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말세’를 지키는 늙은 아라한
‘침묵의 말세’를 지키는 늙은 아라한
  • 명법 스님
  • 승인 2013.08.23 2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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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빈두로존자

시간성 표현한 유일한 도상들
청장년, 노년 모든 세대 표현
노인으로 묘사된 빈두로 존자
미래 부처 도래까지 중생 제도

부처가 없는 세상, 부처의 가르침도 사라져버린 세상을 말법시대라고 한다. 소위 ‘말세’라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도덕과 정의, 원칙마저 사라진 말세, 어느 누구도 희생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지만 서로서로 쫓고 쫓기다가 죽음에 이르러야 그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허무하고 냉혹한 현실을 멕시코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텍사스 어느 사막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옮겨놓는다.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우연히 일확천금을 한 사냥꾼과 그를 뒤쫓는 추적자, 그리고 추적자를 노리는 킬러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그리는 이 영화는 언뜻 서부영화처럼 보이지만 서부영화에 흔히 나오는 음악도, 악당을 쳐부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냥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마약 밀매 현장에서 주운 200만 달러 때문에 순식간에 쫓기는 신세가 된 사냥꾼 모스와 파리를 죽이듯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 쉬거의 잔혹한 추격전이 전면에 배치된다.

▲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스틸컷.
그들은 왜 쫓고 쫓기는 것일까?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어야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돈을 얻기 위해 모스는 자신이 무엇을 걸었는지조차 모른 채 목숨을 건 내기를 하고 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멈출 수 없다. 연쇄살인범 쉬거는 죽음에 이르러야 끝나는 탐욕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거액을 습득하는 행운과 동시에 살인마에게 쫓기는 불행이 시작된다. 돈이 없으면 종교인마저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모스가 습득한 거액 중 죽기 전에 사용한 돈은 고작 몇 십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를 뒤쫓는 쉬거는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 그의 살인은 돈을 위한 것도 아니고 복수나 정의의 구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끔직한 살인을 저지르면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동전 던지기로 살인을 결정한다.

“자, 동전의 앞면이야? 뒷면이야? 골라, 선택은 내가 해. 그것이 네 운명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에 맡겨져 있다. 돈을 얻는 것이 우연의 결과이듯이 죽음도 우연히 결정된다. 우연은 그 누구도 피해할 수 없는 것이며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쉬거는 우연이 판을 치고 끊임없이 게임의 룰이 바뀌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자비함과 무도함을 상징한다.

누가 쉬거의 무자비한 살육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죄 없는 모스의 아내를 살해하고 떠나는 순간, 사거리에서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자동차 사고로 그는 치명상을 입는다. 카오스와 혼돈, 바로 그것이 우연이 지배하는 현실의 진짜 모습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은 이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그러나 애써 희망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단서를 찾을 수 없는 희대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늙은 보안관 벨은 이 영화에 관조적 성찰의 지점을 제공한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서부개척시대의 무용담을 그린 서부영화도 아니고 연쇄살인극을 그린 스릴러 영화도 아닌, 21세기 자본주의 사회, 아메리카의 현실을 비추는 초상이 된다.

“나이가 들면 다 보이게 돼.”
늙은 보안관 벨은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살인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쉬거의 살인사건에 그의 오랜 경험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20년 전에는 사람 죽이는 이유가 분명했어. 그런데 요즘은 알 수가 없다니까. 왜 사람을 죽이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정의도 도덕도 사라진 세상, 늙은 보안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조차 원칙을 따르거나 순서에 맞추어 오는 것이 아니다. 늘 변화하는 현실을 따를 수 없는 노인은 시대에 뒤쳐진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늙은 보안관 벨은 삼촌에게 푸념조로 이야기 한다.
“언제나 생각했어요. 내가 나이가 들면, 신이 어떻게든 내 삶으로 찾아올 거라고. 그런데 오지 않네요. 뭐라 그러는 건 아니고, 아마 내가 신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삼촌이 대꾸한다. “네가 겪은 것도 새로운 건 아니야. 이 나라에선 사람들이 늘 힘들어. 세월을 막을 수는 없는 거야. 너를 기다려주지도 않을 거고. 그게 바로 허무야.”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미국은 법도 없고 원칙도 없는 나라이다. 폭력만 난무하는 이 나라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노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지혜와 편안함이 쓸모 없는 나라, 그것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 직지사 성보박물관 소장 대승사 독성탱.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회변화에 무력한 노인보안관을 그리고있다. 하지만 동양에서 노인은 인생의 지혜를 터득해 후세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중국 고대의 명저 〈노자(老子)〉는, 성은 이(李)씨고 이름은 이(耳)이고 자는 담(聃)이라고 전해지는 옛날 주나라의 어느 늙은이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공자보다 스물 살 정도 연장자이며 공자가 예(禮)를 물었다고 전해지는 이 인물이 실존인물인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이름이 왜 ‘노자’인가에 대하여, 어머니 뱃속에서 70년 있다가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날 때 이미 노인이었다는, 지금의 상식으로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 이 이야기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사실성이 아니라 노자의 ‘늙음’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늙음은 지혜의 원천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노자〉는 어느 ‘늙은이’의 이야기로 세상에 없는 지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옛날 사람들은 부처님을 ‘황면노자(黃面老子)’라고 불렀다. 불상의 황금빛 때문에 이렇게 불렀던 것인데, 그것은 불교가 도교와 동일시하여 생긴 현상이 아니라 늙은이를 지혜로운 존재로 보는 중국적 사유가 투영된 결과이다.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불상은 늙은이의 모습이 아니다. 적멸의 몸을 상징하는 붓다의 몸은 시간성을 떠나있기 때문에 불상에는 나이와 같은 시간적인 것이 표현되지 않는다. 대부분 초월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불교의 도상에는 시간성이 표현된 경우는 드물지만, 예외적으로 시간성이 강조된 도상이 있다. 다름 아니라 나한상이다. 나한의 얼굴에는 청년, 장년, 노년의 특징이 뚜렷이 표현된다. 아마도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아라한에게는 초월적인 속성보다 인간적인 속성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나한상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런데 오백 명의 아라한 중 대표인 나반존자, 즉 빈두로존자는 백발에 흰 수염을 드리우고 흰 눈썹이 길게 드리운 늙은이로 묘사된다. 운문사 사리암의 나반존자는 점잖고 부드럽고 온화한 할아버지라면, 해인사 희랑대의 나반존자는 웃음 가득한 주름진 얼굴이 동자처럼 해맑다.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늙은 보안관의 쭈그러들고 무력한 표정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반존자는 왜 노인인가? 경전의 근거에 따라 미래의 부처님이 오실 때까지 신통력으로 목숨을 연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굳이 노인으로 그를 표현했던 것은 동아시아 전통에 내려오는 ‘노인에 대한 존경’ 때문이다. 사회변동이 거의 없었던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지혜는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늙음은 지혜의 원천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나한의 천진한 얼굴은 과거 동아시아 사회에서 육체적인 힘과 물질적 소유보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소박함과 무욕이 더 높이 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래의 부처님이 오시기 전까지 부처가 없는 세상, 무도하고 냉혹하며 부처님의 말씀이 사라진 침묵의 말세를 지키는 존재는 모든 욕망이 무상함을 깨달은 욕심 없고 지혜로운 늙은 아라한일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나라에서 노인은 육체적인 쇠약함이나 세상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무력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연장할 만큼 지혜롭고 무욕한 존재로서 특징지어진다.

‘노인을 위한 나라’, 젊은 대륙 미국에는 없고 늙은 대륙 아시아에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뿐만 아니라 늙은이조차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오늘날 한국사회, 한국불교에도 여전히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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