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집-산속의 절을 찾아서

우리나라의 유서 깊은 고찰들은 대부분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굳이 제목에 ‘산 속’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공간적인 깊이가 아닌 도량이 간직한 깊이를 말하는 것으로, 잊기 위해 나선 길 위에서 좀 더 깊숙한 길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도량이 간직한 이야기와 흔적들로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도량들을 묶었다. 문장 하나로 한 시대를 가르치고 이끌었던 지성의 흔적, ‘무애’의 이름으로 남은 선지식의 작은 방, 한국불교의 큰 이름들이 서성거렸던 마당, 피안으로 가고 싶은 중생의 마지막 거처, 명작이 잉태된 작가의 서재.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는 동안이 잊지 못할 ‘피서’가 될 것이다.

반야용선을 기다리는 용선대에서 바라본 관룡사 전경
한 시대의 지성이 걸었던 길을 따라
조계산 불일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43
암자를 찾아가는 오솔길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우선 한 시대의 지성으로 불린 선지식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자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육신으로 머물렀고, 생사를 놓은 후에도 머물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오랜 세월 걸었던 길은 2km 남짓으로 편백나무와 대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다른 녹색과는 또 다른 녹색의 대나무숲이 뜨거운 태양과 무거운 바람을 막아준다.
순천 송광사(옛 이름 수선사)의 산내암자로, 송광사의 제7세 국사인 고려시대 승려 자정국사(慈靜國師, 법명 일인)가 창건하였다. 본래 이름은 자정암(慈靜庵)이었으나 1975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법정(法頂) 스님이 중건하면서 불일암(佛日庵)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708년(숙종 34) 시습·이징 스님이 중수하였고, 1765년 탁명 스님이 공루를 건립하였으나 공루는 1929년 해체되었다. 1866년(고종 3) 승허 스님이 칠성각을 건립하고, 1891년 월화·계암·용선 스님이 정문을 중수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퇴락하였고, 1975년 법정 스님이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법정 스님이 기거한 요사 2동과 찾아오는 이들에게 대접한 감로수의 수각이 있으며, 경내 북동쪽에 자정국사 부도가 있다.
불일암에 들어서면 작은 텃밭이 보이고, 돌계단 위로 법당이 산을 짚고 있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손수 심었던 후박나무 한 그루가 법당 앞에 서있는데, 법정 스님은 다비 후 그 나무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법당 모서리에는 스님이 쓰시던 의자가 놓여 있다. 작지만 큰 암자다.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머물렀던 불일암

 

팔공산 운부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55
소나무 숲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연못 속에서 도량이 드러난다. 바람에 이는 물결 속에 법당이 있고, 파란 하늘을 품은 연못 위에는 따뜻하고 오래된 눈동자의 달마상이 서 있다. 머리 숙여 보화루 돌계단을 오르면 운부암이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 하나로,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다. 711년(신라 성덕왕 10)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절을 세울 때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 하여 운부암(雲浮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고려시대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이후 중건하여 관음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어 왔다. 1860년(철종 11)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옹허 스님과 침운 스님이 중건했고, 1900년에 보화루(寶華樓)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법당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선방인 운부난야(雲浮蘭若), 오른쪽에 요사채 우의당(禹義堂)이 있고, 그 앞으로 보화루가 배치되어 있다. 산령각은 원통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1862년(철종 13)에 지은‘운부암중건기’의 기록을 통해 관음전인 원통전은 1862년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오래인 편액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운부난야(雲浮蘭若)’, 문자로는 읽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운부암 선방의 당호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를 뜻하며, 수행하기 적합한 곳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곳 운부암은 많은 선지식이 거쳐 갔다. 경허, 만공 스님으로부터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스님 등 많은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정진했다.
평생 도반이 되는 성철(性徹ㆍ1912~1993) 스님과 향곡(香谷ㆍ1912~1978) 스님도 이곳에서 만났다.


‘경허’의 흔적 간직한…

연암산 천장암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1
연등 몇 개 걸린 인법당 하나. 작은 선방 하나. 몇 걸음 안 되는 마당 하나. 허리 굽은 석탑 하나. 산신각 하나. 연암산 천장암이다. 633년(백제 무왕 3)에 담화 선사가 세웠다. 천장암은 ‘경허’의 도량이고, ‘경허’가 천장암의 역사다. 천장암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량이지만 그 천년을 채워줄 만한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다. ‘경허’의 흔적만이 그 천장암의 역사를 채우고 있다. 경허 스님이 동학사에서 견성한 후 보림처로 삼은 곳이 천장암이다. 당시 스님이 1년 3개월 동안 장좌불와를 했던 방이 살아있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이다. 문을 닫고 앉으면 시간도 닫힌다. 아니 시간이 들어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스님이 왜 이토록 작은 방을 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외엔 들어와 앉을 자리가 없다. 벽에는 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익숙한 스님의 진영이었지만 스님의 방에서 보는 진영은 멈춘 시계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스님은 이 작은 방에서 모든 시비(是非)를 끊었고, 염정(染淨)을 끊었고, 생사(生死)를 끊었고, 승속(僧俗)을 끊었다. 결코 작은 방이 아니다. 경허 스님 이후 수월·혜월·만공으로 이어진 계보는 한국불교를 풍성하게 했다. 그토록 의미 있는 불사와 역사가 이 작은방에서 시작됐다. 더위를 잊기에 또한 그만인 도량이 아닐 수 없다.
633년(백제 무왕 34) 담화대사가 제자와 함께 수도하기 위해 창건했다. 그 뒤 조선시대 말기에 선종을 중흥한 경허가 수도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고, 후학들을 지도했다. 당대의 고승 만공 스님이 출가 후 경허선사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모신 곳이다. 경허와 만공의 수도처라는 점에서 많은 수도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허 스님의 보림처 천장암

 

이명산 다솔사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503년에 연기 스님이 세운 절이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에 들어서면 어느새 깊은 숲의 호흡이 다가오고 간간히 들려오는 산새 소리는 숲의 깊이를 전해온다. 숲길의 끝에 서면 적멸보궁을 둘러싼 돌담들이 자연스럽게 도량으로 들어서게 한다. 일제강점기 때 만해 스님을 비롯한 효당 최범술, 변영태, 변영만, 김범부 등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의 ‘터’로 썼던 대양루가 도량 맨 앞줄에 서있다. 적멸보궁에는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와불 너머로 사리탑이 있다.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무녀도〉, 〈등신불〉의 김동리(1913~1995)가 20대와 30대의 젊은 시절을 보내며 그의 대표작 〈등신불〉을 구상하고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가 ‘등신불’을 썼던 안심료는 만해 스님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고찰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솔사도 자장율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나옹선사 등 여러 선지식들이 머물다 갔다.
511년(지증왕 12)에 연기 스님이 영악사(靈嶽寺)로 창건했다. 636년(선덕여왕 5)에 중수를 하고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화왕산 관룡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숲 속에 폭 파묻혀 있는 관룡사는 일주문 대신 서있는 작은 석문(石門)이 도량을 열어준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용선대(龍船臺)가 있다. 용선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 출발하는 곳이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용선대에는 보물 제295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용선대에 올라 반야용선을 기다리면 더위는 한 순간에 잊힐 것이다.
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 병풍바위 아래에 위치한 관룡사는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내물왕 39년(394년)에 창건되었다. 원효대사가 중국 승려 1,000여 명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으로 유명하다. 창건 당시 화왕산에 자리하는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사찰의 이름을 가져왔다. 석문을 지나 천왕문과 원음각이 산세를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다. 보물인 대웅전과 약사전을 비롯하여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5점의 지정 유물이 있어 사찰의 가치가 더욱 높다. 특히 산 중턱 용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불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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