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성 (지하철 부처님 메신저 ‘풍경소리’ 사무총장)

이용성 풍경소리 사무총장은 … 이용성 사무총장이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의 풍경소리 게시판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1981년 중앙대 철학과에 입학한 이용성 사무총장은 1986년부터 민중불교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행동본부에 민중불교연합회 대표로 참가하기도 한 그는 1988년 대승불교승가회 간사 등을 맡는 등 불교계 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풍경소리 창립을 이끌어 현재까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풍경소리 사무 외에는 5사단 수색대대 및 GOP대대 군법회를 2002년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풍경소리 명상학교에서 명상지도에 나서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1999년 불교시민운동 차원 설립
400개 게시판서 현재 2500개로 증가
잔잔한 울림·감동의 콘텐츠로 자리

1981년 중앙대 불교학생회 활동
재정적 어려움에도 원칙 고수
미디어 발전 맞춘 문화포교 계획

도시 곳곳에 나 있는 지하철은 시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붐벼 때로는 ‘지옥철’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애환과 추억이 담겨있다. 바쁜 일상생활을 대변하는 지하철에서 조용히 한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풍경소리’다.

14년 넘게 ‘풍경소리’를 이끌고 있는 이용성 사무총장은 “풍경소리는 이름과 같이 은은한 울림과 차분한 감동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며 “처음 풍경소리를 시작할 때는 재정적인 문제 등 어려움이 말할 수 없을 정도 였지만 현재는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풍경소리는 2012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시의 지하철 역사환경 개선사업에서 게시판 철거 방침이 내려진 것이다. 연말까지 철거하라는 지시에 십수년간 문화포교의 뜻을 갖고 매진해 온 풍경소리 직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시 측이 종교적 부착물을 철거하라고 지시했고 서울시 지하철 환경개선시민개혁단이 쾌적한 지하철 환경의 저해 요소로 게시판을 예로 들었기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서울시의 이러한 방침은 곧바로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풍경소리 게시판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는 ‘지하철 문화 아이콘 풍경소리ㆍ사랑의 편지 철거를 막아주세요’라는 제목의 이슈 청원이 올라왔고 2000여명의 누리꾼이 여기에 동참했다. 이 흐름 때문인지 결국 서울시 측이 백지화로 선회했다.

“시민들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동안 문화포교 일환으로 시민들의 마음수행이나 잠깐의 휴식을 제공해 온 풍경소리의 방향이 옳았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1999년 첫 발 이후 2500 게시판

현재 풍경소리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설 비영리 문화포교단체다. 1999년부터 전국 철도역과 지하철역 등에 게시판을 통해 부처님 말씀을 전파해왔다. 바쁜 생활로 인해 시달리는 시민들에게 풍경소리는 잔잔한 울림과 감동을 주는 시원한 샘물이었다.

“1999년 8월 말 단체가 태동했어요. 그해 9월 28일 1호선부터 4호선까지 게시판 설치가 끝난 것을 창립일로 잡고 있습니다. 현재 모든 지하철과 수도권전철 인천, 대구, 부산, 광주, 대전지하철 등 총 2500개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군부대, 학교, 교도소 등 공공기관 화장실 등에도 작은 문구판을 설치하고 있어요.”

이용성 사무총장은 일반 대중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교의 목표가 불교신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가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살아가는 것. 운영되는 것이 결국 포교의 목적이 아닐까요?”

풍경소리 운영에는 다양한 사찰들의 협찬 및 기부가 큰 힘이다. 게시판 하나당 운영비는 5만원 수준으로 2500개 게시판을 교체하고 관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설치하는 것 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붙이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초기 시작할 때는 총지종에서 목돈을 대줬어요. 삼천사에 이어 도선사 등 다양한 사찰에서 게시판 설치 등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도움을 준 사찰은 게시판 하단에 이름을 넣고 있어요.”

이 사무총장은 비영리단체의 활동들이 후원금이나 기부금에만 단순히 기대는 것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재정적인 안정을 이끄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고료 및 운영비 마련이 쉽지는 않지만 시민들의 반응이 좋기에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게시된 내용을 모아 단행본을 내는 한편 외국인들을 위해 영문으로 된 글도 함께 싣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풍경소리만의 원칙은 지킵니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이 우선입니다. 예전에는 사찰에서 큰 스님 글을 실으면 협찬비를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어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풍경소리의 게시판에 실리는 글은 풍경소리 사무진에서 작가들에게 청탁하거나 독자들이 보내오는 글을 10인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에서 심사를 통해 채택한다. 교정 등의 과정을 거치면 대략 2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이용성 풍경소리 사무총장이 진행하는 풍경소리 명상학교 명상강좌는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1998년 종단사태가 풍경소리 낳아

그렇다면 풍경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계의 종단사태로 사회에 지탄을 받던 1998년이 시발점이었다. 그 중심에는 이용성 사무총장이 있었다.

“당시 종단 사태로 불교가 사회에서 안 좋게 보이던 때였습니다. 당시 종단 사태에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에 책임감을 느꼈어요. 불교계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고 인식을 다시금 회복할 것인가는 고민에 빠졌던 차에 개신교가 지하철 공간에서 하고 있던 ‘사랑의편지’가 눈에 들어왔어요.”

개신교의 ‘사랑의 편지’는 1992년부터 지하철에 다양한 문구를 게시하고 있었다.

“불교활동가들이 불교 내부 개혁만 바라보거나 아예 시민운동으로 치우치는 상황에서 불교적인 콘텐츠로 시민운동을 펼쳐보자는 시험적 성격도 강했어요. 당시 불교가 시민들에게 비춰진 불미스러운 것들이 조금이나마 치유가 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죠.”

이 사무총장은 요즘에는 템플스테이라던지 사찰음악회 등 시민들과 소통하는 불교콘텐츠가 많아져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이 사무총장은 “풍경소리도 게시판 글뿐만 아니라 친환경 생산물, 가공품, 효소 등의 나눔과 모음집 발간 등으로 콘텐츠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불교 바로잡기 나선 이후 풍경소리에서 14년

그렇다면 이 사무총장은 어떻게 풍경소리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풍경소리 산파 역할을 한 이 사무총장은 어려서부터 불교계 활동가를 꿈꿔왔다. 불자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다. 1981년 중앙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내 불교학생회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때였어요.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보니 내가 사는 땅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당시 중앙대에서는 정치경제학 모임 등 스터디를 통해 학생들 사이에 민주화 운동의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다 모임을 이끌던 선배들이 단체로 잡혀갔어요. 모임이 해체가 되며 불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결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사무총장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사회과학 스터디를 하며 사회운동을 펼쳤다. 3학년이 되며 대불련 중앙본부에서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9월에 육군으로 강제 징입됐어요. 이른바 녹화사업이었죠. 1986년 제대하고 나온 뒤 노동운동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성남에서 불교노동운동을 한 그는 1986년 말 민중불교연합회로 갔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행동본부에 민불련을 대표해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1988년 이후에는 명진, 성문 스님이 주축이 된 대승불교승가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며 민주화 운동이 노동운동 등으로 변화했어요. 제 삶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결혼 후 가정을 일구며 생계수단이 필요해진 거죠.”

이 사무총장은 그 후 광고기획사를 차리기도 하고 보험설계사 일을 하기도 했다. 야인 생활이었다. 그 와중에 97년 경 불교계에서 다시 일해보지 않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98년 종단 분규 때였다.

“당시에 느낀점이 있어요. 높은 이상, 대의도 이권이 개입되면 한순간에 변질되는 구나 라구요.”

GOP에서 불자 장병들과 함께. 2002년부터 5사단 수색대대에서 위문법회를 진행하고 있는 이용성 사무총장(가운데).
운영 어려움에도 나눔 실천 원칙 지킬 것

풍경소리는 그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사무실 임대료가 없어 옮겨 다니기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이 사무총장은 풍경소리의 창립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견지동에 있을 때였어요. 사무실 임대료를 올려달라는데 당시 350만원에 30만원을 월세로 냈어요. 450만원에 4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하는데 월세는 어떻게 해봐도 보증금 100만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아 부처님께서 무료로 사무실을 구하라고 이렇게 상황을 만드셨구나’ 하고 사찰로 사무실을 구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좀 규모가 있다는 사찰들이 죄다 안 된다는 겁니다. 어느 날 사무실 걱정에 힘없이 터덜터덜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데 故김재일 법사가 ‘어디 가냐’며 반갑게 인사하는 거예요. 사무실 사정을 얘기하니 ‘그럼 있어봐’하더니 보문사에 수소문을 해서 인연다리를 놓아줬어요.”

풍경소리는 보문사에서 2012년까지 11년 동안 있었다. “밀린 액자대금을 탕감해 준 액자회사부터 직원들 월급이 부족할 때마다 돈을 대준 스님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것들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탐욕이 게재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성취되게 돼있다’고요. 항상 초심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풍경소리는 2001년 부처님오신날 주간에 불교계 최초로 봉축열차를 꾸미고 행사에서의 모금액을 백혈병소아암협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게시판 하단에 불교계 복지시설을 소개해 후원 홍보를 진행하기도 했다.

“저희 이사회가 열리면 그런 질타가 나오기도 합니다. 힘들어서 껄덕껄덕 대면서 도울 돈이 있느냐는 것이죠. 하지만 운영과 나눔 실천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의 풍경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무총장은 명상 등을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풍경소리 명상학교 프로그램을 개강했다. 명상의 대중화를 통해 사회가 맑게 하자는 취지다. 먼 미래에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 계획도 있다.

“요즘 기술이 날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게시판 외에도 여러 방법이 새로이 활용되고 있어요. 이런 부분에 젊은 불자들이 뜻을 갖고 함께 했으면 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불법에 따르고 대중을 위해 회향한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초심을 읽지 않고 젊은 마음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자 한다는 이용성 사무총장의 모습에서 문화포교란 터전을 가꾸는 젊은 기운이 넘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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