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7〉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서우담 거사

서우담 / 도서출판 교림 대표 월정사 입산, 삼덕사 주지 등 역임
막힘 없는 답변에 대처승 합장
동경대서 日人 60명 강의 듣고 큰절
관선 동국대 다시 찾아 넘겨줘
“마지막 갈때 공부의 힘 나온다”
석달 전부터 열반 준비

-탄허 스님은 양청우 스님과 친하였는데, 대흥사에는 안 가셨나요?
청우 스님이 대흥사 정화를 할 적에 대처승 박영희 스님에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청우 스님이 그런 고생을 할 적에, 대불련의 법회를 대흥사에서 1주일간을 하였지요. 그때 박영희 스님이 탄허 스님을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하고 나서는 협조를 하였던 일이 있어요. 그때 탄허 스님이 대흥사 큰방에서 강연을 하는데, 대처승 쪽의 강사급 승려가 30여 명이 와서 들었어요. 흑판 강의를 하였는데, 그때 만약 탄허 스님이 강의를 못하고, 대처승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으면 죽인다는 그런 말도 나왔어요. 그때 12인연법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는데, 대처승 강사가 그 배대법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 스님이 즉각적으로 답변을 하는 등 기가 막히게 강의를 하니 강의를 마치고 나자, 대처승들이 전부 일어나서 탄허 스님에게 합장을 했어요. 그 후로는 양청우 스님이 대흥사에서 탄탄대로로 살았어요.

-탄허 스님은 1970년에 화엄경을 번역하신 것을 갖고, 부산 삼덕사로 가셔서 교열 작업을 하셨는데 이런 일에 거사님이 관여하셨지요?
제가 그 무렵에 만행을 다니다가 무량사에 있었는데 어느 수좌로부터 탄허 스님이 출판 작업을 진행하시지 못하고 영은사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부아가 나서 당장 부산으로 가서 송정에 있는 삼덕사의 창건주 보살을 만나서 내가 탄허 스님을 모시고 화엄경 출판 준비 작업을 해야 하겠는데, 절을 빌려달라고 해서 약속을 받고는 스님에게 가서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강릉택시를 영은사로 불러 대절을 해서, 그 택시에 원고를 싣고 부산으로 가서 작업을 하였지요. 그때 스님은 기분이 좋으셔서 택시 안에서 어깨춤을 추시고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스님을 모시고 가니까 주위에서 나를 비방하는 말이 많았어요. 당신 상좌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따라가냐고 그랬어요. 그때 스님은 나는 그 놈이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희다고 믿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온 것이지요. 부산에 가니까 스님이 통도사의 경봉 스님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해서, 극락암에 갔다 왔어요. 그러니까 경봉 스님이 부산 법회에 가셔서 탄허라는 도인이 부산에 왔으니 친견을 하라고 하시면서 탄허가 죽으면 한국불교가 죽는다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동아일보사 부산지사장을 하던 정준기라는 사람이 TBC방송의 부산사장을 불러서 탄허 스님을 인터뷰하는 방송을 내보내게 했어요. 그래서 논설위원이 진행하는 프로에 스님과 내가 나가서 대담을 하였어요. 그걸 보고 유력한 보살 몇 명이 찾아왔고, 이런 영향으로 인해서 삼덕사라는 조그만 절에 버스가 50대가 왔어요. 그 산골짜기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그랬어요. 해운대부터 송정까지 버스가 가득하였으니 장관이었지요. 한암 스님의 상좌인 조용명 스님이 그때에 울산 문수암 주지를 하셨는데, 탄허 스님을 찾아오시고 나에게는 돈 30만 원을 주면서 그 돈으로 화주 활동비를 하라고 주셨지요. 그때 돈 30만 원은 무척 큰 돈입니다.

-탄허 스님은 부산에서 화엄경 화주를 만나고 그랬지요?
그때 저는 스님에게 교정을 시작하였으니 해인사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허락을 받고서 해인사 장경각에 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개인 기도라 받아줄 수 없다고 그래요. 그러나 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장경각 입구에 거적을 깔고 3만 배를 시작했어요. 일타 스님 처소 옆에 있는 현호·법혜 스님 두 분이 쓰는 방의 다락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하였지요. 내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일타 스님이 감동을 해서, 대중회의에서 개인 기도로 볼 수 없으며 탄허 스님의 작업은 신라 원효 이래 1300여 년 내 쾌거인바 이 불사를 위한 기도를 허락해 주자고 해서 장경각 문이 열렸어요.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 나서 나는 성철 스님에게 가서 인사를 했어요. 성철 스님은 장하게 기도를 하였다고 격려를 해주셨지요. 그 길로 나는 탄허 스님에게 바로 가질 않고, 부산 해운대관광호텔 사장이 생각이 나서 탄허 스님의 불사에 화주를 하라고 권유했지요. 그랬더니 그 사장은 즉시 하겠다고 하면서 약정 액 500만 원 가운데 우선 100만 원의 어음을 끊어 주었어요. 이렇게 제가 기도한 효과를 보았지요.

-그러면 최근에 나온 장자 남화경은 어떤 원고에 의해서 나왔나요? 거사님은 탄허 스님이 1941년에 쓴 원고를 갖고 하였다고 주장하지요?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스님의 장자를 번역한 친필 원고를 갖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장자 원고지를 왜정 때부터 쓰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원고의 철자법도 아주 오래된 것이고, 이 원고에 나오는 강술, 대의, 구두 등에서 이런 번역은 40년대 번역이라야 맞다고 나는 자신해요. 그리고 어디에 보니깐 당신이 27세인가에 했다는 표현을 제가 봤어요. 그리고 내가 스님에게서 스님이 장자를 보게 된 것은 한암 스님의 밑에서 이력을 7년 보고 나서, 한암 스님의 승락을 받아서 장자를 보았는데 천 독(千讀)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윤고암 스님이 나에게 그랬어요. “느그 스승이 아주 지독하다, 장자를 손에 들고 천 독을 했다”는 말씀을 했어요. 또 내가 탄허 스님에게 질문을 했지요, “스님 장자 그것을 혼자 읽었습니까” 하였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아니지, 내가 석사(釋辭)를 했지. 한암 스님이 날보고 수좌들에게 설명을 하라고 해서 하였어.” 그러니깐 방선시간에, 한 철(3개월) 동안 그때 쓰신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스님은 유교와 불교를 공부한 힘을 갖고, 장자를 자득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한암 스님은 장자가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가섭보다 부처님의 수제자였을 것이고, 공자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안연보다 공자의 수제자였을 것이라는 말을 탄허 스님에게 하였다고 그랬어요. 한암 스님이 그렇게 장자를 칭찬하면서, 우리 수좌들도 꼭 장자를 읽어야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말을 탄허 스님이 법문에서 많이 했어요.

-한암 스님의 장자에 대한 발언은 귀한 증언입니다. 화제를 돌려서 탄허 스님이 일본에 가서 특강을 하였지요. 그 내용을 아십니까?
일본에는 두 번 가셨는데, 내가 모시고 간 것은 홍은사 시절이지요. 한 열흘 있었지요. 가신 것은 난암 스님을 만나러 가셨는데 능가 스님이 모시고 가셨어요. 처음에 가실 적에는 영암스님도 같이 가셨지요. 내가 모시고 갔을 때에 일본 동경대에 유학을 가 있던 김지견 박사가 홍법원에서 만났는데, 시간이 나서 김지견의 논문을 교정해 주셨어요. 교정이 끝나고 나서 김지견이 동경대 화엄학연구소에 대한 말을 해서 특강을 하게 되었지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 먹고 하루 종일 하셨는데 60여 명이 들었어요. 들은 사람들은 전부 노인인데, 선비들이지요. 통역은 김지견이 하고, 스님이 강의를 얼마나 멋지게 하셨는지 강의가 끝나니까 사람들은 전부 의자에서 나와 땅바닥에서 절을 하였어요. 중간에 일본 사람들이 질문도 하였고. 스님이 홍법원에 와서 “그 사람들이 총칼을 들이밀어도 탄허에게 절을 하지 않을 사람인데, 나에게 꿀려서 절을 하였다”는 말을 하셨어요. 그때 스님이 나에게 여러 차례, 거듭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었을 때 답을 못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안 와, 그러니 언제든지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것은 하루아침에 역량은 쌓아지지 않으니, 평소에 노력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지요. 즉 언행일치를 하고, 헛소리를 하지 말고, 필요한 말만 하고 적재적소에서 말을 하라고, 말을 줄이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말이 귀양 간다는 말을 하셨지요.

-박정희 대통령과 스님과의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만.
동국대가 관선이사로 넘어가 있을 때, 박대통령의 장모가 탄허 스님 같은 사람이 동국대를 운영해야 동국대가 잘될 것이라고 해서 스님이 청와대에 가서 박대통령을 만나 동국대를 다시 찾아온 거예요. 스님이 박대통령을 만나서 동국대를 인수하는 서류를 들고 온 것이지요. 그러나 스님은 그 서류를 동국대에 던져주고는 오대산으로 들어가셨어요. 그 말을 들은 박대통령이 속았다는 말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부처님 것이 남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다시 찾아온 것뿐이다”라고 하였어요. 이 이야기를 내가 스님에게 여러 번 들었고, 주변 사람들도 많이 들었어요. 그 후에도 스님은 동국대이사장, 총무원장 말이 나올 때마다 거절하셨지요.

-탄허 스님은 화엄사상을 불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셨어요. 스님이 보신 화엄사상을 쉬운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그것은 화쟁사상으로 말할 수 있어요. 담마기금(擔麻棄金)이라는 말이 조사어록에 많이 나옵니다. 삼장사가 혼자서 100리 길을 걸어가다가 산의 길에서 금덩어리를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삼장사는 금을 보고서도 지금까지 삼을 지고 온 고통, 정성을 잊지 못하고 금을 줍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이 비유하였고, 탄허 스님은 8만 4천 경을 삼으로 보시고 화엄경을 금덩어리로 보시면서 화엄사상을 강조했어요.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아난에게 유의경에 의지하라고 하였는데, 유의경이 화엄경이지 않습니까.

-스님의 유불선 회통하는 정서와 성철 스님의 참선 위주, 보조 배격과는 차별이 있지요. 탄허 스님이 성철 스님을 비판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비판까지는 아니고, 강의하실 때 누가 돈오돈수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이런 비유는 하셨어요.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에는 더듬거리니깐 실수를 안 하는데, 장님이 눈을 뜨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런다고 했어요. 돈수라고 해도 점수인 보림을 항상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지요. 깨친 가운데에도 보림을 못하면 도로 흐려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리 가르치셨어요. 탄허 스님이 계실 때에는 성철 스님이 그리 심하게 말을 안 하시다가, 돌아가니까 돈오돈수를 강조하고, 보조를 미워하고 그랬지요. 성철 스님이 계실 적에는 해인사 강원에서 도서, 절요를 못 가르치게 하였잖아요. 그래서 학인들이 통도사나 범어사에 다시 가서 그것을 배웠지요. 묘엄 스님도 사집반에서 그것을 빼고 가르쳐서, 일부 학인들은 운문사로 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특설반이라고 해서 거기서 도서, 절요를 다시 가르쳤지요.

-탄허 스님은 입적하실 때에 당신이 가는 일자를 미리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래요. 스님은 65세 때에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수술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지요. 그때에 스님은 의사에게 “병이 나 탄허를 못 잡아간다”고 하시면서 나는 일흔한 살 음력으로 4월 23일 유시에 간다고 예언을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3개월밖에 못 산다고 말한 의사에게 내가 3개월 후에 가면 당신은 천하의 명의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사직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의사는 아무 말을 못했어요. 스님은 평소에 등운봉 선사, 환계 지안 선사, 보조 국사를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이 스님들은 죽음을 자유자재로 하였지요. 등운봉은 물구나무를 서서 갔고, 지안은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갔고, 보조는 백문백답을 하고 툇마루 끝에서 갔지요. 이렇게 스님은 세 스님을 존경하면서 용무생사(用無生死)를 하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노상 법문에서 강조했어요. 스님은 어떤 놈이 공부를 얼마나 하였는지 모른다, 마지막 갈 때에 공부의 힘이 나온다고 하셨어요. 용무생사는 보조어록에 나옵니다. 한암 스님도 그렇게 가신 것이고, 탄허 스님도 그리 가신 것입니다. 저는 갈 때 가봐야, 공부 힘이 나타난다고 봐요.

-입적의 순간을 회상해 주세요.
스님은 가시기 3개월 전에 저를 진관사로 불러서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한양대병원에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가자고 해서, 방산굴에 도착하니까 밤이었어요. 하루를 주무시고, 방산굴에 50~60여 명이 모였지요. 스님이 말한 입적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환원이라는 시봉하는 상좌가 궁금하여 스님에게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스님은 “멍충한 놈 그럼 몰롱하냐” 그랬지요. 그 후에 그 스님이 스님에게 “스님 이제 법연(法緣)이 다한 것 같습니다. 한 말씀 해주세요” 하자, 스님은 “일체(一切) 무언(無言)”이란 말씀만 하셨지요. 그 후에 몇 시냐고 하셔서 제가 “유시(酉時)입니다”라고 하자, 얼마 후에 큰 숨을 몰아쉬고는 그대로 가셨지요. 저는 스님들이 탄허 스님처럼 공개적으로 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러니까, 스님은 평상시에 “나는 당대 일을 하지 않는다, 명전천추(名傳千秋)하는 일만 하겠다”고 했어요. 즉 천추에 전해지는 것만 하겠다는 뜻이지요. 이 말을 가끔 하셨어요. 달리 말하면 스님은 종합적인 면에서 대종사이셨고, 유불선 모든 분야에서 대종사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스님은 강의를 하시면 유교, 도교, 불교를 동시에 말씀하셨어요. 강의를 듣는 사람이 다양하니까 그들에게 알맞은 것을 다 들려주고, 마지막으로는 불교를 이야기하시면서 마음, 참선 같은 것을 알려 주었지요. 스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사명감을 갖고 왔다. 그렇지 않고서 초심으로부터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을 간행하겠냐”고 하시면서, 당신은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 왔다고 하셨어요. 이 말이 스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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