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를 주인공에다 탁 놔버리고 덤벙 뛰어넘으세요

▲ 그림 최주현


평상시에 모든 걸 놓고 편안하게,
와선이나 입선이나 행선이나 좌선이나
이런 거를 모두 한데 합쳐서
그냥 생활 자체를 참선으로 돌려야 됩니다.
그렇게 내마음의 용광로에다 다 놓게 되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나갈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길 아닌 길을 걸어가려면

문)
이 마음공부를 알고부터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고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안하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길 아닌 길을 걸어 보려면 어떻게 마음을 내야 되는지요.

답)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써 원소를, 자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나옵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 들어가서 모습을 받는단 얘기죠. 그런데 자기 원소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렇게 진화하고 형성되는 그 고생은 모르죠. 자기가 그렇게 고생하고 거기 입증해서, 즉 말하자면 태어나는 거는 자기 소관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부모의 소관이 아니라 자기의 소관이란 말입니다. 차원이 높고 낮고 그런 것도 자기의 소관이죠, 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습 있는 인연을 따라서 소중하게 받은 그 모습으로, 바로 자기, 보이지 않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다. 그건 바로 즉, 만법을 행할 수 있는, 색색가지로 만법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다 이런 말입니다. 에너지니까 그 에너지를 부처님께서는 ‘별성’을 봤다고 했고 또 우리가 불가에서 ‘불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 주장자’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문을 찾을 때 지혜롭게 찾아야 문 없는 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문을 찾아다니는 건 육신을 가진 사람이나 문을 찾아다니지, 육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문이 있어도 그냥 문이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이 그 원소 자체의 그 불성은 문이 없어도 왕래할 수 있는 겁니다.
아난이 “형님, 내가 형님을 뵙고 가고 싶습니다.” 하니까 가섭 존자의 말이 “너 그렇게 들어오고 싶으면 열쇠 구멍으로 들어오너라.” 이랬거든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어올 수 있으면 열쇠 구멍으로 들어왔다가 가라 이겁니다. 열쇠 구멍이 문도 될 수 있는 거라면 이 봇장이고 벽이고 그런 게 뭐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50%를 즉, 정신계로 활용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원소는 정신계를, 왼쪽 두뇌의 정신계를 말하고 또 바른쪽은 물질계를 말하는 겁니다. 이거를 혼합시켜서 이게 같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러분은 같이 돌아가는 거를 이해를 못합니다. 이 우리가 머리에 하나의 지혜가 트이면 열 가지 백 가지가 트인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게 법이 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대로 결정이 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냥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정신계의 문제나 물질계의 문제나 같이 반반 섞여서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걸 이해를 못하고 그냥 갑니다. 모두 물질이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잘했다고 생각을 하니까 뭐든지 그게 핀트가 안 맞는 거죠.

여러분이 차를 가지고 다니시죠? 차가 여러분이라면 말이 됩니까? 차는 여러분이 쓰는 즉, 사용하는 차입니다. 그런데 우리 원소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함이 없는 나가 사용하는 것이 이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즉 말하자면 시자로 씁니다, 심부름꾼으로. 우리가 차 쓰듯이. 그런데 나라고 그런다면 그게 안되죠. 말이 안되죠, 그게. 운전하는 주인이 반드시 있는데 차가 자기라고 그러니까 이게 핀트가 맞지 않아요, 모두가 사는 게. 그래서 이게 과거로부터 선조들까지도 문제가 됩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믿음이라도 진실하게 있으면 몰라도. 믿음을 가지면 그냥 아무 데라도, 돌자갈이라도 믿고 저거 한다면, 그게 아주 크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에너지통이 돌봐서 그렇게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닐 때 고집부리는 거는 멍청한 고집이죠. 우리가 고집이 세고 그렇게 아주 괴롭고 망종스럽게 산다, 이런 거 말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이 컴퓨터를 만들어 놓고 컴퓨터를 누르고 살죠? 우리가 컴퓨터를 누르고 사는데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누르고 산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북두칠성으로 인해서 그 왕별이, 큰 별이 그 생명력을 애당초에, 최초에 줬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 그 마음의 원소 자체에서 모두 만법을 들이고 내고 살게끔 그렇게 해 놨습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길은 이 세상에 어느 길치고 길 아닌 데가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허공도 길이요 지구도 길이요 우주도 길이다. 우리가 몸뚱이를 생각할 때 한번 지구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구가 우리의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몸뚱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알궁달궁 생명체들이 그 속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 몸속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어떻게들 살고 있나. 몸속에서들은 그러죠. 몸속에 들어 있으면서 의식들은 ‘아이고, 지구 우주에서 지금 그런 사령이 내렸으니까 그대로, 마음을 그대로 바쳐 드려야지.’ 하고 그냥 나오는 대로, 사람이 마음 쓰는 대로, 그냥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 하는 대로, 또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일을 하는 대로 이렇게 따라 준단 말입니다, 의식들이. 참 문제가 큽니다. 의식들이 이렇게 따라 주는데 그걸 사람들이 생각을 못 해요.

그러니까 자기 모습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니 자기가 결정을 짓지 말고 모든 걸 주인한테, 주처한테 맡겨 놔라. 그러니까 일할 때는 행선이고, 앉았으면 좌선이 되고, 또 길거리를 다닐 때는 입선이 되고 누웠을 때는 와선이 되느니라. 그것이 조금도 그른 사이가 없이 요만큼도 틈이 안 나게끔 돼 있는 자체다. 그게 그냥 참선이다, 여러 가지로 따질 게 없이. 참선이니까 우리 생활이 그냥 ‘도’니라, 이런 거예요. 우리 생활이 도지, 우리 생활 떠나면 뭐가 있느냐. 네가 떠나면 뭐가 있느냐. 하나도 없다. 모두 각자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종교도 있다느니, 진리도 있다느니, 부처도 있다느니, 세상도 있다느니, 에고도 있다느니, 또 편안함도 있다느니 이런 게 모두가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그 도리를 완전히 우리가 알아야만 되겠다 이겁니다. 컴퓨터를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누르고 산다. 또는 우리가 누르는 거는 우리 자체가 바로 불성 자체, 별성의 근본이기 때문에 에너지통이 그냥 여기 들어 있다. 그러니까 작으나 크나, 차원이 높으나 낮으나 그거를 알고 진행한다 하면은 그냥 자기가 자꾸 크게 만드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아쉬우면 꺼내 쓸 수 있는 거, 전력을 그냥 꺼내 쓸 수 있는 거. 그것이 에너지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지구 바깥에, 우주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 자체 내에 있기 때문에, 나 자체 내에 그 문이 있기 때문에, 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단 얘기죠. 그러니까 이 속에, 암흑 속에는 에너지를 발현할 수가 있고 이 거죽에 속하는 데는 에너지를 발생해서 쓸 수 있는 데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눌렀을 때 이걸로도 변하게 하고 이걸로도 나오게 하고 저걸로도 나오게 하고 부산으로도 갔다가 제주도로 갔다가도 이렇게 누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천국에도 갔다가 지옥에도 갔다가, 서울로 왔다가 부산으로 갔다가 이렇게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인간이 미생물로 인해서 조그맣게 생명이 생겨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진화가 되고 이렇게 사람까지 몇 번씩 태어나도 그냥 그 자리를,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난다면 세세생생을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죠. 어디에 갇혀서 우리가 산다고 보세요. 병 속에서 갇혀서 산다 이런다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답답함을 느끼죠. 자유스럽게 훨훨 날아다닌다면, 구속받지 않고 날아다닌다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와요

문)
요즘 좌선을 좀 해 보려고 앉아 있으면 생각이 멈추질 않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해 보자 그러고 삼천 배를 시도해 봤더니 생각이 좀 덜 나는 것 같아요. 생각이 좀 안 나고 집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답)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바람이 불면, 나무가 이쪽으로 바람이 불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흔들리고 그러는 걸 보세요. 그러면은 ‘아, 저 나무는 바람이 저렇게 불어도 이쪽으로 쓸리면서 모진 바람을 쐐도 말 한마디 없이 저렇게 인내 있게 가는구나.’ 하고, 어떤 때 또 비가 쏟아지고 그러면 ‘어, 저렇게 비를 맞고도 저 나무는 의연하게 있구나. 저 나무들도 전부 스승 아닌 게 없구나. 모두 나같이 살라고 하는구나.’ 하고 배우게 됩니다. 이게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또 겨울철에 이렇게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앙당한 가지만 남아서 그냥 휙휙 날려요. 그럴 때 보면 또 생각이 나기를, 보면 보는 대로 그런 거예요. 아, 인간이라면 아주 정이 많죠? 모두 사랑 아니면 모두 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놈의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웃고 즐기고 이러죠. 그런데 그런 걸 볼 때에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아, 너는 참 앙당한 가지만 남고 옷을 다 벗고도, 그렇게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봄을 오기를 기다리면서 인내 있게 기다려 주는구나. 임이 오기를 말이야. 그 벗은 나무가 잎새가 다시 필 때를 기다리면서, 임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모진 바람에 휘달리고 눈보라에 휘달리면서도 조금도, 뭐 군말 하나 없이 그렇게 의연하게 가는구나.’ 그런데 사람은 뭔가. 조금만 해도 펄쩍펄쩍 뛰고, 조금만 해도 이런 게 치민다고 하고, 조금만 해도 내던져 부수고, 조금만 해도 그냥 때리고 쥐어박고…. 이게 도무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생각이라는 게 꼬리가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생각을 내게 하는 것도 바로 그 한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이, 좀 피곤하지 않아? 그냥 그 생각 좀 이렇게 안 나게끔 해.’ 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생각하지 말고 묵묵히 그냥 해요. 그런데 정히 생각할 게 있으면 해야죠. 하면서도 하지 않는 그 마음이 중요해요.
그런데 게을러서, 마음이 게을러서,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진 몰라요. 마음이 여유가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되죠. 이 마음이 여유가 없을 때는, 꽉 차서 돌아갈 때는 여유가 없어서 딴 생각 할 틈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에 그냥 꽉 맡기고 생각 날 때마다 그냥 ‘너 알아서 해.’ 하고, 진짜 생각을 해야 할 거는 또 ‘너만이 할 수 있지 않아?’ 하고 그냥 그렇게 해 놓으면은, 그렇게 하다 보면요, 아주 마음이 편안하게 돼 버려요. 마음부터 편안해져요, 벌써.

왜냐. 가정의 애고가 줄어들죠, 남의 탓을 안 하고 남의 원망을 안 하게 되죠. 모두가 자기 탓이니까. 깡통이 10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건 깡통 된 탓이지, 깡통이 됐기에 깡통하고 같이 부딪치지, 자기가 금인데 어떻게 깡통하고 부딪치겠소. 그러니깐 깡통 자기 탓이지, 전부 자기 탓이지 누구의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모든 건 ‘아, 이 깡통 된 것도 내 탓이로다.’ 이렇게 생각하고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 놓으세요. 사람이 살아나가려면 그 가정이나 바깥의 모든 일들 때문에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꾸 가죠. 그런데 이 생각하는 것도 꿈이거든요. 그 꿈을 건전하게 꾸시지, 그렇게 그냥 산만하게 꿈을 꾸지 마세요. 모든 거는 그냥, 그냥 집어넣어 버려요. 그렇게 집어넣다 보면 편안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몸뚱이로다 삼천 배를 할 때 생각을 안 하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삼천 배를 한다 할 때, 일 배가 삼천 배…. 내가 이 공부라고 할 건 없지만 공부할 당시에 ‘삼천 배가 일 배요, 일 배가 삼천 배다.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프로펠러와 같다. 그런데 어느 때에 절할 때 네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용광로에 넣어서 모든 것을 정돈해서 돌아갈 때에, 돌아가게 할 그런 다스리는 마음이라면, 마음이 중요한 거지 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절할 때 그 몸을 자꾸 저거 하느라고 아무 생각을 안 했을 뿐이지 그것은 자동적으로 그냥 평상시에 그렇게 무심으로 돌아갔던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삼천 배를 일 배로 하고, 일 배를 일 초로 하고, 일 초를 없애라.’ 이게 참선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평상시에 모든 걸 놓고 편안하게, 와선이나 입선이나 행선이나 모든 것을, 좌선이나 이런 거를 모두 한데 합쳐서 그냥 생활 자체를 참선으로 돌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용광로에다가 그냥 다 놓고,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나갈 텐데 뭐, 생각할 것도 없죠. 그거를 맛을 본다면 부(父)와 자(子)가 동반해서 부 노릇을 할 때는 부로 하나가 되고, 자 노릇을 할 때는 자로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 문수 보현 아닙니까? 이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이렇게….

그러니까 모든 걸 진짜, 참선이라는 것을 실험해 보고 체험하려면 생활 속에서 그대로, 그대로 해야 하고, 이 상대를 놓고 비는 그 마음은 아예 없애야 돼요. 상대를 놓고 믿거나, 상대를 놓고 빌거나, 상대를 놓고 그게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앨 쓴다거나 그런다면 참선에는 그게 해당되지 않아요. 그럼 좌선도 안되는 거죠. 왜냐하면은 내 마음이 좌선이 돼야지, 모든 게 일체가 가라앉고 모두 그저 의연하게 돌아가야 그게 좌선이지 아니, 몸뚱이를 꿇어 앉혀 놓고 마음은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저기 갔다 여기 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통 돌아가는데 어떻게 그게 좌선입니까? 마음이 편안하면은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좌선입니다. 좌선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유전성 질병도 극복할 수 있는지요
문)
저의 시어머님이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남편 또한 현재 폐가 좋지 않아 무척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대로 같은 질병을 앓고 있다면 유전성일 가능성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그러한 유전성으로 인한 질병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답)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두뇌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과거로부터 어저께에 있던 것도 거기에 입력이 돼 있고 삼천 년 전에 있던 것도 입력이 돼 있어요. 입력이 차곡차곡 돼 있으면서 입력된 대로 나오거든요. 입력이 돼서 나오면 그대로 지금 남편도 그렇다고 그러죠. 그거를 그냥 되입력 해서 거기다 놓으세요. ‘주인공, 너만이 다 이게 유전성이고 뭐고 다 깨끗하게 할 수 있어.’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 놓으면은 거기에서 그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면서 이게 새로이 입력이 들어감으로써 병도 나을 수 있고 그러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보이지 않게 관하고 보이는 데서는 음식을 조절해서 먹이고 그러는 거죠. 근데 음식을 먹이는 데도 똑 이게 몸에 좋다 하는 것만 좋은 게 아니라 때에 따라서 남편 몸이 좀 허하지 않게 해야 되거든요. 이거는 미리미리 살면서 보해야 되죠. 이렇게 윗대의 분이 그렇게 됐으면은 잘해서 그렇게 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이게 너무 신경쓰고 애쓰고 그러다 보면 그런 병이 생기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니깐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생각하면서 결정을 짓고, 놓고 관하고 이렇게 가시면은 금방 그 살림이 달라지죠. 그렇게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하세요. 주인공이라는 게 바로 자기의 에너지니까요.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문)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조금만 높은 데 올라가도 공포감이 밀려와 힘듭니다. 이런 문제는 제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인지요.

답) 높은 데라고 생각을 하니까 현기증이 나고 그러죠. 그걸 그냥 얕은 데 섰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냥 평정한 데 소로길이 있어서 그냥 지금 딛고 간다고 생각을 해 봐요. 그럼 옆으로 떨어질 데도 없거든요. 그리고 죽는 거를 아주 애틋해하고 그러지 말고 ‘여기서 죽이거나 살리거나 너 알아서 해라.’ 할 때엔 현기증도 안 나고 젊음이 그냥 용솟음치죠. 그렇게 주인공에다 맡겨서 그 패기를 길러요. 패기가 나오는 것은 기운이 있어야 패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기운이 아주 없어도 패기는 생겨요.
옛날에 공부를 하다 보니깐 먹질 못해서 그냥 가다가 엎드러져서 그냥 쓰러진 거예요. 쓰러졌는데 어디 가 쓰러졌느냐 하면 소똥 있는 데 가선 머리를 박곤 쓰러진 겁니다. 누가 소똥이 거기 있는 줄 알았나요? 그게 보통 얘기니깐 그렇지, 그 당시를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럼 머리 냄새 나니까 머리 씻어야잖아요. 그런데 비누도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진흙을 파서 진흙으로다가 씻고선 머릴 감아야지 되거든요. 진흙으로 해야 그 냄새가 다 빠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그냥 알고 산다 이러질 말고 미련하게 ‘너만이 아니까 너만이 냄새 안 나게 해야잖아.’ 할 때 ‘그럼 저걸로 해 봐.’ 이렇게 뜻이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럼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배우는 거지요. 그래서 마음이 약하다기보다 패기가 없다고 할까. 얼른 쉽게 말해서 그냥 덤벙 뛰어넘질 못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다 놓고 뛰어보세요. 앞뒤를 그냥 다 놓고 ‘그 가운데는 주인공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고는 그냥 주인공에다 탁 놔 버리고 ‘알아서 해!’ 이렇게요. 이 공부라는 것이 생각하면 아주 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한번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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