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 명상법회 '일상의 명상'-종사르 켄체 린포체(영화감독)

▲ 1961년 부탄에서 태어나 7세 때 티베트 불교 개혁가였던 잠양 켄체 왕포의 세 번째 환생자로 판명됐다. 이후 티베트에서 승가대학을 졸업한 린포체는 영국에서 이탈리아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연출한 영화 ‘리틀 부다’의 고문을 맡으면서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1999년 월드컵 축구 경기에 빠져든 동자승들의 이야기인 데뷔작 ‘더 컵(The Cup)’으로 그해 토론토 영화제 관객상을 받았고,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도 초청됐다. 이 영화는 부탄 최초의 장편영화이자 티베트어로 만든 영화다. 현재 그는 티베트와 인도 등에 있는 종사르 사원 네 곳의 책임자로 2000여 명의 스님을 지도하고 있다. 수행센터 ‘싯다르타의 의도’와 복지단체 ‘연꽃 활동’을 설립해 수행자와 가난한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옴마니반메훔 염송…좌절, 우울 변환
'관세음보살' 뜻은 완벽한 자각
마음의 순수한 본질이 '관세음보살'

최근 불교의 4가지 진리를 다룬 책 <우리 모두는 부처다>를 펴내고, 신작 영화 ‘바라, 축복(Vara, a Blessing)'의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종사르 켄체 린포체. ‘더 컵’이라는 영화감독으로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그가 8월 3일 서울 봉은사에서 ‘일상의 명상’을 주제로 사람들과 만났다. 특유의 유머와 함께 2시간 동안 이어진 그의 강의는 수행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자신 안에 자리한 순수한 본질이 관세음보살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일상과 수행에 관한 우리의 오해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일상에서의 수행이라는 주제와 관세음보살에 관해, 알아차림과 관세음보살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선 일상과 수행에 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오해를 먼저 살펴보죠. 우리는 수행을 좌복 위에서 몇 분간 명상하는 것으로만 한정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당, 교회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수행은 아닙니다. 일상과 통합돼 모든 일이 수행이 돼야합니다. 따라서 수행은 곧 세속적인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흔히들 떠올리는 모범적인 수행자에 대한 이미지는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스님 등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역할 모델도 분명 많이 존재합니다.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은 출가수행자가 아닙니다. 외양을 봐도 아름다운 옷에 귀걸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랑 다를 바 없죠.

세 번째로, 불교 역사는 스님들 위주로 전개돼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부흥은 그 시대의 왕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인도의 아쇼카 왕이라든지 몽골과 중국의 황제들이 그 예입니다. 이 왕들이라고 해서 다른 왕들이 하는 일을 안 했겠습니까? 분명 성벽도 세우고 연찬도 많이 열었을 것입니다. 일상과 수행을 얘기할 때 이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불교의 적(敵)은 '산란심'


정념, 알아차림은 불교수행의 척추이며 대들보 혹은 기둥 같은 것입니다. 오늘은 알아차림과 관련해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을 얘기할 겁니다.

모든 종교는 대적해야할 적들을 상정합니다. 기독교는 사탄, 불교는 산란한 마음이죠. 이외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악마는 없습니다. 비판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관심 받고자 하는 마음, 무시 받을 거라는 두려움 같은 미묘한 산란함 외에도 뭔가에 압도되고 휘둘리는 산란함 또한 심각한 것입니다. 산란심을 왜 걱정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산란심은 아주 나쁜 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을 가져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마음은 결국 진실을 가리게 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허구의 세상과 상호작용하게 되어 버리죠.

산란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는 것입니다. 소리에 집중하십시오. 이 방법은 생각을 끊게 하는 하나의 속임수 같은 것입니다. 집중하려고 노력하면 온갖 생각이 떠올라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0분 동안 명상한다면 19분 동안은 계속 딴 생각만 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서 마지막 1분 동안 명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서 좌절에 빠지겠지요. 그러나 굉장히 좋은 명상이며 출발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계속 해 나가보면 알겠지만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집중할 수가 없다고 푸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신이 알아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하면 할수록 생각의 기차를 계속해서 탈선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일렬로 기어가는 개미 행렬 가운데를 흐트러뜨리면 뒷따르는 개미가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워 하듯이요.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는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우리 몸 안의 기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옴’은 정수리, ‘마’는 목, ‘니’는 심장에 있다고 묘사됩니다. ‘옴마니반메훔’ 그 자체가 에너지입니다. 옴이라고 염송할 때 그 소리는 몸의 기맥을 이완하고 확장시켜줍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우울하거나 힘들 때 우리는 곧잘 한숨을 쉽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조금 도움이 되죠. 이게 바로 기맥과 그 안에 흐르는 풍기, 마음이 같이 작용한다는 증거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은 좌절, 우울함을 변환시켜줄 것입니다.

부처님은 알아차림을 개발할 수 있는 수천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에게는 무덤으로 가라 얘기하셨죠. 사람 뼈를 쳐다보며 어디에서 이것이 왔는가 질문하며 깊이 숙고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알아차림 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의 느낌에 대해서도 알아차림 해보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느낌이 있지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신체적 느낌 외에도 행복, 사랑, 우울 등 인간 경험의 90%는 감정이 차지할 겁니다. 좌복이 얼마나 푹신한지, 몸에 닿는 셔츠의 느낌이 어떤지 알아차림 해 보는 겁니다.


관세음보살은 순수한 본질 자체


이처럼 알아차림을 통해 현재 이 순간에 머무는 것, 집착이 전혀 없는 것, 이 자체가 관세음보살과 같습니다. 관세음보살은 티베트어로 ‘완벽한 관’이라는 뜻입니다. 완벽한 지각을 이르는 말이며 온전히 본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예전엔 중요했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치 않고, 화나게 한 것들이 신경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아라한들이 한줌의 흙과 금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 처럼요. 만일 완벽히 볼 줄 안다면, 누군가 당신의 외모를 칭찬했을 때 당신은 그가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려는 그의 의도가 읽히고 허상에 매어있는 그를 자비의 눈으로 보게 되는 거죠.

관세음보살은 신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서 관세음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는 재가불자 소년으로 묘사되는 반면 어떤 곳에서는 여성화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체 누구입니까? 국적은 어디고 생년월일은 언제죠? 취미는요? 여러분이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여러분의 수준에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편성을 가지고 어느 곳에나 어떤 모습으로든 나투니까요. 나툼은 실재는 아니지만 청중을 위해서 보여지는 것일 뿐입니다. 한 명의 배우가 작품마다 어느 순간엔 악당이 되었다 좋은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러고 보면 부처님 또한 전생의 모습이나 석가모니로서 실존했던 과거 등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석가모니는 하나의 화신, 하나의 나툼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일생 자체가 관객들을 위한 쇼라고 얘기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쇼죠.

다시 관세음보살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어느 곳에나 관세음보살은 나투지만, 절대적 차원에서의 관세음보살 또한 분명 존재합니다. 바로 여러분 내면의 순수한 의식 자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순간순간 마음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음, 가장 순수한 본질을 간직하고 있을 때 이는 곧 관세음보살 자체입니다. 조작 없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이기에 어떤 형태나 색깔, 모양,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런 이유로 손이 천개나 있다든지, 새 혹은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기 위해선 여러 형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머릿속엔 어떤 형태로든 생각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소리가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아침에 먹은 식사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 오염없이 단순하게 생각을 바라보십시오. 생각의 고리를 따라 휩쓸려 가지 마십시오. 고리에 얽히는 과정 속에서 성냄, 탐욕, 질투 등 감정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매미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관세음보살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다름 아닌 우리 본질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겠죠. 관세음보살은 성스럽고 청정한 분인데 나는 허물도 많고 오염된 인간일 뿐이라고요. 이는 타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우리 라는 생각을 믿는 것, 어렵지만 쉬운 일입니다.


일상생활과 불교적 수행 어떻게 조화시키나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희망과 두려움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성냄과 탐욕이 너무 많이 존재하죠. 이런 곳에 관세음보살이 있는 것만으로, 보는 것만으로 이익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는 순간, 그곳이 관음전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변기든 법당이든 주방이든 중요치 않습니다. 당신의 어깨위에, 당신의 눈 앞에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하루에 세 번씩 혹은 여섯 번씩 떠올리려는 연습을 하십시오. 잠에서 깨는 순간과 잠들기 직전 생각나는 이가 관세음보살이 되도록 연습하십시오. 생각이 이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불교에서는 항상 무상에 대해 얘기하죠. 이걸 어떻게 일상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점심식사를 할 때 이게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비관적이고 슬픈 얘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식사이기에 정말 맛있을 테고 함께 식사하는 이들이 무조건 사랑스럽게 보일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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