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8〉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법산 스님

법산 스님 / 동국대 교수,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역임 아태불교문화연구원 원장, 동국대 명예교수
“주역은 우주의 기본 이론,
불교 공부에 도움 되는 철학” 강조
신심명·영가집 소중히 여긴 선사
〈신화엄경합론〉으로 ‘인촌상’ 수상
“탄허 스님 권유로 대만 유학”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배움을 받으셨나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석사과정)에 들어갔는데 졸업한 것이 1973년도 2월이에요. 바로 그해 1월인가, 2월이었는데 그때 스님이 석파정(대원군 별장)에서 화엄경 교정을 보고 있었어요. 왜 그런 계기가 이루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탄허 스님을 도우면서 교정을 보던 무비 스님, 연관 스님, 성파 스님하고 내가 있었는데 “우리가 큰스님을 모시고 있는데 교정만 보지 말고 탄허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말이 나왔어요. 거기에서 초발심자경문부터 이력 과정을 다시 배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석파정에서의 공부가 대원암으로 계속 이어졌지요. 그런데 나는 석파정에 상주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그 인근 세검정의 조그만 절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절에서 예불을 마치고서는, 아침 일찍 석파정으로 와서 그 공부 모임에 참여한 것이지요. 그때는 나는 동국대 강사를 할 때였어요. 그때 화엄경의 교정지를 찍어내는 사식기 기계가 석파정에 있었어요. 그 기계를 사자고 한 스님이 성파 스님이었어요. 그래서 탄허 스님이 성파 스님을 보고 조계종에서 경영이 최고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스님은 날보고 ‘석사’라고 불렀어요. 나는 대학원을 마쳤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지요. 다른 스님들은 한문만 한 스님들이어서 그렇게 부르신 것 같아요. 그때 스님을 시봉한 사람이 지금 민족사 사장인 윤창화이었고, 어떤 보살이 와서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고 그랬어요.

-탄허 스님은 석파정에서 작업을 하시다가 대원암으로 가셨는데, 대원암에서도 공부가 지속되었는가요?
그럼요, 나는 그 공부 모임이 끝났을 때까지 다녔지요. 석파정에서는 한 1년을 하였나 그렇고, 대원암에서도 오전 두 시간 정도의 공부를 한 이후에 화엄경 교정 작업을 하였어요. 그러나 나는 그때에도 세검정 절에 있었기에 숙박은 하지 않았고, 또 교정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학교로 와서 공부를 하였지요. 대원암 시절에는 범어사의 무비 스님, 지리산에 있는 연관 스님과 일장 스님, 시몽 스님 그리고 비구니로는 성일 스님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무렵 스님은 고려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어요. 그 장학금을 받던 최옥화가 대원암에 와서 스님의 일을 많이 거들어 드렸어요. 스님은 옥화가 국문과 출신이라서 문장을 잘 본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얼마 있다가 옥화가 머리를 깎고 출가했는데, 그 이름인 일초도 스님이 지어준 거지요. 스님은 옥화를 귀여워하셨습니다.

-대원암에서는 화엄경 출판의 일만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그런 공부도 하였군요. 지근거리에서 본 탄허 스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신다면.
내가 스님에게 배워 보니, 스님은 가까이서 모시기가 신심이 나는 분이에요. 스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주무시고, 새벽 2시경에 일어나셔서 참선을 하시고 그랬어요. 스님은 우리들에게 12시 이전에 한 시간을 자는 것이 12시 이후에 두 시간, 세 시간을 자는 것보다 건강에 더 효과적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스님은 가급적 일찍 주무시고 적어도 두세 시에 일어나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머리가 아주 총명하셨어요. 기억력이 대단하셨지요. 스님은 사서삼경, 노자와 장자를 완전히 외우셨어요. 그렇게 외우는 사람이 없어요. 기억력이 대단해! 그 어른은 열다섯 살에 사서삼경을 다 외웠대요. 그리고 노자와 장자도 혼자서 독파하였다고 그랬어요. 강의를 하시는데 자신만만하게 하셨어요. 기운이 펄펄 넘쳐 흘렀지요. 간혹 스님을 강사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스님의 안목은 선교일치(禪敎一致)적인 입장에서 교를 보되, 선적(禪的)인 차원에서 강의를 하셨어요. 탄허 스님의 은사가 방한암 스님이잖아요. 한암 스님이 입산 이전에 반고씨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상투를 자르고 입산하였다고 그러지 않아요. 이것은 한암 스님의 가풍이 유교에 선(禪)이 첨가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그런 한암 스님의 수제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의 선적인 가풍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볼 때 탄허 스님은 유교와 선이 결합된 최고의 정점에 있었던 분으로 봐야 돼요.
-탄허 스님은 주역에도 해박하셨지요?
그럼요. 스님은 주역에 아주 밝은 분이었어요. 스님은 주역은 우주와 세상 이치를 함축하여 말해주는 것으로 말씀하셨어요. 스님은 우리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내 마음이 하나의 우주이고, 이 우주에는 주기가 있는데 그 주기를 제대로 알아야만 나와 세상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내 마음을 제대로 알고, 그때그때 자신을 감지해서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님은 주역은 우주의 기본 이론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스님은 우리들에게 주역의 64괘(卦), 효사(爻辭)를 가르쳐 주셨고, 육효(六爻) 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아침마다 육효를 쳤어요. 그때 나는 주역 서문도 다 외우고 그랬지요.

-탄허 스님의 역사에서 대원암은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탄허 스님이 대원암으로 들어가게 된 것에는 채벽암 스님의 역할이 있었어요. 탄허 스님이 들어가기 전에, 대원암에는 덕수·덕문 스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벽암스님이 불국사 주지를 하시다가 그만두고는 선학원에 와 계셨어요. 그 무렵에 동대 이사장도 하시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 스님이 흥국사를 얻었어요. 주지를 끊었단 말이지요. 그러고 나서 벽암 스님이 탄허 스님을 보고 화엄경 불사를 하는데 적당한 절도 없이 작업장소가 그래서 되겠느냐면서 흥국사에 와서 하라고 그러신 거지요. 그래서 탄허 스님이 흥국사를 가서 보니 서울에서 너무 멀고, 교통이 나빠서 안 되겠으니 아무래도 작업 장소는 서울 시내에 있어야 하겠다고 연락을 하였어요. 그러자 벽암 스님이 대원암 덕수 스님에게 이야기를 해서 흥국사와 대원암과 교환을 하자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비구니 스님들이 흥국사로 들어가고, 탄허 스님이 대원암으로 갈 수 있었지요. 이런 것을 탄허 스님이 대원암에서 우리들이 공부할 때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노장님이 항상 벽암 스님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그러셨어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듣고 알았어도, 기억해서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탄허 스님은 화엄경 출간을 해서 인촌상을 타시고, 1977년에는 출간 기념으로 월정사에서 특강법회를 열었지요?
그렇지요. 나는 스님이 인촌상을 타신 것을 그때에 알았지만, 상을 받는 곳에는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화엄경 특강에는 나도 참석해서 두 달간을 가서 공부했어요. 그게 열리게 된 것은 대원암에 있던 스님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말에 의해서 하게 된 거예요. 화엄경 책이 나오고 나서 우리들이 책만 나온 것으로 그냥 두는 것보다 큰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자, 화엄경을 제대로 한번 보자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 그런 말이 계기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면 어디에서 하냐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월정사의 강당(서별당)이 지어져서 그것을 회향하는 기념으로 하자고 희찬 스님이 말씀하셔서 월정사에서 하게 되었어요. 나는 아직도 그때에 받은 앨범과 수료증을 갖고 있어요. 그때에는 내가 강사 시절이었는데, 추운 겨울에 가서 공부를 잘 하였어요.
-그때를 회고하여 주시지요.
두 달간 공부하는데, 우리는 매일 여덟 시간을 배웠어요. 그때 거기에서 함께 배우던 스님들은 대원암 시절에 함께 있었던 무비 스님, 통광 스님, 성파 스님이 있었고 그 밖에 봉주·능혜·관조·선과·정우 스님이 있었고 비구니도 여럿이 있었어요. 성일 스님, 그리고 지금 승가사 주지도 있었지요. 어쨌든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스님이 얼마나 열강을 하셨던지, 스님은 흑판에 모든 경전을 달달 외우셔서 판서를 가득 하셨어요. 비구니 성일 스님도 녹음을 하였지만, 나도 녹음을 하였고 여러 사람이 녹음을 하면서 강의를 들었어요. 나는 그때 스님의 강의를 통해 화엄경의 세계를 체득했어요. 화엄의 세계에서 보면 우리 인생은 태평양의 물방울, 지푸라기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처럼 화엄세계는 광활한 세계인데, 그런 세계도 한마음이 정해 준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화엄경의 철학성, 실상의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준 강의였어요. 그럴 때에 스님은 책을 보지 않고, 판서를 하면서 말씀하시는데 정말로 스님 강의를 신심있게 잘 들었어요. 아마 그런 강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할 겁니다. 탄허 스님처럼 훌륭한 분을 모시고 그런 강의를 하였다는 것은 근세에 있어서 없지요. 정말 기념비적인 공부이고 법회였어요. 나는 그 무렵에 스님이 삼보법회에서 하였던 원각경 강의도 들었지요.

-탄허 스님은 보조사상을 무척 강조하셨지요?
그렇지요. 나는 대만에 유학을 가기 전에는 인도철학과 출신이라 인도철학과에서 강사로 있었는데 유학을 갔다 와서는 선학과 교수가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선학과 교수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면 나는 내가 대만유학을 간 것, 그리고 보조사상을 연구해서 박사를 받아서 선학과 교수가 된 것을 자세히 말해 주지요. 나는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내가 탄허 스님의 전도사예요. 나는 강의시간에 어른 말을 항상 잘 들어야 하고, 모든 일에 어른의 말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어요. 나를 봐라, 내가 대만에 가서 공부하라는 탄허 스님의 말을 듣고 교수가 되었다는 말을 하였지요. 내가 대만에서 공부하다가 방학 때에 귀국해서 학하리로 탄허 스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스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어서 들어오라”고 대단했어요. 그리고 나를 칭찬해 주시면서 스님이 ‘향상일로(向上一路)’를 써 주셨어요. 그 말미에는 법산상인(法山上人)에게 준다는 것이 써 있지요. 그 유묵의 액자는 동국대 나의 교수 연구실에 늘 걸려 있었지요. 그리고 내가 대만에서 홍법원이라는 절을 만들었거든요. 스님은 그 홍법원의 현판 글씨도 써 주셨어요. 내가 홍법원의 개산조인데, 지금도 스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어요.

-법산 스님에게는 탄허 스님의 영향이 상당하였군요.
내가 대만에 가서 공부하면서 탄허 스님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스님의 글씨에 대한 것이 이야기가 나왔지만 어떤 사람들은 탄허 스님의 초서 글씨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대만에 가 보니, 대만의 우이임이라는 유명한 서예가가 있는데 그 사람은 중국 서예의 종점에 있다고 평을 듣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글씨는 힘이 넘치고 그런데, 탄허 스님의 글씨와 닮은 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탄허 스님이 학문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서예 예술의 세계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탄허 스님은 선교를 일치하는 학문세계에다가 예술세계가 결합된 정점에 도달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탄허 스님을 이렇게 봐요. 나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해요. 그래서 나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탄허 스님을 모시고, 재발심해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내가 1986년에 귀국하기 이전에 스님은 1983년에 돌아가셨어요. 방학 때에나 귀국한 이후에 오대산 방산굴을 가 보았는데 나는 많이 서글펐지요. 탄허 스님은 교학을 가르치시면서도 늘 사서삼경이나 노자와 장자를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내가 대만에 가 보니 대만의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부 노장학, 사서삼경의 과목이 다 있어요. 일반 중국인에게 다 배우게 하였어요. 그래서 나도 대만에서 주역, 노자, 장자를 다시 배웠는데 그렇게 다시 공부하면서 탄허 스님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지요. 중국에도 이런 어른(탄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대만의 그 많은 선생 중에서 탄허 스님과 같은 어른이 없었어요. 탄허 스님의 말씀, 강의는 불교의 참선을 하고 나서 딱 나온 것의 핵심, 종지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스님이 노자, 장자의 도교사상과 선학을 일치시켜서 나온 그 기풍은 마음에 탁! 와 닿는 것이었지요. 내가 이런 것을 대만에 가서 공부하면서 철저히 알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나는 탄허 스님을 재인식하게 되었어요.

-탄허 스님의 개인적인 기질은 어떤가요?
스님은 기(氣)가 있어요. 그래서 판소리, 창, 국악을 좋아하셨어요. 월정사 특강할 때에도 조상현, 안숙선, 신영희 등을 불러서 소리를 들었지요. 이것은 멋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멋쟁이였어요.

-탄허 스님의 정체성이라고 할까, 특징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나는 탄허 스님을 강사로 보면 안 된다고 보지요. 그 스님은 선교(禪敎)를 겸한 어른이십니다. 교학적으로는 유불선을 통달하셨어요. 비록 그 어른이 논문을 쓰시지는 않았지만, 학문적인 체계는 완전히 갖추셨다고 나는 생각해요. 스님은 단순한 강백이 아니셨어요. 강의 도중에도 선적인 것을 잊지 않으셨어요. 탄허 스님의 은사가 방한암 스님이 아닙니까?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일제시대에 최고 선사(禪師)로 이름을 날린 스님이잖아요. 그런 스님의 정통을 이은 분이 탄허 스님이신데, 스님이 선을 안 했고 모른다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스님은 신심명과 영가집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참선을 하더라도 장자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하여간에 스님은 선에 해박하셨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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