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뿌리를 진짜로 믿고 아주 직코스로 관하라

▲ 그림 최주현

관법이 별나게 다른 게 아닙니다.
수박을 갖다 놓고 ‘이게 뭣고?’ 하고
매사 걸 ‘뭣고’로 돌아가기보다는
두려움 없이 그냥 짜개서 드세요.
그러면 수박 맛이 어떠한가 알게 되고
또 수박 속에 씨가 있다는 것도 알게 돼서
세세생생 먹일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남):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도 하필이면 오늘 따라 이렇게 날씨가 쾌청하고, 또 제가 큰스님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으니까 벌써 준비했던 질문이 거의 반쯤은 풀린 듯도 합니다. 질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삼법인(三法印)중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제법에는 이름하여 붙일 것이 없다.’ 하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법에 이름이 없다면 오늘 수행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면 업은 어디에 붙는 것입니까? 저의 좁은 공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여러분이 알게 되면 ‘참 희한한 법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찰나찰나 아버지 노릇 하고 엄마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이러죠? 그 얘길 항상 하죠. 그런데 그렇게 찰나찰나 내가 있고 생활하고 돌아가되 찰나찰나 그렇게 많은 것이 돌아가니까, 천차만별로 돌아가니까 어떤 거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함이 없이 하는구나.’ 이렇게 되죠. 함이 없이 하는구나. 아버지가 됐을 때에 나라고 할 건가, 남편이 됐을 때에 나라고 할 건가,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 건가. 나라고 붙일 것이, 틈이 없이 자꾸 찰나찰나 나투며 화해서 돌아가니까 도저히 나라는 걸 이름해서 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공했노라.’ 또 어떤 말은 ‘나는 없노라.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느니라. 나는 한 일이 없노라. 나는 여러분한테 설법한 일이 하나도 없느니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도 살아 보십시오. 그저 쳇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면서 남편 노릇 했다가 자식 노릇 했다가 아버지 노릇 했다가, 그저 매일 여러 가지로 돌아가는 게 그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거 할 때에 남편이 했다고 그러고 어떤 거 할 때에 아들이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니 나라는 게 없다. 나라는 게 너무 많아서 그냥그냥 여여하게 그렇게,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친구 노릇 하면서 여여하게 돌아가더라. 이러니 어찌 붙을 게 있겠습니까? 만약에 둘 중에 하나를, 공해서 없다는 거를 알면 붙을 게 없을 것이고, 이것이 천차만별 바깥으로 끄달리고 그저 내가, 내가 있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내가 줬다, 모두가 나, 나, 나, 나 이러고 돌아가면 꼭 그냥 매사 게 붙어서 걸려서 돌아가죠.
이거를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음식을 먹는 대로 소화가 잘되면 그대로 여여한 거고, 욕심이 많아서 어떠한 거든지 먹으면 체하고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변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면 걸려서 메어서 죽습니다.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잘 써서 소화가 잘되면 거침없이 걸림 없이 돌아가고, 그걸 재료로 알고 실천을 해서 체험을 하고 이런다면 그게 마음의 발전이 되고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고 과학이 되고 창조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저 무의, 무심의 50% 정신세계는 모르고 물질세계만 알고 하니까 내내 걸려서 못 삽니다.
지금 정신세계가 얼마나…, 지금 시점에도 정신세계가 아니라면 안 되는 법! 지금 정신을 뺏기고 뺏어 먹고 사는 시대가 아닙니까? 꼭 육을 짓대겨서 잡아먹어야 잡아먹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을 뺏어 먹고 정신을 잡아먹고 사니까 정신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정신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뭐라고 물었는데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질문자4(여): 저는 경남 마산지원에서 왔습니다. 여태까지 공부하느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잘 모르는 점이 있어서 한 가지만 점검을 받고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큰스님께서는 늘 관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늘상 이끌어 가는 자가 누구이며 보는 자가 누구냐는 ‘이 뭣고?’로써 화두를 삼고 있는데요,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관법하고 화두를 잡는 법하고 어떻게 다른지 다시 한 번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관법이 별나게 다른 게 아닙니다. 수박을 갖다 놓고 ‘이게 뭣고?’ 하고, 매사 거를 ‘뭣고’로 돌아가는 거보다도 그냥 두려움 없이 수박이다 하면 갖다 놓고 (손날을 내리치시며) 그냥 짜개서 먹어! 하하하. 아, 그러면 수박 맛이라는 게 어떠한가 알고 또 수박 속에 씨가 있는 것도 알게 돼서 그 이듬해 그 씨를 심어서 다시 또 여러 중생들을 다 먹이고 씨가 되남으면 그 이듬해 또 먹이고, 또 씨가 되남으면 또 먹이고, 세세생생 먹일 수 있는 그 역량을 가질 수 있고, 나의 마음을 깨달아서 바로 자비로써 그렇게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노보살님이 불전을 올리자) 이게 나한테 갖다가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갖다 주는 거라면, 내가 받았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갖다 줬다고 하지 않는 시주라면 이 삼천대천세계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이 한데 합쳐진 한마음의 근본, 바로 불바퀴의 에너지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 시주를 할 것 같으면, 만 원을 했다면 십만 원 내지 몇 곱쟁이가 불어 갈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주가 아니고 개별적인 스님의 고깃덩어릴 위해서 어떠한 착을 가지고 이렇게 시주를 했다면, 그리고 또 자기가 했다는 거를 생각하고 했을 때는 큰 집을 지어 줘도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질문자5(여): 스님, 저는 진주에서 온 신도입니다. 첫째는 스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작년에 스님을 친견하고 갔다가 오늘 또 왔는데 너무 감사해서 왔습니다. 스님, 제 몸이 차도가 없습니다. 스님이 좀 많이 도와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지금은 밥을 도저히 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스님.
큰스님: 이거 보십시오. 잘 들으세요. ‘내가 낫게 해 준다.’ 하면 귀신이 되는 거고, 아시겠습니까? 그건 귀신 법이야. 그러면 뭐냐? 여러분 몸속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생명체들, 의식들이 전체 들어 있는 거니까 몸뚱이는 그 생명체들의 집합소입니다, 집입니다. 몸뚱이가 그 생명들의 집입니다. 집이 집을 고칠 수는 없죠. 집 속에 들어 있는 주인들이 고칠 수밖엔 없죠? 우리도 집을 지어 놓고 살면서 집이 헐어지면 우리 주인들이 고치죠? 그렇듯이 당신네 몸체도 바로 집일 수가 있어요. 그 생명체들의 집. 그러니까 집이 망가졌을 땐 ‘너희들이 고쳐라.’ 이러는 겁니다. ‘너희들이 살아가면서 집을 망가뜨렸으니까 너희들이 고쳐라. 고쳐서 써. 고쳐서 끌고 다녀.’ 하는 겁니다.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의 한마음 속에서 병이 나게 했으니 너의 한마음 속에서 바로 고쳐서 끌고 다녀야 하잖아, 네 심부름꾼인데.’ 하고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면 올도 지나가지 않고, 아니 오늘부터도 아마 밥을 먹게 될 겁니다.
아이구, 참들! 어떻게 모두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그러고, 자기 뿌리를 믿으라고 이끌어 주고, 자기 영원한 뿌리를 믿으라고 직코스로 대 줘도 직코스로 하질 못해서 모두…. 하이구, 참 내. 허, 기가 막혀서. 아, 직코스로만 하면….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 봤어요? 자기 손가락 하나가 자기 손가락 하나를 자를 수 있겠느냐고요?

질문자6(여): 큰스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다시 또 제가 질문을 드리게 돼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요, 어느 때 몸이 아파서 찾아온 사람에게 “본래 병 붙을 자리가 없는데 어디 병이 있으면 내놔 보시오.”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분이 곧 기력을 얻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건강을 회복한 것은 믿음의 결과였습니까, 관법이었습니까? 이 자리에도 있을 몸이 안 좋은 많은 사람들이 큰스님의 가르침을 기다리고 있어 다시 질문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큰스님: 눈이 갈 때에 귀가 가고, 귀가 갈 때에 모든 감각이 가죠. 모두 안 그렇습니까? 저기서 “불이야!” 그러면 눈으로 보는 동시에 귀로 듣게 돼 있거든요. 그런 거와 같이 믿음이 있어야 관법도 제대로 하는 거예요.

질문자6(여): 예. 알겠습니다.
큰스님: 그러니 관법과 믿음은 둘이 아니죠. 직코스로 ‘아, 자기가 공했다는 그 이치만 안다면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너 나가 따로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거를 다시 되묻고 되묻고 해서 여러분이 좀 다 알았으면 합니다. 하하하….

질문자6(여): 감사합니다. 스님,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스님의 지엄하신 이런 큰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애절한 어머니 한 분이 계셔서 제가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아들이 3년 전부터 대학원을 다니다 스스로 자퇴를 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계속 방황을 하고 있다고 저한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 도리를 같이 공부하면…. 이 도리 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제 나름대로 얕은 지식을 같이 나누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보살님은 부처님 법만이 내 아들을 건질 수 있고 모두를 건질 수 있다고 믿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모두 따라 주질 않는답니다. 그런 애절한 마음이 있어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런데요, 우리가 이런 나무 하나도 제대로 기르려면 ‘아이, 요게 참 잘 자라야지.’ 하고 이쁜 마음으로 물을 주고 해야 마음이 전달돼서 아주 푸르르게 잘 자랍니다. 그런데 ‘요놈의 건 있으나마나야. 에이, 이런 거 여기다가 둬서 뭐 해?’ 하고서 배척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냥 한쪽이 썩어 들어가고 말이 아니게 죽습니다.
그와 같이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한마음이 첫째 돼야 하고, 또 둘째는 본인도 그래야 하지마는 더군다나 주변 사람들도 아들이다 어머니다 하는 가설이 돼 있단 말입니다. 한 집 안에 전기를 켜려면 이 방 저 방, 아들 방 어머니 방 이렇게 다 가설을 해 놓죠. 불 들어오게끔요. 그리고 집 안에 스위치를 하나 해 놓죠. 그리고 방마다 스위치를 또 해 놓죠. 그러니까 자기가 그 스위치를 눌러 놓으면 자동적으로 불이 들어오게끔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되는 거니까 마음으로 애절복절 하지 마시고 턱 믿고, 아들의 마음 주인공이나 내 마음 주인공이나 뿌리가 다 같으니까 ‘내 주인공, 당신만이 저 아들이 마음을 잡고 밝게 살게끔 할 수 있잖아.’ 하고 직코스로 들어가야지, 지금 보살 마음까지도 못 믿고 돌아가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전기가 들어옵니까. 어떻게 스위치를 올리지도 않고 전기 들어올 때를 바랍니까?


질문자6(여): 스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질문자7(남): 부산에서 온 신도입니다. 항상 오고 감이 없이 같이 있는데 큰스님을 다시 또 이렇게 뵙게 되니까 참 반갑습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불교에서는 보시행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끝간 데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홍서원에서 ‘중생무변서원도’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한없이 많은 중생을 대상으로 어떻게 보시행을 해야만 보시바라밀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인지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큰스님: 아, ‘무변서원도’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무변! 하하하…. 이 마음을 말입니다, 나는 항상 그렇게 여러분한테 말씀드립니다. 또 나 자체가 그렇게 살아왔고요. 남에게 뭐를 줘도 내가 그걸 받으려고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보시가 아닌 겁니다. ‘내가 이걸 줬으니까 너 잘되면 나한테 꼭 잘해야 돼.’ 하고 주는, 말로 그렇게 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는 그렇게 바라고 합니다. 형제지간도 그렇고 친구지간도 그렇고,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그럭하면 보시가 아닙니다. 뒤를 보지 않는 보시, 무엇을 바라지 않는 보시, 그리고 자기가 했다는 생각이 없는 보시. 왜냐하면 일체 만물만생이 한마음으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데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네가 한 것도 아니고 전체 한마음으로서 모두가 같이 천연적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음의 살림살이인데 내가 특별나게 ‘내가 줬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그러고 한다면 보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받고서 ‘이거 이렇게 줬으니까 이거를 보답을 해야 할 텐데….’ 하는 거는 정한 이치로, 그것은 인연에 따라서 참 잘 생각하는 거라고 봅니다. 착한 마음이죠. 그러나 준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보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내가 줬다. 내가 했다. 너는 내가 줬으니까 반드시 나한테 잘해야 된다.’ 이런 마음이 없이 하는 게 보시입니다.
그리고 마음 보시가 더 중요합니다. 물질 보시보다도 마음 보시. 길을 지나가다가도, 하다못해 다리가 성치 않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느라고 무엇을 끌고 다닌다거나 또는 성치 않은 사람이 그릇을 놓고 좀 달라고 한다거나, 장님이 무엇을 달라고 한다거나 또 몸은 성해도 그냥 가정이 엉망이 되고 편찮은 사람이 많고 이래서 쩔쩔매는 사람, 부모가 없이 그냥 사는 애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뒷생각 앞생각도 하지 말고 그대로 ‘나도 수억겁을 거쳐 올 때에 병신도 됐었을 거고 못나기도 했었을 거고 또는 모자라기도 했었을 거고 장님도 됐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겪어 나온, 과거에 그렇게 겪어 나온 바로 내 모습이로구나.’ 하고 바로 내 모습처럼 생각하고 그냥 앞도 뒤도 없이 보시할 수 있는 그 마음. 하하하…. 그 마음이 즉, 보시입니다.


질문자7(남): 감사합니다.

질문자8(남): 스님, 울산지원에서 올라왔습니다. 스님을 뵙고 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육조 혜능 대사가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 그러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무량겁을 넘어오면서 뭇 중생들이 지은 많은 죄업을, 타 종교에서는 자기 죄를 소멸하면 그 죄가 없어진다 그러고, 우리 불교에서는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가 끝까지 가지고 간다 그러는데 그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스님 말씀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이거 봐요. 우리가 업을 지었든지 업을 안 지었든지 공동분담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왜냐? 모두가 공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업이 따로 있고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 속에다 모든 걸 놓고 편안히 여여하게 살아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하기에 달린 거죠, 모두가. 또 앞서의 말은 뭐라 그랬죠?

질문자8(남): 육조 혜능 대사가 나무를 해서 자기 어머니를 봉양을 하려고 나무를 팔려고 지고 오는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이죠. 그런데 길을 지나치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 말을 듣고 도를 깨쳤다 그러는데요, 그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면 지금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지요?

큰스님: 아, 지금 그 말을 해석해 보시오.


질문자8(남): 잘 모르니까 여쭙는 거 아닙니까, 스님.

큰스님: 아, 모르는 말을 왜 물어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으면서 행하는 도리입니다. 하나도 가질 게 없다는 것을 내 어찌 알았으랴. 또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어찌 알았으랴. 내가 참이라는 것을, 내가 참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으랴. 모두가 내가 구족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으랴. 이런 뜻에 속하는, 한데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가 생활 속에서 행하고 살고 있습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다.’ 이게 노래에 있죠? 그것이 노래가 아닌 노래입니다. 조금 있다가 또 할 겁니다. 그것만 잘 들으시면 됩니다. 하하하….
질문자8(남): 스님, 감사합니다.

큰스님: 여러분! 꼭 부탁할 말이 있어요. 내가 간곡히 부탁할 말이 있어요. 진짜 자기 영혼의 뿌리를 진짜로 믿어서 아주 직코스로 관하세요. 그래야만이 몸속의 생명체들이 ‘아, 요런 것이 바로 나구나.’ 하고서 누진으로 통신을 해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나 죽일 수 없지. 우리 집이 헐어졌다는데 우리 집을 고쳐야지.’ 하고 모두 작용을 합니다. 병고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입니다. 못한다 한다는 여러분의 사정이고 모두 사량이지 부처님의 도리는 한다 못한다가 없어요. 된다 안된다도 없고요. 알았어요?
대중: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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