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공감 힐링' 진흥원 강좌 - 강신주(철학자)

▲ 강신주 박사 …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상상마당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철학적 주제를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풀어낸 철학서를 다수 펴냈다. 동양철학 전공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밝아 쉽게 읽히는 철학을 지향한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이 있다.

 

'적․동지' 이분법 현상 현대사회 병폐
불교는 적을 만들지 않는 종교
성불의 원 세우면 화엄세계 열려


가히 인문학 열풍이었다. 경제위기, 사회갈등 등 삶이 피로해질수록 사람들은 종교가 아닌 인문학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었으며 보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깊이있는 통찰과 재치로 사람들과 소통해온 철학자 강신주는 7월 16일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김규칠)이 마련한 ‘인문학으로 공감하고 힐링하기’를 통해 청중들과 만났다. 직설적인 언어로 현 사회의 문제를 캐낸 그는 우리 모두의 행위는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인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분법을 희석시키는 데 불교의 역할이 중요해지리라는 것 또한 강조했다.


인문학과 불교는 상통

오늘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할 겁니다. 출판시장에서 꾸준히 팔리는 책은 종교 책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당황스럽거나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 깜짝 놀란 듯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그 상황 속에서 해결해야지 왜 기도를 합니까. 기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맨 마지막에 하는 겁니다. 인문학은 인간이 실수를 해도 인간의 범위 내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문학 정신입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가 그 예죠. 기독교에서는 신이 우리를 만들고 이 세계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죽어야 인간이 역사를 꾸려갑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로 보라고 합니다. 부처를 숭배하면 내가 부처가 안 되니까요. 아버지가 없어야, 아버지와 다르게 생각해야 어른이 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이 영원히 학생이고자 한다면 선생님은 못 됩니다. 선생을 죽여야 해요. 여기에 불교의 급진적인 면이 담겨있습니다. 대웅전에 있는 금부처, 똥 막대기입니다. 이 정도 기백이 돼야 깨우칩니다. 이것이 조계종 선종의 전통입니다.

세상을 분별있게 바라봐야
칸트는 세상을 보는 잣대를 참과 거짓, 선악, 미추로 나눴습니다. 칸트 이전에는 이것이 구분되지 않은 채 진실된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세계가 있고,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세계도 있다는 분별력을 보여줬죠.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 말해도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해요. 하나의 사안을 두고 진으로, 선으로, 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폭력영화인데 아름다울 수 있는거죠. 아름답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만 보면 되는 겁니다.
의사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는 수술대에서 냉정해야 하기에 인간 몸이 기계로 보일 때까지 해부를 하니까요. 하지만 수술실에서 벗어나도 환자를 같은 시선으로 봅니다. 세상을 시체로 보는 의사는 분별력 없는 의사죠.
세상을 경제적인 것의 범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이롭냐 해롭냐는 이해관계로 보는 거죠. 또한 종교적으로도 볼 수 있어요. 성과 속. 어떤 사람에게 커피는 성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법당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니까요. 산책이나 밤에 촛불을 켜고 책을 읽는 것 등도 종교적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동일한 사건을 참과 거짓, 선악, 미추, 이해, 성속이라는 잣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주를 구분하고 눈앞에 있는 필터를 갈아 끼우면서 사안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법 중 마지막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칼 슈미트의 정치적 개념입니다.

적과 동지를 나누는 사회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이란 기본적으로 적과 동지라는 범주로 작동한다고 규정합니다. 판단의 범주가 적과 동지로 이원화된다면 그건 이미 정치적인 행위라는 거죠. 내편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건 다 정치적인 겁니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정치행위를 합니다.
적과 동지를 나눈다는 건 누군가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할 때입니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습니까. 일본이 전국시대가 통일된 후 내부 잡음이 끊이지 않자 그를 희석시키기 위해 대외 전쟁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내부대립을 외부대립으로 치환시키는 거죠. 적을 만들면 내부대립하던 세력이 한 동지가 되는 겁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판문점에 갑니다. 20세기에 이념적 대립이 없어졌는데 한반도에는 아직 존재하는 게 신기하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단을 요구했습니까. 아니죠. 미국과 소련이 갈등을 유발시킨 겁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경기가 열리면 국가대표를 왜 뽑습니까. 우리민족이라고 하면 모든 게 용인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프로축구는 안 보는데 월드컵은 봅니다. 붉은 악마가 돼야한다고 얘기를 하죠. 경기를 보며 우리나라가 메달을 따는 순간 기뻐한다면,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말려드는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권도 지역도 대립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노조도 나눠져 있죠. 우리는 복잡한 지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노동자인 나의 이익을 따져보면 자본가의 이익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맞물리는 관계 속에서 무소유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무소유는 소유하지 말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갖지 않고 누구를 주는 겁니다. 무자는 없앤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보시입니다. 많이 소유하세요. 동시에 주려고 해야 합니다. 인간적 운동이든 자비의 운동이든 자기가 더 가지려고 하는게 아니라 더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일반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외국인 노동자들을 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적인 운동이 됩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는 어찌보면 탐욕스럽고 동물적입니다. 내 아이만 대학가라고 기도하죠. 이건 다른 아이보고 떨어지라는 얘기와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서는 천일기도를 한다며 신한테 압력을 넣습니다. 엄마는 자식만 생각하며 헌신하지만, 아이들에게 존경을 못 받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당당하죠. 부모 자식간 관계가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럴 때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적을 만드는 거에요. 앞집 아줌마와 격렬하게 싸우면 자식들은 엄마 편을 들게 되어있습니다. 갈등이 미봉책으로나마 수습되는 거죠.

적을 없애고 동지를 없애다
적과 동지를 구분짓지 않기 위한 방법은 간단합니다. 일단 적이 없으면 됩니다.
부처가 자비를 얘기했을 때 비불교도한테는 예외였나요? 아니죠. 아예 적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공자가 보수적인 인물임에도 오늘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적이라는 개념을 없앴기 때문입니다. ‘인자무적’. 어진사람은 하늘아래 적이 없다고 했거든요. 적이 없는 사람만이 춘추전국을 통일 할 수 있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선언이에요.
묵자는 모두 사랑하자는 겸애를 얘기합니다. 묵자가 가지고 있는 자비입니다. 진시황이 천하통일하면서 빨리 사장시키려고 했던 인물이 묵자입니다. 전쟁을해야 하는데 적병을 껴안으라고 하니 위험하거든요.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얘기도 정치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예수를 지지했던 이유는 로마에 맞서 유태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유태인 쪽에서 예수를 죽여버린 거죠. 기독교가 힘이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적과 동지를 끊임없이 내세우는데 있습니다. ‘우리 교인’ 하면서 서로 단합이 잘되죠. 이건 예수의 정신에 반하는 겁니다.
스님들이 가족을 떠나는 의미도 동지와 적을 없앤다는 의미가 있다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탐욕스럽게 되잖아요. 그러니 내 것과 아닌 것을 가르지 않고 홀로 있길 택한 거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않는 방법 중 동지를 없애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에게만 집중하는 겁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양주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천하는 통일되고 평화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살되 동지로 안보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촛불집회 가셔도 됩니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이 살아있는 현장아니냐고 하시겠지만, 가십시오. 가되 누가 다른 무언가를 하자거나 하면 안 움직이면 됩니다.
요즘 화두는 복지국가입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가족처럼 된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외국인들을 배척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만 잘살자'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한 사회가 복지국가가 되면 ‘우린 동지'라는 의식이 굳어집니다. 적을 설정해도 문제가 되고 동지를 강력하게 설정해도 문제죠. 동지를 만들면 배제된 사람이 적이 되어 버립니다.

성불은 사회 원융의 초석
우리는 적과 동지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겁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는 강력한 정신으로 가야합니다. 누구에 대해 자비를 가지라는 건지 개념이 잡히시죠. 적과 동지에 포획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호승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읽어나가겠다고 하는. 그러한 책들을 한권씩 읽어가며 느끼는 희열은 암벽등반에 비유할 수 있죠.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에게 바위는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어?’ 라고 말합니다. 철학자들에게도 책이란 마찬가지죠. 나가르나의 <중론>과 <대장경> 등을 읽을 때는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너무 힘들었거든요.
불교를 알아가면서 불교적 사유가 미래 사회의 희망이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불교 안에는 강력한 민주주의 원리가 있으니까요. 기독교에서는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다 해도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성불을 할 수가 있죠. 성불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은 그 세계가 화엄의 세계고 전체적인 민주적인 세계임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적과 동지가 없어지는 거죠.
이렇듯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서 불교 역할은 큽니다. 불교가 근본 가르침에 충실할수록 앞으로 사회에서 불교가 할 일도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불교가 강해져야 합니다. 불교가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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