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단, 불탁, 불단→영기좌(靈氣座) 영기단(靈氣壇) 상

일반 명칭을 택하여 일차원적으로 불단(불상이 자리 잡는 단)이라고 말하면 그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전문용어로는 상징을 살렸다고 여기고 써 온 용어로서 규모가 작으면 수미좌라 부르고 크면 수미단이라 부르듯, 규모가 작으면 영기좌(靈氣座), 규모가 크면 영기단(靈氣壇)으로 부르면 어떨까 제안한다. 명칭과 용어는 다르다. 명칭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반 명사이어서 잘못 이름 지어 그른 길로 인도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아무런 메시지가 없어서 의미가 전혀 없으며 그런 명칭은 용어가 아니다. 명칭은 대상이 특별한 상징을 보일 경우에는 그것을 반영하는 전문용어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형미술의 해석과정에서 사막과 같은 무생명(無生命)으로부터 상징의 숲이라는 대생명(大生命)으로 인도하는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조형미술의 놀라운 상징을 읽어내면 비로소 ‘창조적 용어(創造的 用語)’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여래가 앉는 단(불단)’이라는 말은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여래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미단은 그릇된 것이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

영기단 안에는 ‘무량한 물’이 담겨져 있다. 우리는 중국의 불화에서 여래가 앉아 있는 수미단을 아주 조금 들추어 주어서 그 안에 바다가 넘실대는 파도를 엿본 적이 있다. 즉 그것은 무한한 영기가 충만해 있음을 뜻한다. ‘영묘한 물’에서 갖가지 영기문이 나타난다.’ 즉 영기단이라는 육면체의 거대한 나무 상자는 ‘만병(滿甁)’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다. 즉 망망대해(茫茫大海)가 들어있다. 그 진실은 표면에 새긴 수많은 영기문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그 무한한 공간에 물이나 영기가 충만하지 않으면 그처럼 생명생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영기문을 표면에 새겨질 수 없다. 그러므로 영기단 맨 아래의 영기창으로부터 용(龍)의 얼굴이 나오고 입에서 영기문이 좌우로 뻗친다. 그것은 불단 맨 밑으로부터 ‘물’이 무량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상징한다.

바로 만물을 영기화생하게 만드는 영기좌(靈氣座: 작은 대좌)나 영기단(靈氣壇: 큰 대좌)에서 마침내 절대적 진리인 여래가 화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래가 영기화생하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 주는 그 근원적 표현이 영기단인데, 불단이라는 명칭으로는 그 엄청난 상징을 떠 올릴 수 없다. ‘여래와 보살을 영기화생시키는 단’이라는 명칭을 줄여서 ‘영기좌’나 ‘영기단’이라 부르려는 것이다. 이처럼 ‘영기에서 여래가 화생하고, 화생한 여래로부터 영기가 발산한다’는 원리에서 보면 화생한 여래에서 발산하는 영기는 바로 설법할 때 여래의 입에서 발산하는 법문(法門), 즉 성음(聖音), 혹은 영음(靈音)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조선시대에 여래로부터 발산하는 이른 바 광배(光背)가 대부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하나의 영기단을 채색분석하면서 설명해보기로 한다.

경산시 동학산(東鶴山) 경흥사(慶興寺)의 영기단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았을 때 매우 놀랐다. 부산의 도반들과 함께 경흥사에 가서 조선시대의 영기단을 보았다.(그림 ①) 고맙게도 파손된 불단에서 3개의 목판을 취하여 현재의 영기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놀란 까닭은 이 불단의 영기문이 고구려 사신총 영기문의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림 ②) 앞면의 것은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모두 영기문에서 만물이 생성하는 도상인데 다음 회에서 다룰 것이다. 측면의 것만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채색분석 한 도면에 설명을 붙이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글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그림 ③, ④) 이 영기문 조각은 매우 입체적이어서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매듭에서 사방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표현했으므로 뒤에 숨어있는 것도 많다. 그래서 부분을 크게 그려서 채색분석 해 보았다.(그림 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중요한, 생명이 충만한 조형들을 그릇된 용어와 의미 없는 용어로 숨 막히도록 목을 졸라왔는가,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강요하는 좁은 정신적 틀 안에서 스스로를 속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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