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민족주의

2010년 10월 국제엠네스티 캠페인 자료에 실린 미얀마 스님들의 민주화운동 시위 모습
영국식민정부, 조직체로서 승가 견제
불교 주축 독립 운동 민족주의 발전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의 선례로 남아

최근 미얀마 서부에 이어 중부지역에서도 불교와 무슬림 간의 폭동이 일어나 세계 주요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미얀마 서부에서는 200여 명이 죽고 14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지를 잃었다. 최근 중부에서는 약 44명이 사망했다. 중부는 영국지배기간에 인도로부터 이주한 무슬림들이 많다. 미얀마에서 반무슬림 현상은 영국식민지배 기간 동안에 배양된 불교 중심의 민족주의와 관련이 있다.

미얀마를 여행하는 사람이나 연구하는 학자들은 불교와 미얀마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특히 학자들은 불교가 깊이 생활화돼 있는 미얀마에 대해 놀라움을 표한다.

저명한 미얀마 연구자인 실버스타인 교수는 “미얀마의 어느 지역에 있든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야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미얀마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다”라며 불교가 미얀마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까지 평하기도 했다.

과거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얀마는 불교, 국가, 승가, 국민이라는 네 요소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 네 요소의 긴밀한 상호 관계로서 사회적 통합력을 유지하며 내려왔는데 바로 영국식민지배기간에만 이러한 관계가 깨져버렸다.

즉, 영국식민정부에 의해 국가와 다음 3가지 요소인 불교, 승가, 국민의 긴밀한 관계는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식민정부는 불교의 후원자나 보호자와 같은 역할과 기능을 거부하였다.

이전까지 불교의 주도 하에 또는 불교를 구심점으로 미얀마는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 식민정부가 불교를 후원하지 않은 것은 이후 식민지배 실패 원인으로 꼽혔다. 식민지배를 거치며 미얀마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이 가속화됐다. 불교를 중심으로 반제국주의 또는 반식민주의 운동이 전개, ‘불교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사찰 착화 항의 계기로 민족주의 전개

미얀마 민족주의를 이끈 스님들로 먼저 우 띠라 스님이 이야기된다. 그는 동굴이나 묘지 등의 노천을 전전하면서 수행하였는데 이러한 금욕적인 수행에 미얀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물품을 스님에게 보시하였다. 스님은 이러한 시주물을 바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다시 회향하였다.

이 같은 모습이 사람들을 뭉치게 하자 영국식민정부는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어떠한 죄목도 적용할 수 없었다. 그의 이 같은 두타행과 시주물의 회향은 미얀마 사람들이 같은 민족임을 자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다음으로 미얀마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큰 역할을 했던 스님은 앞 호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듯이 레디 샤야도 스님이다. 그는 신발을 신고 사찰에 들어오는 유럽 관광객들의 무례를 비판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재에도 위빠사나 수행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인도로 성지순례하면서 불교의 중심 가르침인 연기법에 관한 저술과 함께 빠알리로 된 부처님의 생애를 미얀마어로 옮겨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렸다. 마을을 돌면서 불교모임을 열고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설교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불교를 중심으로 미얀마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미얀마의 청년불교도연맹(YMBA)이 스리랑카 청년불교도연맹과의 교류 속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였다. 1906년에 창립된 청년불교도연맹은 향후 10년 운동의 방침을 종교 문화에 대한 문제가 중심임을 천명하여 영국식민정부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연맹은 전국에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불교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 때 식민정부로부터 50%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 정부는 미얀마 국민의 세금으로 기독교 미션 학교에 50%의 지원을 하고 있었기에 불교 측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미션학교가 성경을 가르치듯이 불교학교에서도 불교교육이 가능함을 주장하여 시행하였다.

불교사찰 내에 유럽인의 착화사건을 계기로 착화를 항의하는 스님들이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결국 식민정부는 사과와 함께 탈화를 공식화하였다.

1988년 8월 8일 열린 민주화 항쟁 당시 스님들의 모습
민족주의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스님 옥사

스님들의 민족주의 운동 과정에서 우 위자라(U Wissara) 스님과 우 옥뜨마 스님이 정치적 또는 대중적 지도자로 역할을 하였다. 1921년 우 옥뜨마 스님은 불교적 민족주의를 담는 대중연설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흔히 출가자의 정치적 사회참여는 계율에 저촉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점에서 계율 전통이 온전한 미얀마에서 출가스님의 사회참여 논리는 시사 하는 바가 많다. 그는 불교대의(大義)를 통해 역사대의(大義)와 사회대의의 모두를 실현하려는 보살도는 앞으로도 계속 음미될 것이다. 특히 불교의 궁극적 구원이 현실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 부분은 더욱 그렇다. 그는 불교의 비폭력 정신에 의거하여 영국식민정부와 투쟁에 있어 비폭력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불교적 투쟁 방법으로 부처님의 전생담을 담은 자타카(本生經)를 인용하여 대중들을 깨우쳤다.

우 옥뜨마 스님은 영국정부에 세금납부 거부와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펼치다 옥사했다. 그는 투옥 당시 죄수복 대신 가사를 입도록 해줄 것을 주장했으며 형무소에 수감돼서도 보름 마다 포살을 펼쳐야 한다며 166일간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단식농성으로 인해 그는 옥사했지만 그의 사상은 미얀마 국민들의 반영사상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정부는 다른 스님들이 투옥되었을 때 가사 착용과 포살 거행을 인정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스님들은 영국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민의 지도자가 돼 반영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스님들이 투옥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군부독재에도 민주화 운동 펼쳐

불교 지도자인 스님들이 외세에 의한 식민주의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이 됐고 마찬가지로 독립 이후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스님들이 밤색 가사를 입고 정연한 대오를 형성하는 대규모 비폭력 시위는 외국인들에게는 장엄하게까지 느껴지게 했다. 2007년 9~10월 진행된 민주화 시위는 세계적으로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군사정부가 일방적으로 유가를 대폭 인상해 국민들의 생활고가 심해지자 스님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시위 참여 스님들이 군사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발우를 거꾸로 뒤집는 복발(覆鉢)을 하고 행진했다.
부처님 시대부터 스님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발우를 뒤집어엎는 것은 작복(作福)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다. 복발은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로부터의 보시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행위였다.

현재에도 미얀마에서 스님들은 사회문제에 있어 지도적인 그리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미얀마 스님들이 미얀마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불교정신으로 역사와 사회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이러한 희생적인 보살도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미얀마에 있어 불교가 국민들과 사회에 깊이 생활화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불교와 떼어서 미얀마를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과 같은 여섯 이유는 한국불교에도 큰 시사점을 던진다. 미얀마에 있어 외세지배 상황에서 스님들의 역할은 우리의 과거에 있어 임진왜란 때의 승병의 활약과 비교할 수 있다. 승병은 외침과 환란 속에서 살육을 당하는 중생의 처참한 현실을 방관하지 않고 출가자로서 계율에 어긋나게 칼과 창을 잡았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조선왕조가 결국 승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바로 승가라는 조직체였기 때문이다. 승가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독살이의 세상에서 대의(大義)에 따라 가공할 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화합의 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했다. 미얀마에서도 군사정부가 가장 견제했던 조직체가 승가인 이유도 그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 불교계는 이러한 화합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데 보다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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