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일요 초청법문-대효스님

‘나’ 바로보기로 지혜를 가져야
지혜가 갖추어지면 있는 그대로 만족해
‘억울하다’는 생각은 지혜가 낮은 것
40년 같이 산 배우자 속을 본다는 것
‘어느 정도 알 고 있다’로 낮은 지혜
‘안다’ ‘모른다’를 넘어 ‘알 수 없음’이어야

▲ 대효 스님은…1968년 문경 김용사에서 득도했다. 스님은 김룡사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며, 1976년 ‘선수련회’를 열기 시작한 대효 스님은 제주 원명선원에서 30여 년간 재가불자들의 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이후 2008년 안성시 죽산면에 활인선원을 개원해 선회 수련회, 단기출가 등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청소년, 대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참선지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지어낸다. ‘옳고 그름’ ‘높고 낮음’ ‘좋음 싫음’ 등.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지혜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객(主客)의 대립, 상대적 차별심, 그리고 무엇인가를 안다는 ‘분별의식’에서 벗어날 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참선수행을 지도하는 안성 활인선원장 대효 스님이 6월 23일 서울 길상사에서 초청법문을 열었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지혜는 있다. 그러나 ‘나’를 바로보고 ‘안다’ ‘모른다’를 넘어야 그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설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으십니까. 무엇이 중심이 돼서 돌아가는 것일까요. 부처님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까?
부처님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부처님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외모를 보고 부처를 보지 말라, 소리를 듣고 부처를 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부처님을 무엇으로 봅니까.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을 할 때 가치를 따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거 하면 밥이 나옵니까, 술이 나옵니까?” 여러분들은 여기 왜 오셨습니까. 이 법회에 나오면 밥이 나옵니까, 술이 나옵니까.
아마 이 말 속에는 밥과 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을 겁니다. 밥과 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겠죠. 잠시 술 얘기를 하겠습니다. 술을 발효시키면 반드시 찌꺼기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술지게’라고 하죠. 우린 무엇을 먹습니까. ‘술지게’와 ‘술’중에서 뭘 선택합니까. 당연히 우리는 술을 선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잘못 보면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요. 술을 선택하지 않고 찌꺼기를 선택하겠죠. 여러분은 술을 선택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찌꺼기를 선택하는 쪽입니까. 물론 여러분은 술을 선택할 것입니다. 술을 선택하는 쪽을 술파, 찌꺼기를 선택하는 쪽을 찌꺼기파라고 해봅시다. 본인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부처님을 음성으로 들으면 ‘찌꺼기파’일 것입니다. 우리는 ‘술파’로 가야합니다. 여러분은 술파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술파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찌꺼기 파로 만족하십니까.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중요합니까. 한국에서는 불교의 가장 뛰어난 수행으로 참선을 손에 꼽습니다. 한국의 중심종단인 조계종은 참선을 중심으로 두는 선종(禪宗)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참선에는 어떤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최상승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선에는 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지혜’의 중요성을 안다면 찌꺼기 파에서 술파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불자들은 지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혜를 갖는 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자신을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나를 바꿀 것인가, 바꾸지 않을 것인가’. 혹은 ‘이대로 만족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둘 것인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무엇을 지혜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지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실 수 있습니까.
불교는 나를 바꾸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못났다’란 생각 때문에 자신을 바꾸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얼굴을 가장 많이 바꾼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갖추어지면 스스로를 바꿀 필요도 못 느끼고 바꾸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당신 자신에게 혹은 지금 현실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이제껏 기도를 주욱 해오셨을텐데, 여러분은 무엇을 바꿔달라고 비셨습니까. 보게 해 달라고 빌 수는 있습니다.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보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보는 것’에 따라 삶을 바꿀 수도, 또 누릴 수도 있습니다. 삶을 누린다는 것은 삶을 바꿨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이번 법회에서 ‘보는 것’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한번 들어보십시오.

# “알 수 없음”이란 마음을 뛰어넘은 것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불심천자(佛心天子)라 일컬어지는 황제 양무제를 만났습니다. 양무제는 달마대사에게 “짐을 마주하고 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누구냐고 묻는 것. 이것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이 무엇이냐”하고 또 물었습니다. 이에 달마대사는 뭐라 대답한 줄 아십니까.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양무제는 그 말뜻을 못 알아 들었습니다. 서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거죠.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 전, 당시 양무제는 재정이 기울정도로 사찰을 세우고 도제양성을 하면서 불교에다 국가재정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양무제가 “이렇게 많은 공덕을 베풀었는데 그 공덕이 어떻습니까”라고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공덕이 없다”고 단칼에 대답했습니다. 공덕을 베풀었다는 것, 여기에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베푸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공덕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같이 사는 사람을 떠올려보십시오. 30~40년 같이 사니까 속된 말로 창자 속까지 모든 것이 다 보입니다. 이게 좋게 보인다는 뜻일까요 아닐까요. 아마 좋게 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양무제는 “짐이 누구냐”하고 물었고, 달마대사는 “알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보는 것이 지혜’라고 말했는데, 달마대사는 지혜가 뛰어난 분입니다. 근데 그 분이 알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알 수 없음’이라는 것은 알고 모르고의 알 수 없음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 또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말한 ‘알 수 없음’은 ‘안다’ ‘모른다’의 상대성이 아니라 마음을 뛰어 넘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알 수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창자 속까지 다 보인다고 했죠. 그럼 이것은 배우자의 문제입니까, 보는 사람의 문제입니까. 창자 속은 늘 같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어땠습니까.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같이 살아보니까 보이는 것입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에는 정성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양무제의 공덕과 같습니다. 정성에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마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신랑이 월급날이 되니 월급봉투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봉투가 너무 얇았습니다. 그럴 때면 매일 차리는 밥상도 차리기 싫어지고 상에 올라오는 반찬 가짓수에도 변화가 옵니다. 밥상을 차리기 싫어하는 그 마음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입니까. 그냥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한테 봉투를 주지 않는다고 우리가 그 사람을 싫어합니까. 아니죠? 왜냐. 나는 그 사람에게 바친 것이 없습니다.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싫어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바로 정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정성을 쏟아 부었는데 정성만큼은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성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사느냐, 무엇에 좌우되느냐. 부처님에 좌우된다는 말은 답이 아닙니다. 신에 좌우된다고 해서 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보는 데 좌우될 뿐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에 좌우되기 때문입니까. 빌딩의 소유유무 때문입니까. 빌딩을 가지고 있어 행복하다가 옆 사람이 더 높은 것을 가졌다 해면 행복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상대적 빈곤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못 살아서 못 산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보다 못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다른 집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자살률이 오늘날 같이 높았습니다. 그때도 이혼율이 지금보다 높았습니다. 그때는 그런 거 따질 여유 없이 잘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무엇에 달려있습니까. 돈입니까. 지위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 우리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에 따라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까. 바로 보는 데에 따라서 그런 것입니다. 상호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 지혜는 애초부터 있어 구할 것 없어
사람들은 “나는 지혜가 없어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지혜가 없다는 것은 볼 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있고 없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태어나면 지혜를 바로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혜가 높고 낮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 지혜가 낮은 것입니다.
‘불법(佛法) 안에서 죄업이 없다’고 하는데 죄업은 있습니다. 옥의 티만큼 말이죠. 옥의 티, 이거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죄가 옥의 티도 되지 않을 만큼 있단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슴에 손을 얹어보고 죄가 있나 없나 살펴보십시오. 보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발견해 보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모르는 것이 상위개념입니다. 잘 모르는 것이 지혜가 높은 것입니다.
옆 사람 창자까지 보인 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있다고 보느냐, 없다고 보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본다는 것, 지혜라는 것’ 이것이 무엇일까요. 불교는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지혜고, 지혜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보는 것입니다.
법문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글을 읽더라도 그냥 보면 안 됩니다. 지혜와 덧붙여서 법문을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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