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특집-섬속의 절을 찾아서

피서(避暑), 매년 이맘 때 쯤 우리는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길을 나선다. 하지만 길을 나선다고 더위를 피할 수 있을까? 피한다는 말보다는 잊기 위해 떠난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더위를 잊기 위한 곳으로 어디가 좋을까.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도 있고, 시원한 계곡이 있는 깊은 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년 찾아가는 바다와 산, 좀 더 특별한 바다와 산은 없을까. 절이 있는 바다와 산은 어떨까. 뜨거운 뙤약볕도 사뿐히 지나가는 풍경소리, 무거운 바람 가볍게 잠재우는 목탁소리, 법당 처마가 드리운 천 년짜리 그늘. 모든 걸 잊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물가의 사찰과 산속의 사찰을 소개한다. 특히 섬 속에 또 다른 섬처럼 서있는 절과 쉽지 않은 길 끝에 조용히 서있는 절은 더위를 잊기에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의 게가 오솔길을 걷고

보길도 남은사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남은사〈사진〉가 있는 보길도는 해남군의 땅끝 선착장이나 완도군 화흥포항에서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섬이다.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km 떨어져 있고, 노화도 만서쪽 1.1km 지점에 있다.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배지이기도 했던 보길도는 동백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림이 울창하고 해변에는 검푸른 조약돌이 깔려 있다. 동편의 예송리 해변은 주변으로 아름드리 노송이 울창하고 해안으로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이 늘어서 있다. 해변 앞에는 당사도, 기섬, 질매섬 예작도 등 아름다운 섬들이 떠 있고, 날씨가 맑은 날엔 제주도까지 보인다.
남은사 가는 오솔길에는 뻐꾸기 소리가 많다. 오솔길을 걷다보면 조그만 게들이 바스락거리며 숲속을 오간다. 숲에 게들이 산다. 보통의 숲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절 입구까지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적석탑이 늘어서 있다. 중마산 정상에 깃들어 있는 작은 암자 남은사. 절의 내력이다. 오래 전 이곳 정자리에 사는 갑부의 처가 소생이 없어 절을 짓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여생을 보냈다. 처음 이름은 북암사였다. 그 이름은 절의 동쪽에 북 모양의 큰 바위에서 유래했다. 그 북바위가 울리면 바다 건너 맞바래기 섬에서 상피(相避)가 났었다. 수치스럽게 생각한 그곳 주민들이 밤에 몰래 배를 저어와 북바위의 제일 윗돌을 굴려 버렸다. 그 뒤로는 북바위가 울리지도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굴려버린 바위는 알아볼 길이 없었지만 푸른 이끼 둘러친 큰 바위들 위에 앉으면 눈앞에 푸른 바다와 섬들이 다가온다.

보길도 남은사

완도 신흥사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168-1
신흥사는 남망산(南望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1932년 김성렬 스님이 불로사(不老寺)로 창건했다. 前 백양사 방장 수산 지종 큰스님 과 박영희 스님이 주석했다.
신흥사 가람은 북향이며, 아름다운 완도의 전망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당우로는 대웅전과 약사천불전, 하심당(교육관), 삼성각이 있다. 장점은 남망산(南望山)의 중턱에 있기 때문에 완도읍의 전망과 야경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저 멀리 신지, 대둔산의 경치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다.


진도 쌍계사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299-30
진도 쌍계사는 진도읍에서 동남방으로 왕무덤재를 넘어 7km 쯤 지나면 사방으로 첨철산의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운림산방로에 자리잡고 있다.
857년(신라 문성왕19)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불렀다. 1648년(인조 26) 의웅 스님이 중건했다. 대웅전 좌우로 시왕전과 원통전이 자리하고, 시왕전 뒤편에 산신각이 있다. 진산이라 불리며 천연기념물 107호 쌍계사천년상록수림대가 있는 첨찰산 자락 중심부에 자리한 쌍계사는 인근에 소치 허련 선생의 운림산방과기념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섬 속 현존 最古 도량

강화도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 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역사와 문화의 섬이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자긍심을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다.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이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현존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전등사


석모도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인 635년에 회정 대사가 열었다. 여러 창건설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창건설이다.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회정 스님이 이곳으로 옮겨와 절을 세우고 보니 산세가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서천 사자국의 보타락가산과 흡사했다. 산 이름을 낙가산이라 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 없이 나투시는 관세음보살 원력의 광대무변함을 의미하는 ‘보문’을 도량의 이름으로 썼다.
보문사는 관세음보살이 늘 중생을 기다리며 열어놓은 ‘문’이다. 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33관음보살사리탑과 오백나한이 힘들었던 여정을 위로한다. 숨을 돌리고 눈을 고쳐 뜨면 와불을 모신 와불전, 나한전 석실,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 넉넉한 마당이 낙가산 기슭을 장엄하고 있다.
보문사의 백미는 눈썹바위 아래 모신 마애관음좌상이다. 서쪽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마애관음좌상을 보기 위해선 1km 정도 가파른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계단이 재미있다. 처음 12계단을 올라가면 좌우에 석등이 하나씩 있고, 여기에서 다시 108계단을 올라간 곳에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있다. 다시 108계단을 오르면 한 쌍의 석등이 있고, 다시 118계단을 계단을 올라가면 반야용선이 있다. 거기서 48계단을 더 올라가면 마애관음좌상을 만날 수 있다. 

보문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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