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 아끼는 마음 잔잔하게 전해져
초의 스님, 1843년 봄 제주 방문
제주목과 망경루서 글재주 겨뤄

▲ 초의가 제주를 떠날 무렵 추사로부터 받은 편지인 〈주상운타첩〉
초의가 벗을 찾아 제주로 향했던 시기는 대략 1843년 늦은 봄으로 짐작된다. 이런 사실은 이 해 여름, 그가 제주 목사 이원조와 어울려 지은 〈제목이공색시차망경루운(濟牧李公索詩次望京樓韻)〉에서 확인된다. 그가 차운(次韻)했던 망경루는 제주목의 관아 객사였던 영주관의 부속 건물이다.

현재 제주 북초등학교 동쪽 삼도2동에 위치했던 이 관아는 세종 16(1434)년 화재로 유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후 거듭 증, 개축되었는데, 관덕정, 홍화각, 연희각, 우연당, 영주협당, 외대문, 귤림당, 동대문, 망경루, 회랑 등이 어우러진 제법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유실되어 관덕정 건물만 남았던 것을 1999년~2010년 제주 관아 일부가 복원되면서 망경루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된 셈이다. 바다 건너 임금이 계신 곳, 궁궐을 바라보며 군신의 지중한 예를 갖추었던 장소, 망경루는 바로 제주에 부임했던 관리들이 임금을 향한 충정을 드러낸 누각이다. 초의 또한 이 망경루에서 제주목 이원조와 한바탕 글재주를 다투던 곳. 이런 아회(雅會)도 잠시 초의는 제주에서 상흔(傷痕)을 입는다. 말을 타다 입은 상흔은 객승 초의를 고달프게 했던가 보다. 그가 제주를 떠날 무렵 추사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이러한 전후의 사정을 담았던 편지가 〈주상운타첩〉에 수록되었다가 세상에 드러냈다. 〈완당문집〉 ‘여초의’에도 누락된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돌아 온 인편에 그대의 편지가 있어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것이 오히려 오랫동안 이어져 빨리 암자로 돌아가 한가롭고 편히 지내는 것만 못합니다. 고달픔에 지쳐서야 떠나게 되는군요. 이 또한 망상이겠습니다만 한 일 년 쭉 머무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 다만 돌아간 후에 따로 절룩거리는 원숭이 같은 몸을 치료하시고, 그런 후에야 온 몸이 편하고 마음대로 움직여져서 쓸모없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말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다. 희극일 뿐입니다. 오직 순풍에 뱃길이 여의하시길 바랍니다. 이만 1843년 9월 6일 륵 (便回禪存甚慰 所苦之尙爾彌延 不如?歸庵中任其偃仰 至於曳病來別 是又妄想 一以截住爲佳 但於歸後 ?治跳猿 然後百骸無不便利 至若蟲臂任化 何足計爲此言書出 戱劇而已 惟冀風順帆吉 不宣 癸卯九月六日) 

 당시 초의의 고달픈 정황은 “고달픔에 지쳐서야 떠나게 되는군요”라고 한 추사의 증언을 통해 짐작된다. 당시 초의는 상흔이 다 아물기도 전에 제주를 떠나야했던가 보다.
곤란한 상황에서 제주를 떠나야하는 벗을 위해 “고통스러운 것이 오히려 오랫동안 이어져 빨리 암자로 돌아가 한가롭고 편히 지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한 추사의 위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간파한 그다운 처방이다.

한편으론 오래도록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 그의 마음은 “이 또한 망상이겠습니다만 한 일 년 쭉 머무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라고 한 것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풍자와 희언을 구사했던 추사의 언행 속에는 해학을 넘어 잔잔한 애상(哀傷)이 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희극일 뿐입니다”라고 한 추사의 말 속엔 유배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 그의 말처럼 “돌아간 후에 따로 절룩거리는 원숭이 같은 몸을 치료하시고, 그런 후에야 온 몸이 편하고 마음대로 움직여져서 쓸모없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한 충언엔 벗을 아끼는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져 읽는 이의 콧등을 아리게 한다. 충비(蟲臂)는 자잘해서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을 말한다. 초의의 상흔은 그런 것이다.

1843년 9월 경, 뭍으로 돌아가는 초의에게 순조로운 바람, 뱃길도 여의하길 빌었던 추사였다. 지기(知己)이란 바로 이런 성의를 서로 전하고 느껴지는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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