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의 천식과 선리의 오처 비판
연이은 백파의 편지 초의에게 전해
상서로운 풀, 명(蓂)은 지금의 달력

 추사와 백파의 선리논쟁은 이미 백파가 한양 근교 학림암에 거처하던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후 백파는 자신의 주장을 자주 추사에게 보냈지만 추사는 그의 주장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백파의 천식(淺識)과 선리의 오처(誤處)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자주 눈에 띤다. “백파노인의 글이 한양으로부터 연이어 온 것이 수천만언인데 이 내용들은 전에 말하던 것을 다시 말한 것”라 한 것은 바로 추사의 이런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완당전집〉〉 〈여초의〉 22신과 〈〈벽해타운첩〉〉에 수록된 이 편지는 실제 언제 보낸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추사가 “소치도 여기에서 떠나니 대략 적는다”라고 한 것이나 “또 봄이 반쯤 접어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소치가 1844년 봄, 제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초의에게 전해 준 편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서 부친 편지를 이 편지와 함께 차례로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 또 봄이 반쯤 접어들었습니다. 나그네에게는 세월이 일부러 빨리 가는 것인가. 산가의 세월도 세상을 따라 이와 같이 변하는 것인가요. 스님의 형편은 길하고 편안한지 늘 염려됩니다. 나는 괴로운 상황이 전과 같습니다만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와서 둘째와 막내의 안부 편지와 또 스님의 편지를 받고 크게 위안이 되었는데, 해가 지나도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백파노인의 글이 한양으로부터 연이어 온 것이 수천만언인데 이 내용들은 전에 말하던 것을 다시 말한 것입니다. 스님이 곁에 있어서 함께 증험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새 달력을 부치니 두고 보심이 어떨지요. 소치도 여기에서 떠나니 대략 적습니다. 이만. 산이화(辛夷花)를 올 여름에도 많이 거두어 말렸다가 보내주면 어떻겠습니까. (前付一緘 未知與此鱗次照 到?又春中 客子光陰故自流?歟 山家日月亦與世推遷如此歟 更唯禪況吉晏念念 賤狀一味前苦只是家?之來 獲見仲季安報 又得師信大慰 年後企切 白坡老人書自京來連章累牘數千百言 此復申前說 恨不使師在傍同證也 新蓂付去留存如何 許痴又此去略?不宣 辛夷花今夏亦爲收乾以惠如何)
대둔사와 제주를 오가며 두 스승의 가교가 되었던 소치, 그는 스승이 유배된 다음해 1841년 2월, 대정리를 찾아가 스승 곁에서 탁마(琢磨)에 열중하다가 이 해 6월 중부(仲父)의 부음을 받고 제주도를 떠난다.
생활 형편이 어려웠던 소치의 사정을 안쓰러워했던 추사는 자신과 교유했던 제주목사 이용현(李容鉉)에게 소치를 소개, 그의 막하(幕下)에 머물게 한다. 이는 소치가 1843년 7월, 다시 제주로 오게 된 연유이다.
특히 추사는 제주에서 풍기와 화기로 입과 코가 헤지는 고통을 겪었는데, 이를 산이화로 다스렸던가보다. 산이화는 바로 목련꽃 봉우리이다. 그 모양이 붓처럼 생겼다하여 ‘목필(木筆)’이라 부른다. 성질이 따뜻하고, 매운 맛을 지닌 산이화는 코 막힘을 풀어주는 약재인데, 초의에게 이 약재를 부탁한 것. 이는 그가 풍토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상황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를 위로한 것은 혈육과 초의가 보낸 편지였다.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와서 둘째와 막내의 안부 편지와 또 스님의 편지를 받고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한 것은 분명 세월이 흘러도 이들의 편지를 기다리는 추사의 모습이 한 눈에 그려진다. 초하룻날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자라다가 열 엿새째 날부터 매일 한 잎 씩 떨어져 그믐에 이른다는 상서로운 풀, 명(蓂)은 지금의 달력이었던 셈. 요임금 때에 발견 되었다. 이후 신명(新蓂), 혹은 명(蓂)은 달력을 상징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