족과는 다른 외모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예로부터 광동성은 지금의 베트남 민족과 가까운 월족(越族)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을 '월(越)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월남(越南)이라 하기도 한다. 즉 태평양 연안과 동남아 등지에 흩어져 사는 ‘호주-아시아계’ 혈통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현재의 광동성 사람들을 통해 1300년 전의 혜능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무리일 수도 있다. 그 동안 끓임 없이 한족이나 만주족 등의 민족 간 이민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족은 어느 정도 뒤섞임이 있었다하더라도 월족의 언어적인 면모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즉 광동성은 현재 한자를 쓰지만 ‘중국어와 광동어’나 ‘북경어와 광동어’로 구분될 정도로 서로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 광동어는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서 중국의 7대 방언중의 하나로 포함된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혜능이 살았던 광동성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한자를 지식인의 문자로 사용했던 과거의 한반도 상황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단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혜능이 문맹이었던 것보다는 한족의 강호 사람들과는 의사소통 상에 있어 장벽을 그렇게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단경>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의 경 읽는 소리만을 듣고 법을 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단경>의 가르침에는 <유마경> 등의 많은 대승경전을 오랫동안 보고서 경전의 정수를 종횡으로 압축한 심오한 융합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를 <단경>에서는 ‘조계돈교(曹溪頓敎)’라는 말로 표현한다. 달리 말하면, 불교 설명의 출발점은 돈오의 깨달음 지점부터라는 것이다. 이러한 돈교는 이전의 점수문(漸修門)과는 크게 비교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르침이 현격하여 듣는 사람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단경>에서도 혜능과의 문답에서 어떤 이는 가르침을 들으면 점점 의혹을 더하게 된다는 구절도 바로 이러한 경우를 나타낸다. 하지만 돈교는 혜능 이후 마조(馬祖)에게도 더욱 강조적으로 잘 계승되고 있다. 즉 혜능 이후 간명직절한 돈교는 다른 불교권과 달리 중국인과 동아시아 사람을 매료시킨 힘이 된다. 이것은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과 성격으로 현재까지도 세계의 다른 불교권과 구분짓는 큰 경계가 된다.

마지막으로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 대사와의 만남을 고향인 광동성을 법을 펴는 무대로 선택한 이유는 민족과 언어라는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를 결정적으로 제6조라는 선불교 주류로 부상시킨 공로는 바로 ‘신회’에 있다고 현대불교학은 이야기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혜능 대사의 법력도 위대하지만 변두리 오랑캐를 제6조로 받아들인 강호의 법력도 위대하다. 갈료인 오랑캐 혜능 대사를 오조의 후계자로 적극 수용하고 이후 모든 선맥(禪脈)을 그로부터 구한다는 점은 놀랍다. 이는 민족을 초월하여 불성은 남북이 없다는 불교 정신을 잘 구현한 역사적인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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