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 청계사 제4회 마음따라향기법문 108선원순례...대승사 대승선원·용문사·직지사 천불선원

의왕 청계사(주지 성행)는 7월 18일 문경 대승사ㆍ대승선원과 예천 용문사, 김천 직지사ㆍ천불선원를 참배하는 제4회 ‘마음따라향기법문 108선원순례’를 봉행했다. 이날 순례에는 순례단 단장 성행 스님을 비롯해 43명의 순례단원이 함께 했다. 문경=노덕현 기자 noduc@hyunbul.com



선원 찾아 의약품 등 공양물 전달
안거 수좌 용맹정진 따르길 서원

7월의 무더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 하루. 의왕 청계사 ‘마음따라향기법문 108선원 순례단’은 문경으로 네 번째 발걸음을 디뎠다. 바깥의 더위야 아랑곳하지 않고, 내면에 숨 쉬는 욕망이란 불길을 끄기 위해 순례단은 바삐 길을 청했다.

울창한 숲속 금강송을 벗 삼아 꼬불꼬불 올라간 산 중턱에는 아담한 사찰 대승사(大乘寺)가 순례일행을 맞았다. 대승사가 위치한 곳은 해발 600m. 사람이 수행하기 가장 좋다는 높이여서일까. 시원한 바람이 주변을 서성인다. 서울에서 먼 길을 재촉하느라 느꼈던 조급함도 바람과 함께 날아간다.

이번 ‘마음따라향기법문 108선원 순례’에는 새로운 단원들이 대거 동참했다. 늘어난 인파로 인한 소란이 혹여 수행에 방해가 될까봐 순례단장 성행 스님은 누누이 정숙할 것을 당부했다.

대웅전에서 부처님 전에 순례를 고하는 순간 왼편의 대승선원(大乘禪院)에서는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행의 치열하고도 맑고 기운이다. 안거에 들어선지 2달째, 벌써 한소식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번 하안거에 대승사 대승선원에는 비구계를 갓 받은 스님부터 법랍이 30년을 훌쩍 넘긴 스님까지 모두 25명의 납자(衲子)들이 방부를 들였다.

대승사는 신라시대 때부터 수행처로 이름이 높았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사불산을 사이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만나 서로의 수행을 점검했다고 하며, 고려시대의 대선사 나옹혜근도 대승사에서 출가했다. 성철, 월산, 청담, 자운 스님 등 내로라하는 선지식이 수행처로 삼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철 스님은 당시 3년간 눕지 않고 앉아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봉암사 결사의 논의도 대승사에서 이뤄졌다.

근대 불교의 거목들이 거쳐 간 곳이어서인지 대승선원의 수행은 치열하다 못해 혹독하다. 대승선원은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정진하는 여느 선원과 달리 하루 14시간씩 가행 정진한다. 해우소에 가는 10분조차도 지체가 있다면 방석을 치워 버리는 곳이다. 수면시간도 3~4시간에 불과하다.

대승선원장 철산 스님이 용맹정진을 주제로 법문하고있다.
진짜 3시간여만 자고 수행을 3달동안 할 수 있을까? 선원장 철산 스님의 답은 명쾌했다.

“보살님들, 아이 낳을 때 하늘이 노래지죠? 그런데 둘째 아이는 왜 낳습니까? 후손을 남긴다는 일념 하나 앞에는 아이 낳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잠을 자지 않는 고생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승사에는 산철결제 3ㆍ7일간 용맹정진을 합니다. 잠을 안자도 잠을 많이 잔 사람보다 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다보니 스님의 낯빛이 참 깨끗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리부리한 눈썹은 짙은 검은색이다. 스님은 선원장과 주지 소임을 같이 봐야 하기 때문에 선원 스님들보다 더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도 눈에서는 정광이 흘러나왔다.

대승선원에서 참선에 열중하는 순례단
스님들이 점심공양을 올리러 간 사이 순례단은 잠시 대승선원 선방에 앉아 입정에 들었다. 스님들이 떠난 후 잠시 선방에 앉아 선정에 든 순례단원들의 모습은 자못 진지했다. 혹여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봐 입정은 짧게 끝났다. 순례단원들은 조용히 선원을 빠져나왔다. 어느 순례단원은 선방 문고리를 잡고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스님들의 큰 원력으로 선원을 찾은 모든 이들이 함께 성불할 것 같은 기분이 절로 들었다. 다시 대웅전에서는 선방 수좌 스님들에게 공양물이 전달되고 참된 신행활동을 펼치겠다는 수계의식이 진행됐다.

참배를 마치고 나온 길, 성행 스님은 대승사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월산 스님이 대승선원에서 수행할 때의 일화였다.

“월산 큰 스님께서 대승선원에 계실 때 간간히 스님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스님께서 수행 중에 자주 살피시던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열반 하신 후 그 소나무가 점점 말라 수명을 다하는 겁니다. 스님의 법력이 서린 나무여서 스님을 그리워하는 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승사에 올 때마다 큰 스님과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대승사를 나선 순례단은 구불구불 호반길을 따라 예천 용문사로 향했다. 호반길의 호젓한 분위기와 산사 특유의 향취가 가슴 속 깊이 전해졌다. 용문사는 양평 용문사가 용의 머리, 예천 용문사가 용의 몸통, 남해 용문사가 용의 꼬리란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예천 용문사 참배는 한반도를 가로 누운 용의 진신을 살핀다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서 순례단은 용문사 대장전에 보관된 윤장대를 돌리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용문사 윤장대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로 이를 돌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뤄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난 1984년 대형화재 때도 윤장대를 보관하고 있던 대장전은 불에 타지 않아 영험함이 더욱 유명해졌다. 조심스럽게 윤장대를 도는 순례단원들은 각자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궁금함도 잠시 용문사를 되돌아 나와 각자 향을 들고 소원지를 소지하며 순례단은 김천 직지사로 발길을 옮겼다.

예천 용문사에서 윤장대를 돌리는 순례단원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직지사가 위치한 황악산 자락 끝에 걸리고 있었다. 김천 직지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인 신라 19대 눌지왕 2년(418) 고구려 승려 아도 화상이 포교 전진기지로 쓰기 위해 창건한 신라 초전법륜지다.

절 이름이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선종교지에서 나왔다는 설과 아도 화상이 우리나라 최초 사찰이라고 하는 구미 도리사를 짓고 나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해 직지사가 되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순례를 회향하는 장면
직지사에 들어서서 병풍처럼 둘러싸인 황악산 자락을 마주하니 온몸에 청아한 기운이 감돈다.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東國第一伽藍黃岳山門)’이란 웅장한 산문 양 옆으로는 짙은 녹음이 알싸한 숲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귓가에 양쪽 길섶으로 소담스럽게 파인 골도랑의 콸콸거리는 물소리가 도시에서 일상생활에 지쳐있던 순례단의 머리와 가슴을 확 트여주며 행복감에 젖게 했다.

순례단은 직지사 설법전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도피안교(到彼岸橋)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피안 세계 천불선원이 펼쳐졌다. 천불선원에서는 하안거를 맞아 스무 명이 넘는 스님들이 불철주야 정진하고 있었다.

천불선원 선원장 성고 스님은 “저 스님이 참 맑다 해야 불심이 사는데 부끄럽기 그지없다”며 맑은 미소를 뗬다. 순례단은 선원 이름처럼 현세 천 분 부처님이 나투도록 두 손 모아 기도 올렸다.

천불 선원 공양물을 성고 스님에게 전달하는 자연 순례단장
스님에게 공양물을 올린 자연 순례단 회장은 “기름을 물위에 떨어뜨리면 한 방울이 여러 방울 흩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처음의 한 방울처럼 모여든다. 오늘 우리 인연이 언젠가는 성불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며 무더위에도 끝까지 함께한 순례단원들을 격려했다.

성행 스님은 “내가 한발 한발 디디는 그 순간이 참 나를 알 수 있는 경계가 돼야 한다. 삼보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 스스로가 함께 행복해 한다면 그 것이 진정한 공양이라 할 수 있다”며 “순례단과 그 행복을 찾기 위해 힘들지만 함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순례 회향을 알렸다.

정갈한 산사를 등지고 나오는 길, 천불선원에서 마신 시원한 차보다, 길옆을 흐르는 시원한 냇물보다 더 갈음을 해소하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깊고 깊은 산속 선원을 찾아가는 여름 나들이가 향기로운 해거름이었다.

무더움도 잊은 참선현장. 대승선원에서 순례단장 성행 스님과 순레단원들이 좌선 삼매에 들었다. 수좌 스님들의 치열한 구도 기운이 순례단에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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