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혜민 스님 법회 진행

빡빡한 스케줄 뚫고 법회 응해
올해 3천명 이상 신도 몰려 ‘성황’

▲ 한북 스님/ 대구 보성선원 주지
우리 절집에서 ‘엄친아’라고 하면 딱 한 스님이 생각난다. 혜민 스님! 인물 좋고, 인상 좋고, 언변 좋고, 글 잘 쓰고, 학벌 좋고, 미국의 대학교수니까 직장(?)도 좋아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지금까지 220만 권 넘게 책이 팔렸다고 하니, 수입도 여간 좋은 게 아니다. 게다가 인간성도 좋고 예절까지 바르다. 한국에 들어오면 전화라도 지인들에게 꼭 인사한다. 난 혜민 스님이 사랑스럽고 예뻐 죽겠다.(그렇다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진 말라.)

혜민 스님을 소개한 사람은 내게 단체영화 관람을 권했던 울산 해남사 만초 스님이었다. 2010년 여름이었는데 해남사에서 혜민 스님 초청법회를 했더니 신도들이 아주 좋아하더라면서 우리절에서도 한 번 해보라고 권했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이 생긴다고 했던가. 선배 말을 들어도 그렇다. 그래서 2010년 8월 15일과 이듬해 8월 14일에 법회를 했다. 첫 해엔 330명이, 2011년엔 230명이 참석하였고 반응도 좋았다.

작년 6월 11일, 혜민 스님이 여름방학이어서 귀국했다고 전화를 했다. 당시는 혜민 스님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교보문고에서 10주 연속 1등을 하면서 인기가 상한가를 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올해도 오셔야죠”라고 말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스님, 제가요~ 올해는 가기 힘들 것 같아요. 아시겠지만 제가 요즘은 너~무 바빠서 마치 연예인처럼 스케줄이 잡혀 있어요.” 혜민 스님은 귀여운 콧소리로 말했다. 흉내를 낼 수 없어서 유감이다.

“알지, 다 알아요. 그래서 이야긴데, 작년까지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스님을 초청했지만 올해는 스님 시간 날 때 오면 돼요.” 혜민 스님이 수첩을 뒤지는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날을 잡아주었다.

나는 행사 한 달을 앞두고 대대적인 광고ㆍ홍보에 들어갔다. 대구불교방송 광고를 하루 열 번 이상 내보냈고, 불교방송 기획팀장이 불교카페 수십 군데에 글을 올렸다. 지방언론사 기자간담회 자리를 마련하여 혜민 스님 초청대법회 이야기를 하였더니 며칠 후 신문마다 큼직한 기사가 실렸다. 현수막 40장을 달았고, 두 군데의 전자게시판을 활용하여 하루 종일 광고를 내보냈다. 1만장의 인쇄물을 모든 신문에 끼워 뿌렸다.

7월 24일, 그날은 섭씨 35도로 무척 더웠다. 얼마나 청중이 얼마나 모였는지 아마 부처님도 모를 것이다. 불교방송 관계자는 “돌아간 사람까지 더하면 4, 5천 명이 넘는다”고 큰소리쳤지만, 나는 “설마 그 정도야 되겠느냐”며 3천 명으로 깎아내렸다. 경내에는 더 들어올 자리가 없었고 주변 도로는 백화점 오픈하는 날처럼 마비되었다. 교통경찰 여러 명이 애를 썼지만 밀려드는 차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혜민 스님 덕분에 우리절이 널리 알려졌다. 1년이 지난 요즘도 새로 등록하는 신도는 한결같이 말한다. “혜민 스님 법회 때 왔었어요.”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쉬고 있는 요즘, 혜민 스님은 관공서와 기업으로, 군부대로 숨 가쁘게 다니면서 부처님의 법을 전한다. 그런데도 그를 폄하하는 스님과 불자들이 가끔 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불자를 제외하고 이 시대에 어느 누가 스님의 말에 귀 기울입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혜민 스님은 귀한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 말했다. “혜민 스님의 녹음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방송을 볼 때도 눈물을 흘렸어요. 스님은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처럼 나의 아픔을 잘 알고 위로해 줘요.”

이처럼 대중의 근기에 맞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엄친아 스님이 올해에도 우리절에서 법회를 하기로 했다. 가을 무렵, 그날 땀을 뻘뻘 흘리며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던 ‘사랑 실은 스님 짜장’의 운천 스님을 또 초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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