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행복했던 지난 날 떠올리면
함께 사는 사람들 소중해져

큰 스님들 곁에서 행복했던 시절
어느날, 옛날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그 옛날 처녀시절 아니 부산 불교 청년회 시절부터, 아주 오래된 사진을 오랜만에 꺼내 보게 되었다.
해인사 수련회에 갔을 때 자비보살이라 불렀던 지월 스님께서 주지로 계실 때였다. 종정 고암스님과 퇴설당의 성철 스님 일타 스님 법정 스님 지관 스님 그리고 현재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 등 큰 스님들이 그곳에 다 모여 계셨다. 대각사에서 기도하던 나는 서면에서 우연히 일타 스님을 만나면서부터 감로사를 알게 되었고, 스님의 속가 외삼촌인 보경 스님(자운 스님의 맏 상좌)이 주지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감로사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절이어서 나는 백일기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새벽 감로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주지 보경 스님은 평소 엄격하고 불같은 성격이었으나 내게는 한없이 인자했다. 아마도 그 당시 처녀가 기도하는 일이 드문 일이어서 기특하게 생각 하신 것 같다. 매일 백팔배를 하고 나올 때마다 스님은 전날 재를 지낸 갖가지 과일이며 과자, 떡 등을 내어 주셨다. 그리고 일타 스님께서는 언제나 작설차를 드셨는데, 내가 차를 마시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감로사엔 자운 스님이 가끔 다녀가시고 일타 스님, 도견 스님이 자주 오셔서 많은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나는 운이 좋았다. 스님께서 주시는 차도 마셨고 어렵지 않게 스님들의 법담도 곁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보경 스님의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무언가 근심이 있어보였다. 연유를 여쭙자 스님은 “내가 큰일을 저질렀지 뭐냐” 하시며 이야기 하시기를 해인사에 계시던 자운 스님께서 장삼과 가사 그리고 입을 옷들을 소포로 보내셨는데, 아무런 편지도 없고 해서 스님 입으라고 보내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옷들이 조금 커서 그 옷들을 모두 잘라 수선을 했는데 나중에 자운 스님이 “옷을 잘 받아 두었느냐?”며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스님이 곤란한 지경임을 알면서도 상황이 우스워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님께 죄송했다. 그래도 스님은 여전히 나를 챙겨주시고 잘 대해 주셨다.
어느 해인가 보경 스님이 출가한 날을 기념하여 스님과 함께 방생을 간 적이 있었다. 버스에는 노보살님들만 가득 타고 젊은 사람은 나 혼자여서 창밖만 보고 있을 때였다. 일타 스님께서 오셔서 나를 자가용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땐 자가용이 흔하지 않았다. 구포 강으로 갔을 때 여기저기서 아낙네들이 “내 고기 좀 사이소!” 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스님은 다가가 고기 값을 물으셨다. 나는 “다 죽어가는 고기를 왜 다 사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가만히 좀 있어봐라 죽고 사는 것은 자기 명이고, 살려주는 마음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며 차비까지 다 털어 그곳의 고기를 다 사셨다. 그때서야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님은 배를 빌려 타고 염불을 하시고 목탁을 치셨다.
나는 물고기를 한 마리 한 마리를 물에 놓아주다가 아까 본 잘 생긴 고기를 번쩍 들고 “스님! 이고기 참 크고 멋있지요?” 하면서 스님 앞에 보여드리기도 했다.
다음날 감로사에 갔을 때였다. 노보살님 한 분이 스님께 “왜 가시나를 하나 달고 다니느냐?”고 따지고 계셨다.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았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응, 이 아이 말인가? 바로 명초당 한약방 딸인데 신심이 있어 같이 가자고 했지.” 하시니까 그 노 보살님 얼굴이 확 바뀌면서 내 손을 잡고는 “그래 네가 명초당 딸이라고?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 되어라.”고 하셨다. 우리 집을 잘 아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 보살님은 그 후 늘 나를 챙겨 주셨고 나는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이렇듯 많은 스님들과 어른 보살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나의 신행생활은 늘 행복 했었다.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저 지난 시절로 묻어버리기엔 그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가금씩 행복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함께 했던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된다.

태국 항공사 승무원들
오늘 내가 절하는 방에서 26년 전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흔적을 보게 됐다. 오래 전 일이지만 다시 가슴이 설레었다. 그때만 해도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어서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음식이며 여러 가지가 불편했다. 그때 30명의 도반들이 함께 했는데, 스님 15분, 우리 회원 15명이었다. 나는 당시 총무를 맡고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폭염이 그때의 인도를 생각하게 했다.
23일의 긴 여행이었는데, 태국 항공 노조의 시위로 3일 동안 태국에 머물게 되었고, 여행은 예정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놀라웠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방콕에서 인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승무원들이 몇몇 스님들께만 공양을 드리고 우리에겐 아무런 말이 없어, 우리 일행은 공양이 없는가보다 하며 가방에든 과자며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들의 공양이 끝나자 승무원들이 우리 식사를 가져왔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들을 특별히 공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스님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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