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1931년 선학원의 재건과 선의 대중화 (2)

선학원, 1931년 〈선원〉 창간
한국 禪 가치 재조명… 의미 커
수좌 배척 상황 극복 노력
맹신적 기복신앙에 경종 울려

일제 심전개발운동 등 비판 제시
민족불교 전통성 수호·중흥 도모
1930년대 치열한 수행현장 담아
선학원 역사 기록 역할도


▲ 1935년 선학원에서 간행한 〈선원〉지 4호〈사진 왼쪽 위〉와 2013년 6월 간행된 〈선원〉지〈사진 왼쪽 아래〉. 선학원〈사진 오른쪽〉의 기관지인 〈선원〉지는 민족불교 중흥과 선 대중화라는 초기 설립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선원(禪苑)〉지는 선학원의 기관지이면서 대중지이다. 1931년 10월 6일 창간해서 현재 통권 208호에 이르고 있다. 선학원의 설립정신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침체된 선의 중흥과 대중화에 있었다면 〈선원〉지의 성격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는 신령스러우면서 깨닫고, 고요하면서 비추는 일물(一物)을 가르쳐서 혹은 불(佛)이라 하고 혹은 여래(如來)라 이르며, 선종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서 혹은 일영(一靈)의 진성(眞性)이라하고 혹은 열반(涅槃)의 묘심(妙心)이라하는 바 선학의 공부로써 이 한 물건을 발견하고 포착(捕捉)하는 미묘한 이치가 지극히 간단하고 쉽고, 지극히 밝고 명료하여 곧바로 믿고 깨달으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다. 그러나 이런 이취(理趣)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붓으로 써보지 않으면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본래부터 문자에 서투른 선학의 수자(修者)라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침묵하고 지키기만 할 때가 아니어서 본지를 세상에 보내게 된 것이다.

1931년 〈선원〉지의 창간사다. 선학이 훌륭하고 미묘한 이치가 많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일물(一物)’을 입과 붓으로 보이기 위해 〈선원〉지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선 수행을 비롯한 선학의 침체를 대중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선원(禪院)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여 홀대하고, 대처풍조의 만연으로 독신수좌들을 배척하는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참동안 과학만능을 부르짖는 것이 높아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을 말하지 않으면 행세할 수가 없고 막스의 유물론(唯物論)을 입에 걸지 않으면 사람노릇을 못하는 것같이 떠들더니 이제는 그런 시대가 벌써 지나가고 말았다. … 유물 만으로만 살 수 없음을 각성(覺醒)하는 자가 많으니 어찌 유물주의에만 항상 걸려있을 것인가. 그렇게 철석같이 굳은 것처럼 사납게 날뛰는 주의자들도 이제는 대부분 사상전환기에 들어서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인생다운 사람의 길을 밟으려고 한다.

〈선원〉지 4호(1935)에 실린 김태흡(金泰洽)의 글이다. 진화론과 유물론이 유행하고, 그것을 근간으로 한 불교개혁론과 유신론이 불교계를 휩쓸었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오히려 종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맞이한 불교계의 변질, 새로운 사조(思潮)의 수용, 전통불교에 대한 반성과 개혁,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질주하고 있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사실 당시 불교계는 이전의 탄압과 소외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는 듯 ‘개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대신 정체성이라는 본분사와 부처의 골수를 부수는 핵심은 놓쳐버린 것이다. 쭉정이들만 반짝했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선원〉지의 창간은 결국 선학원의 설립목적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불교계가 맞이하고 있었던 혼란과 위기를 지적하고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선방에서의 수행이 주지가 되기 위한 위조증명서 한 장으로 대체되었던 선에 대한 경시풍조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원〉지 창간호부터 4호까지 글을 쓴 필진은 약 36명이다. 이 가운데 주요 필진들은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과 선학원 설립을 주도했던 한용운·백용성 등이었으며, 방한암·박한영·권상로·김태흡과 같은 당대의 고승과 지식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박한영(朴漢永)은 권상로·한용운과 함께 당시 불교개혁론의 대표 인물이었지만, 불교가 지닌 근본정신의 진면목을 기초로 시대변천과 문명사조의 세례를 유의해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백용성 역시 8편의 글을 실었는데, 화두의 개념과 참구의 방법을 소개했으며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중심으로 한 화두풀이에 대한 강화(講話)였다. 선의 중흥을 위한 대중화를 염두한 글이었다.

한편 김태흡은 〈선원〉지를 통해 ‘심즉시불(心卽是佛)’·‘선(禪)의 인생관’과 같은 선에 대한 기초적인 논설을 썼지만, 당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에 대한 비판적인 글도 소개하였다. 예컨대 그는 〈선원〉4호에 소개한 ‘심전개발과 선의 대중화’라는 글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심전개발운동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목적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정책에 순응하게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만드는데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 불자는 무엇보다도 해탈의 경계를 얻어 대중을 위해서 노력하려면 먼저 참선이 필요하다. …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일을 하려면 먼저 선을 연구해야 할 것이요, 선을 연구한다는 것보다도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할 급무(急務)이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이상엔 능히 남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참된 사람이라 한다.
 

위의 글은 풍고(風皐)라는 필명을 지닌 이의 글이다. 김태흡이 당시 불교계가 맞이하고 있었던 모순과 침체를 시대상황을 기초로 비판적인 글을 썼다면 풍고는 선수행의 당위성과 같은 원론적인 글을 통해 선의 중흥을 모색했다.

〈선원〉지는 이밖에 선사상과 중국선종사, 불교교리와 함께 시와 소설을 망라한 불교문학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1931년 재건 직후 선학원의 대내외적인 활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선학원일기초요(禪學院日記抄要)’를 통해서는 1931년 침체를 딛고 일어선 재건기의 활기찬 움직임을 소개하였다. 다양한 법회와 스님들의 치열한 선 수행, 부인선원을 중심으로 한 일반신도들의 수행과 포교활동을 전하기도 하였다.

‘지방선원소식(地方禪院消息)’이나 ‘조선불교계의 선원과 납자(衲子)수의 통계’는 1921년 선학원의 설립이후 그 관심과 지원으로 침체된 선원이 부활하고 체계적인 수행여건이 마련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해를 거듭할수록 선원과 수행납자의 수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선원〉지 4호는 1934년 선학원이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아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확대 개편된 여러 가지 사정을 수록하고 있다.

예컨대 중앙선원을 전국 선원의 모범선원으로 지정한 점이나 선종중앙종무원(禪宗中央宗務院)·재단법인(財團法人)·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朝鮮佛敎中央婦人禪院) 등 산하기관의 활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결국 선학원의 〈선원〉지 창간은 한국근현대불교사에서 몇 가지 적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선학원이 표방했던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당시 불교계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간행물이 너도나도 불교개혁과 같은 시류를 부르짖을 때 본분사에 충실했고 구현하고자 진력한 것이다. 당시의 시선으로는 시대를 거슬러가는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둘째, 선의 대중화에 앞장선 점이다. 이른바 주지전횡, 왜색불교 만연의 영향으로 선방의 수좌들은 소위 밥값 못하는 부류로 인식되었고, 선원은 황폐화되어갔다. 〈선원〉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선이 지닌 가치와 실질적 효능을 대중들에게 소개하여 당시 한국불교가 지닌 모순과 왜곡을 바로잡고자 진력하였다. 특히 맹목적인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젖어있던 신도들은 선(禪)을 통해 불교와 수행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지금도 〈선원〉지는 선학원의 설립정신을 의연하게 이어가고 있다. 지면을 통해 그 성숙과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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