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사유반가상(彌勒菩薩思惟半跏像) → 사유상(思惟像)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포즈

인간이면 누구나 사유한다. 사유해야 인간의 존재이유를 추구할 수 있다. 사유야말로 인간의 모든 행위의 시작이며 완성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요,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의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른 시기에 사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불상조각이나 불상회화가 매우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현상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인간의 삶 속에서 충격을 받을 때 마다 사유의 자세를 취한다. 밭을 갈 때 쟁기에 튕겨나오는 애벌레를 작은 새가 채가고 그 작은 새를 다시 독수리가 채가서 잡아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광경을 보고 깊은 사유에 빠진다. 또 왕궁을 떠나 찬타카와 칸타카를 되돌려 보내고 나서 출가할 때에도 깊은 사유에 든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는 사유의 자세를 취한다. 싯다르타 태자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한 다리를 다른 다리의 무릎 위에 두고 그 구부린 무릎위에 팔꿈치를 대고 그 손으로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는 얼굴의 턱을 대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경배의 대상인 절대자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모습의 불상에는 태자상(太子像)이나 사유상(思惟像)이란 명문(銘文)이 있을 뿐, 굳이 누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새기지 않았다.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태자상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싯다르타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모든 상이 그렇지 않아 단정 짓기도 어렵다. 중국의 불상에는 대체로 명문이 많은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사유상 명문에서는, 태자사유상( 太子思惟像, 太和 16년銘 등), 사유상(思惟像, 正光5년銘 등), 사유불(思惟佛, 北魏 삼존불 石像), 사유일구(思惟一軀, 興和 2년銘), 백옥상(白玉像, 白玉龍樹思惟像(武定5년), 태자상(太子像, 天保4년銘) 심유불(心惟佛, 大通 元年, 西魏 碑像) 등으로만 명시하여 있다. 그 가운데 태자상과 사유상이 가장 많다. 광배의 상주(像主, 邑子)들 가운데 미륵불주(彌勒佛主)와 사유불주(思惟佛主)를 별도로 병기된 것으로 보아 사유상을 미륵불로 단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상조각 가운데 국보 78호인 금동사유상과 국보 83호인 역시 금동사유상 등 인간이 만든 위대한 작품들이어서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 걸작품들이 거의 원상 그대로 지금까지 전하여 왔다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 만큼 기적적인 일이다. 그 밖에 돌로 만든 사유상이 있고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이 있고 동으로 만들어 도금한 금동사유상 등 사유상은 특히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매우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그 특이한 자세인 불상을 누구라고 분명히 규정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한다면 싯다르타 태자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든 국보 두 작품을 모두 ‘미륵보살사유반가상(彌勒菩薩思惟半跏像)’으로 명명하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 왜 미륵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며 또 ‘반가(半跏)’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모두가 우리나라가 일본의 용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의 오류 그대로 답습

동양 삼국 가운데 이러한 자세의 금동불상에 미륵보살이라고 새겨놓은 예는 오직 하나뿐이다. 나는 그 작품을 오사카 근처의 야쭈지(野中寺)에서 조사한 바 있는데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으며 위작인지 의심이 갔었다. 그런데 어느 일본학자가 명문을 검토한 결과 명문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하며 위작임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의 위작(僞作)인 야추지 사유상이나 일본의 문헌 등을 미루어 우리의 사유상을 미륵보살이라 부르게 된 경향이 생겼는데, 이제부터는 일본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서 미륵이라 입증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석가보살과 미륵보살은 모두가 보리수 밑에서 사유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라 하는데, 왜 하필이면 56억년 후일까? 그렇다면 미륵불은 오시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석가모니불이 영원한 부처님인데 구태여 미륵불이 다시 올 리 없다. 그리고 설혹 미륵보살이 존재하더라도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하므로 현재의 보살이다.

미륵보살이란 석가보살의 다른 이름이어서 사유상이란 이처럼 이중(二重)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말하자면 석가보살과 미륵보살이라는 두 성격의 보살상이 사유상에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사유상〉이라 불러야 하며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단정하려들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반가’라는 말을 검토해보자.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결가부좌(結跏趺坐)란 자세를 취할 수 없다. 결가부좌란 무엇인가. 의자 위가 아니라 아래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여 앉는다는 말로 두 발바닥이 모두 위를 향하도록 앉는 수행자의 자세이다. 모든 여래와 보살이 취하는 자세이다. 참선할 할 때에는 정신적 통일을 위해서나 신체적으로 반듯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어 반드시 결가부좌를 틀어야 한다. 그런데 사유하는 상은 의자에 앉아서 취하는 자연스런 자세여서 결가부좌를 틀 수 없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반가란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어찌 한 다리를 다른 다리의 무릎에 놓는데 반가란 말인가! 한 다리라는 말은 있어도 반쪽짜리 다리는 장애자의 다리일 수는 있다. 일본학자가 만든 반가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퇴출시켜야 하고 미륵이라는 특정한 존명도 피해야 한다. 무릇 모든 인간이 취하는 영원한 보편적인 자세로 사유하는 거룩한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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