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9〉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김희옥 동국대 총장

김희옥 동국대 총장 / 검찰청 부산·대전지청장, 사법연수원 교수, 법무부 차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 역임
동국대 입학이 인연의 시작
스님 강의듣고 ‘불교’제대로 알게돼
연수원교수시절 모임 ‘다르마’ 권유
‘인재양성’ 스님께 받은 가르침
‘탄허 장학금’ 제정되었으면…


-총장님도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것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우선 불교인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고향이 경북 청도의 매전면입니다. 부모님이 불자라서 어릴 적에는 부모님을 따라서 절에 자주 갔어요. 그리고 고향에서 금천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인근에 있는 고찰인 운문사와 대비사에 소풍을 가서, 어린 시절부터 절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총장님은 1968년 동국대에 수석입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탄허 스님의 인연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나요?
제가 1968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그해 5월인가 그랬는데, 탄허 스님이 동국대 중강당에서 하였던 금강경 대강연을 들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열여섯 번인가를 강의하였는데 제가 그 강의를 다 들었어요. 금강경이 32품인데, 하루에 두 품씩 한 것 같습니다. 그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주로 대학교수, 교직원, 서울에 사는 신도들이 들었어요.
제가 그때에 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기숙사에 있는 선배들도 안 들었는데, 저 혼자 그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들은 것 같아요. 그때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이었습니다. 대학선원은 지금의 제일병원 자리, 명성여고가 이전하기 전에 있었던 그 근처에 있었죠. 저는 그때 교재로 나누어 준 금강경 책을 아직도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들은 소감이 어땠는가요?
스님의 강의를 들으니깐 굉장히 감동적이었죠. 스님은 강의를 하시면 듣는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시고, 충격을 주어서 생각을 깊게 하고, 불교 이외의 것도 생각게 하셨어요. 저는 그래서 스님의 강의를 통해서 감화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 스님의 금강경 강의는 중강당의 반이 찰 정도로 청중이 많이 왔어요.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스님의 강의를 듣고, 불교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교의 본질에 대하여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선을 하면서 오는 느낌처럼, 깨달음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 경전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게 되었지요. 그때에 보니까 스님은 분필을 갖고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강의를 하시는데, 불교에 대한 어떤 내용도 막히는 것이 없으시더라구요. 불교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책을 보지 않으시고, 거의 외워서 하셨습니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확실히 전달해 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할까, 에너지 같은 것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에게는 지금도 스님의 그런 인상이 남아 있지요. 하여간에 저는 스님의 강의를 통해서 제대로 된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불교에 대한 상식, 이해는 모두 스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의 이후에 탄허 스님을 대학선원으로 찾아뵙지는 않았는가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스님은 고승, 큰스님이면서 대학선원장이셨고 저는 대학 1학년생이었기에 감히 찾아갈 생각은 못하였지요.

-탄허 스님은 동국대 이외에도 여러 절에 계셨는데, 학교 밖에서 만나시지는 않았는가요?
학교 밖에서 만나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1976년에 사법고시에 붙어서 검사가 된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씩 꼭 상원사 보궁을 가서 참배를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스님의 거처인 월정사 법당 뒤에 있는 방산굴을 찾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전검찰청에 지청장으로 있을 때에는 스님 생각이 간절해서 스님이 계셨다는 유성의 자광사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총장님이 학교를 다닐 적에는 대불련 활동이 본격화될 때인데, 참여하셨는가요?
저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권유는 받았지만 저는 대학 2학년부터는 제 전공인 법공부에 주력하였기에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였어요.

-총장님은 197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였는데, 그때 사찰에서 공부하시지는 않았나요?
했지요.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어요. 해인사 홍제암, 청계사, 회암사, 인휴사 등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탄허 스님은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요?
그거야 스님의 근황, 대담이 보도되면 주의 깊게 그 기사를 읽었지요. 그리고 스님에게서 불교 공부를 하던 때도 생각하게 되고, 스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지요.

-탄허 스님은 도의적 인재양성을 아주 강조하셨습니다. 인재양성을 해서, 그런 인재가 사회로 진출하여 우리 민족,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셨지요. 제가 보기에 총장님도 탄허 스님의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합니다.
저도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의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리고 제가 대학에 수석 입학을 하였다고 해서, 입학 직후에 동대신문사에서 저를 인터뷰하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법과이기에, 우선은 법공부를 해서 즉 고시공부를 해서 사회로 진출하겠지만 언제인가는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포부를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법 분야의 교수로 돌아오고 싶다는 것이지, 현재와 같은 학교 관리 책임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우연히 들은 것도 사실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들은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방금 전에 말하였지만, 제가 유성 자광사에 자주 간 것도 스님이 그리워서 간 것입니다. 그 무렵에 갑사도 여러 번 갔습니다.

-탄허 스님 이외에 다른 큰스님과의 인연이 있다면, 소개하여 주시지요.
대학 1학년 때 청담 스님이 풍전상가에서 하였던 삼보법회에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토요법회였는데, 청담 스님이 하신 강의를 30회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1학년 때에 봉은사에 서돈각 교수님, 그리고 동국대 불교대 교수님들과 함께 가서 판전에서 공양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때 법정 스님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법정 스님은 그 무렵 30대 후반이었는데 동국대 역경원에서 일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교수님이 제가 입학시험에서 톱을 하였다고 하니깐, 저에게 “톱은 나무를 잘 잘라야 한다”는 그런 격외의 말씀을 해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니깐 저는 그 시절에 훌륭한 스님들을 만나고, 배우게 된 것이 복이 참 많다고 봅니다.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조인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불교와 관련된 일은 없으셨는가요?
제가 사법연수원 교수로 2년간 있었습니다. 1995년 무렵, 부장판사를 하다가 연수원에를 가 보니, 기독교·천주교의 종교 모임은 있는데 불교모임은 없더라구요. 그 이전에 있었는데 흐지부지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연수생의 자료를 보고서 종교란에 불교라고 쓴 사람들을 불러서 내가 지도교수를 해줄 터이니 종교 모임을 만들라고 권유했죠. 그래서 연수생들이 종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에서 무진장 스님에게 법문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다르마법회였는데, 그 이름을 제가 지었습니다. 그 후에 학생들은 반야심경을 배우겠다고 해서, 정토회 법당이 연수원과 가까워서 법륜 스님을 초청해서 방과 후에 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그 모임은 지금까지 잘 되고 있고, 그 출신들이 전국 각지에 근무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은 공직에 있다가, 2년 전부터는 동국대 총장으로 근무하시게 되었습니다. 총장님은 탄허 스님이 고대하시던 인재가 되었고, 이제는 인재를 길러내실 중책을 맡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학교의 책임을 맡아 동국대 중흥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 인재양성을 하려고 여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미래사회를 위해서는 결국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 인재양성을 잘 하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제2 건학운동을 하는 것이 동국대를 중흥시키고, 동국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동국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학교를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총장으로 근무하면서 처음 1년간은 여러 문제를 점검하였고, 우리가 갖고 있던 인재상을 정비하였습니다. 그런 바탕 하에서 인재 동국PROJECT라는 사업을 수립했어요. 우선 이번 2학기부터 가동하고, 내년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학생들을 입학 전부터, 그리고 입학해서 졸업 후까지 전체적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인재로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공동체이니까 이런 틀 안에서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제는 구체적인 가동 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탄허 스님이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10년이나 하셨는데, 대학선원을 계승한 정각원에서는 그런 역사가 애매한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것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탄허 스님과 연고 있는 월정사, 탄허재단, 그리고 탄허 스님을 존경하는 불자들이 뜻을 모아서 저희 동국대에 가칭 탄허장학금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탄허 스님의 정신, 사상이 동국대에서 더욱 빛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뜻이 문도 스님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총장님은 탄허 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시나요?
탄허 스님을 종교 외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확실한 교육자이고, 지도자로 봅니다. 그리고 종교, 불교 내적으로 본다면 스님은 학문과 삶이 탄탄무애하시고, 거침이 없었다고 봅니다. 스님은 자신이 느끼고, 공부하고, 깨달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전달해주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재양성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총장님의 삶에서 탄허 스님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제 삶에 있어서 저는 스님을 만났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싶군요.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야말로 저의 불교는 소박하고, 단순하고, 부모님을 따라 절에 다녀서 배운 정도였죠. 그러나 스님에게서 금강경을 배운 것은 엄청난 것이었고, 제대로 된 불교를 배웠고, 그래서 내 자신이 제대로 된 불자로 성장하였다고 봅니다.

-탄허 스님 탄신 100년 기념 책자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뵌다는 말을 들었던 소감은 어떠하였는가요?
저는 스님의 탄생이 100년밖에 안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였어요. 올해가 성철 스님이 탄신 100년인데, 연락을 받고서야 성철 스님보다 1년 늦게 태어나신 것을 알았지요. 저는 탄허 스님이 더 오래된 고승인 줄로 알고 있었어요.
아마 스님은 1960년대, 1970년대에 이미 유명하셨고, 그리고 일찍 돌아가셔서 제가 그렇게 알았던 것 같아요. 하여간에 저는 스님의 가까이서 지도를 받은 것을 큰 복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저는 스님의 장자 남화경이라든가 스님의 책을 많이 갖고 있어요. 탄허 스님처럼 사는 것도 멋진 삶이라고 봅니다. 저는 탄허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불교정신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장집무실에는 저의 불교 좌우명인 수처작주(隨處作主)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았고, 또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는 아직까지도 살아 계신 대구의 화산 스님에게서 받은 유묵 2점도 액자로 하여 걸어 두고 있습니다. 이 유묵은 한암 스님의 글씨인데 하나는 중국 중봉선사의 법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암 스님이 후배 스님들을 경책하는 좋은 내용입니다.
화산스님은 제가 자주 찾아뵙는 큰스님이신데, 화산 스님은 한암 스님의 기일 날 상원사에서 이 유묵을 놓고 탄허 스님, 한암 스님의 선 수제자인 보문스님과 함께 통곡을 하였다는 비사를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님과의 인연,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스님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에게 배운 것을 잘 회향하기 위해서 저는 동국대에서 좋은 인재를 길러낼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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