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철 사는데 좀 웃으면서 자유스럽게 사세요

▲ 그림 최주현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 모습과 우리들 모습이 둘이 아니다.
생명도 둘이 아니다. 마음도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 높이 보지도 말고 내려다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너와 같이만 생각해라.
그러면 자기가 자기 죽일 수 없고 자기가 자기 나쁘게 할 수 없으니
모든 게 평화롭고 즐겁고 자유롭다.



질문자1(외국인 여):
만약 어떤 다른 사람이요, 자기에 대해서 나쁜 생각과 나쁜 에너지를 계속 내뿜어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데 그 생각이 계속되니까 몸도 좀 아프고 그런 영향을 계속 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큰스님: 그거는 모두 사람의 사량이에요. 사량에서 생기는 마음이에요. 체가 없는 내 마음은 이 허공과 같아서, 즉 말하자면 그쪽에서 마음내는 것도 영이고 내 마음 가진 것도 영이에요. 영에다 영을 넣으면 몇이 되나요? 수많은 영을 영에다 집어넣어도 하나도 없어요. 그게 없애는 방법이에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한 번 더 하는데, 마음은 체가 없어서 어떠한 말을 했든지 어떠한 에너지는 뺏어 가더라도, 정신력은 뺏어 가더라도 그건 못 뺏어 가요. 왜냐하면 내 마음이 그 자기의 주처가 완전히 섰다면 절대로 뺏어 가고 뺏어 올 수도 없는 거죠. 예를 들어서 마음이 이런 물질이라면 되는데 물질이 아니고 형상이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어떠한 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모든 거를 그 형상이 없는 나한테, 공에다가, 즉 말하자면 공심에다가 모든 거를 놓고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그 사람도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어.’ 한다면 그게 그대로 무효가 돼 버려요. 그건 자기가 생각에 그렇게 올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할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그게 반영이 되는 거죠. 이루어지는 거죠. 아시겠습니까?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도 걱정할 일이 없어요.

질문자2(여): 스님께서 심성과학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의 모든 것이 그 마음에서부터 나오고 마음에서 다 창조를 하나요?
큰스님: 그렇죠. 마음이 떠나고는 절대 이거는 허용되지 못하니까요. 이 마음으로 인해서 보는 것도 보고, 동시에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을 움죽거리고 이러죠. 근데 그 마음이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살라고 그 많은 말들을, 그 많은 생각들을 다 자유롭게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생각지 못하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해요. 마음 빼놓고 뭐 있을까요? 허허허.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상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데 중세계, 하세계 이렇게 삼 세계가 같이 돌아가고 있죠.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높아지고 차원이 얕아지고 차원이 아주 저 밑으로 떨어지고요. 이렇게 해서 모습도 그렇게 나오죠, 그대로.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각자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누가 그거를 말해 주기 이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되겠죠? 누가 대신 잠을 자 주고, 누가 대신 먹어 주고, 누가 대신 똥을 눠 주고, 누가 아파 주고, 누가 죽어 주고, 누가 깨닫게 해 주느냐는 얘기예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아까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라고 얘기했죠? 그건 자기 차원에 따라서 입력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살면서 항상 ‘내가 산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먹었다.’ 이렇게 말씀들 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에도 생명체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어떻게 물을 먹었는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더불어 같이 먹었죠. 그래서 이거를 먹으면 주는 거죠. 그런데 그 생명체들은 나에게 또 작용을 해 줘요. 그러니까 항상 더불어 에누리가 없어요. ‘내가 주면 받는다.’ 이런 거죠.
그래서 항상 생각을 건전하게, 즉 말하자면 둥글게 좀 밝게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대로 입력이 된 거니까 그대로 현실로 나오는 거예요. ‘난 이거 할 수 없다. 나는 이거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요거는 할 수 있는데 요거는 할 수 없다.’ 이런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해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못하죠. 여러분한테 자유스럽게, 마음도 말도 생각도 자유스럽게 줬는데도, 고등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쓰라고 했는데도 자유스럽게 쓸 수가 없죠, 여러분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뭐…. 그러니까 여러분의 몸은, 몸이 움죽거리는 건 한계가 있는 거고요, 내 이 정신계의 보이지 않는 자기는 무한이에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 ‘진짜 너만이 이 몸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어 줄 수도 있고, 너만이 해결사가 돼 줄 수 있고, 아프면 의사도 돼 줄 수 있다.’ 하는 거를 오직, 자기 이 몸이 싹이라면 자기 뿌리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여러분을 편히 앉게 하기 위해서 걸상을 놔야 되는 건데 처음이 돼서…. 요다음에는 다리 안 아프시게 걸상을 갖다 놓겠어요. 하하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말을 하고 또 그게 맞고 그게 진리고 그게 사람 사는 본의라면 모두가 좋아요. 모두가 좋은 거예요. 인간하고만 통하는 게 아니에요. 날아다니는 새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꽃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소를 건지는 데는 내가 소가 돼야, 내가 소 속으로 들어갈 줄 알아야 소를 건질 수 있다고요.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소로 태어났으니까 소의 고기는 사람들이 먹어서 약으로 쓰고, 소의 영혼은 건져서 인간으로 형성시킨다.’ 이거죠. 갖은 각색으로 천차만별의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는 없고 한꺼번에 알 수는 없으니까 차차 아시도록 하고요, 또 질문하실 거 있으면 하세요.

질문자3(외국인 여): 스님, 조상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큰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가 해 오던 게 모두 자기 몸 안에 있다고 그랬잖습니까? 그리고 물 하나 마실 때도 같이 먹고요. 자기 조상하고도 같이 마시고요. 그렇다면 지금 자기 조상님들이 자기하고 언제든지 같이 하나요?

큰스님:
그건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이 조상이 모습만 없어졌다 뿐이지 영혼은 하여튼 있으니까요. 그 영혼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다시금 또 재생이 되니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밥 먹을 때에 조상뿐만 아니라 친절한 친구도 같이 공식할 수가 있다 이겁니다, 공식! 그래서 공생, 공심 또는 공체, 공용, 공식입니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살고 있는 이 자리에 모두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가 조상들이 돌아가시면, 자손들을 기르고 그러시는데 참 그 은혜와 도덕, 의리 이런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흰 꽃 한 송이와, 우주떡 하나, 이거는 케이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리고 초, 향 그렇게 놓고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올리는 거죠. 우리 부모가 그렇게 낳고 길러서 어른이 돼서 사회에 나가서 살게끔 해 준 은혜를 우리 자식들한테도 가르치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식들도 그걸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기독교나 가톨릭교라고 해서 그 부모를 무시하고 그런다면 자기부터 무시가 되는 거니까요. 진리라는 건 끊어지지 않고 항상 돌아가는 것이 진리니까요. 제가 여러분한테 말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람이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한생각을 잘해라. 말을 아무렇게나 그냥 해서 남을 섭섭하게 하지 말라. 한 가정에도 그래요. 자식들이 나가서 안 들어온다거나 그냥 마음대로 속을 썩인다거나 이래도 욕을 하고 때려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마음에서 고장난 거지 말로다가 하고 때리고 그런다고 그게 고쳐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에서 고장난 건 마음으로 고쳐야 된다. 속담에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어요. 미국에도 그런 말이 있는진 몰라도요.

그래서 천 리를 나가 있어도, 만 리를 나가 있어도 마음을 끌어오면 육체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거든요. 그 도리를 완전히 알면 모든 걸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부처님이라고 그러는 단어가 무슨 계급이 높고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그런 게 아니라, 미생물에서부터 인간까지 아니 되는 게 없어요.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에 여러분 속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싹 들어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거를 대치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그 도리를 모르면 나를 죽이겠다고 어떠한 방망이가 보이지 않는 데서 들어온대도 뭐, 해결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인간이라면 언제나 정신계와 물질계가 동시에 돌아간다는 그 뜻을 아셔야 한다 이 소리죠.

만약에 지금요, 컴퓨터를 사용하고 전화를 사용하고 모든 거를 이렇게 사용하다가 세상에 전기도 없어지고 모든 게 다 없어진다면 어떻게 통신을 하고 어떻게 컴퓨터를 해서 남한테 알리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정신계의 통신처, 그 통신처가 바로 자기 주처예요. 그러니까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자기가 알아서 자기 몸을 대치하고 배워서 나가는 데에 여념이 없어야 하고 또 그 가운덴 가정과 더불어 해야 하고, 그 다음엔 이 사회에 살아나가는 데에 더불어 해야 하고, 차차 그게 차원이 높아지면 배워지는 거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만 있다, 둘만 있다 이러지 않죠. 그러니까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있다 없다 할 수가 없죠, 마음이.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어떠한 용도를 우리가 실행한다 하더라도 걸림이 없는 자체죠.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나쁘고 좋은 거를 미리, 이미 알고 있고, 너무 이렇게 해선 나쁜 일이니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걸 알고 있죠. 그러나 살아나가는 데 어떤 거는 꼭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거를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이지 여러분이 그냥 다 가지고 있는 게, 여러분의 이름이 종교예요, 그냥. 여러분이 다 종교인이에요. 그리고 성당이나 또는 부처님 법의 법당이나 이런 거는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해서 이끌어 나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죠.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계시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모습과 우리들 모습이 둘이 아니다. 생명도 둘이 아니다. 마음도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 높이 보지도 말고, 더 내려다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너와 같이만 생각해라. 그러면 너무 친밀하죠. 자기가 자기 죽일 수는 없고, 자기가 자기 나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모든 게 평화롭고 즐겁고 자유롭죠.
이게 과거로부터 우리가 살아오면서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느냐, 어떻게 살다가 왔느냐. 이것이 바로 자기가 산 대로니까 현실에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업보성이나 유전성 인과성 세균성 영계성, 이것이 모두 여기 입력이 돼서 있어요. 입력이 돼서 있는 거는 이 몸속에 있는 모습, 의식, 생명 이것들이 다 때에 따라서 어느 때에 내가 한 대로 때를 맞춰서 나오는 거죠. 안 그런 사람은 안 나오는 거고 그런 사람은, 입력이 된 사람은 그렇게 나오고요. 그렇기 때문에 에누리가 없어요, 자기가 한 대로니까.

나는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나도 가톨릭교에 예전에 있었던 사람이죠. 근데 왜 이렇게 됐느냐 하면요, 신부님한테 고해 성사를 하러 들어가서 고해 성사를 하다가 말고 생각을 한 거예요.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일을 저질러 놓고 신부님한테 갖다가 떠맡기면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죄는 없어질 수가 없죠. 그때부터 전 다 버렸어요. 다 버리고 나는 내 길을 걸은 거죠. 사람이 이 도리를 모두 각자 알면 귀신이 수만 명이 닥친다 하더라도 겁나는 게 아니에요. 죽은 사람 마음이나 산 사람 마음이나 똑같아요. 악하게 했으면 악하게 들이덤비고 선하게 하면 선하게 하고, 오히려 도와주고. 그런데 이 공부는요, 이 마음이 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에요, 공. ‘주인공’ 이 주처의 주인공이죠. 그래서 거기다가 체가 없는 영을 수만 명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 거죠. 나만 여직 말했잖아?

질문자4(외국인 남): 가톨릭 교회에서 꽤 윗사람이 미국 정부에다가 제안을 했는데요, 미국 정부가 이제 제일 세졌으니까 미국 정부에서 전 세계의 모든, 미국까지 포함을 해서요, 핵무기를 전부 다 없애자는 제안을 했다 합니다. 그럼 불교나 불자들도, 스님들도 거기에 동의를 하시고 있으신지요?
큰스님: 동의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죠.

질문자4(외국인 남):
만약에 그 핵무기를 없애려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기도를 해야 됩니까, 아니면 어떤 조직이 있어서 조직에다가 얘기를 해야 됩니까?
큰스님: 그거는 조직을 해도 어려운 문제가 있고요. 보이지 않는 이 마음, 정신계, 이 마음들이 항상 바깥으로 주님을 찾지 않고 바깥으로 부처님을 찾지 않고 내 안에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는 그 모든…. 이 불법에서는 관(觀)이라고 합니다. 관법을 실천한다면 모든 건,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너만이 할 수 있다.’죠. 우리가 조직을 만들어 가지고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한다면…. 전 세계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거는 만약에 이 주인공 자체가 원자라면 여기에서 그 한생각이 입자로 화해서 모든 거를 조절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 사람마다 동의하게 만들거든.

뭐든지 그래요. 뭐든지 지금 우리 한국에도 IMF 때문에 문제가 있고 그렇지만 어디 한국만 그렇겠습니까? 돌아가면서 딴 나라도 그럴 수 있고, 장담을 못하죠. 그런데 가만히들 생각해 보세요. 예수가 말씀한 거, 이 부처님이 말씀한 거 이것을 지금 죄 틀리게 하고 있잖아요. 보세요. 내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 먼저, 주처가 나에게 있는 거지 어떻게 나 빼놓고 주님이 있어요? 나 빼놓고 부처님이 어떻게 있어요?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하죠. 아, 그때 당시에 예수님은 모두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줄 알고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마구니와 같으니라.’ 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그 편집하는 사람들이 좀 지혜가 있으면 ‘아, 저 예수님 모습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도 다 똑같구나.’ 그러니까 마음과 마음이 둘 아니게 이렇게 믿어라 하는 건데…. 나는 어떤 분이든지, 어떤 미생물이든지 어떤 돌이든지, 어떤 나무를 막론해 놓고 나와 같이 생각하지 딴 거라고, 딴 생명이라고 생각 안 해요. 생명은 다 똑같으니까요. 개미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과 같으니까요.
그럼 질문하실 분 또 하세요.

질문자5(외국인 남): 우리가 어떻게 그 높은 경지, 자기의 본성을 아는 경지까지 갈 수 있는지요? 마음을 다 비우고 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요, 그리고 참나에 대해서 한 번 더 물어봅니다.
큰스님: 어떻게 다 비우고 거기 경지까지 가느냐고요? 허허허. 우리는요, 지금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져요. 그냥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죠? 차를 타고 가도 가는 대로 없어지고 또 가지 않은 데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걸 잘 생각하세요. 우리가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이 보죠? 듣는 것도 고정된 게 없이 듣죠? 만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모두가 고정된 게 없이 찰나찰나 화해서 나툴 뿐이에요, 이렇게. 넘어갈 뿐이에요. 그러니까 공했어요. 그러니까 초월해서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아시게 되면 우리가 살아나가는 게 영화하는 데 탤런트들과 같은 거예요. 탤런트가 죽는 역할을 할 때에 영화를 찍는다 이러고 하니까 그 죽는 역할을 하지, 만약에 그냥 죽는다고 생각을 했더라면 그 탤런트 안 하죠. 죽는 역할 안 해요. 그러니까 우리 사는 게 그대로 끝없이 그냥 찰나찰나, 우리가 걸음 걷듯이 찰나찰나 화해서 그냥 돌아갈 뿐이에요, 지구가 그냥 초월해서 돌아가듯이.

질문자6(남): 그러면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요, 그 하고 있는 자체를 그대로 보고 있으면 우리는 말씀하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입니까? 아니면 내가 더 많이 벗어났나요?
큰스님: 이렇게….
질문자6(남): 벗어난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걸 감상한다고 할까요? 검토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적으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요?
큰스님: 우리가요, 차를 타고 갈 때, 예를 들어서 걸음을 걸을 때도 걷지 않으면 된다 하고 걷지 않으면 되는 거고,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거고…. 이렇게 운전을 해야 되죠, 자기가 운전기사니까, 살아나가는 데에. 인간은 모두 자기가 살아나가는 데 선장, 배 타는 데 선장 있죠? 선장과 같은 거죠.
그게 이해가 안 가죠? 아리송하고요. 하하하. 그런데 지금 살아나가는 자체가, 지금 실질적으로 살아나가는 자체가 그러해요. 인간이 한 철 살다가 또 모습을 바꿀 건데, 탤런트와 같은 건데 이왕 탤런트의 역할을 한 철 하려면 좀 찌푸리지 않고 웃고 살 수 있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우리 지금 한국에서 배우는 사람들이요, 그래도 한국에선 이렇다 하고 살아요. 그런데 그 사람네들은 누구한테 묻고 자시고 안 그래요. 그 도리를 어느 정도 배우고 나니까 그냥 뛰어넘어요, 그냥. 그냥 자기가 생각하고 그냥 밀고 나가요. 그걸 왜 믿느냐 하면요, 보이지 않는 데 자기가 자기를 응하고 이끌어 나가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 믿고선 그냥 밀고 나가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스스로 과거 자기와 현재 자기가 알게 돼 있어요. 불가에서는 그거를 견성이라고 하고, 또 기독교나 그런 데서는 성령을 입었다고 하죠. 허허허. 그런데 그것이 타의에서 믿으면 타의의 영계가 들어와서 내가 그 성령의 역할을 하죠. 그러니까 그건 타신이 들려서 그런 것이 되죠,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리송합니까, 그래도? 아이 그래, 아리송할 거예요.
질문자6(남): 지금 관하는 법을 더 배우고 싶고요, 참자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자기가 지금 더 알고 싶으면 지금 말하는 거 움죽거리는 거, 자기가 지금 하고 있잖아요. 보이는 자기가 있고 보이지 않는 자기가 있다고 그랬죠. 얼른 쉽게 말해서 자동차 바퀴가 있으면요, 그 가운데 심봉을 딱 끼워 놓은 것과 같은 거죠. 심봉은 정신계고, 바퀴는 지금 현실 몸과 같은 거고. 그런데 그것이 힘을 배출해 주고 이 바퀴는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바퀴가 작용을 하는데 왜 자기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까? 그래서 이게 말로 해서, 말로 배워서 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 차와 운전수를 진짜로 믿어요. 자기 차는 자기 운전수를 진짜로 믿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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