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원장의 한국미술의 틀린 용어 바로잡기-당초문→영기문 상

‘당초문’이란 이름의 허와 실
조형미술에는 종교사상(宗敎思想)이나 철학사상(哲學思想)보다 더 심오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 조형언어를 읽지 못하니 문자언어로 된 문헌들이나 경전들을 읽지 못하는 것과 같다. 조형언어로 되어 있는 조형미술은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까지 표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조형사상(造形思想)이라는 용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조형미술의 표현원리와 조형사상을 처음으로 추구하여 정립하였으므로 그 보편적 이론을 바탕으로 연재를 쓰고 있다.


우리는 단지 ‘당초문’이란 용어만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조형미술에 단순한 ‘당초문’은 없다. 앞에 반드시 ‘인동’, ‘연’, ‘모란’, ‘국화’ ‘아칸서스 잎’ 등의 구체적인 주된 꽃이나 잎 등의 명칭이 붙게 마련이다. 그런데 용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현실에서 보는 넝쿨들의 이름이요, 인동, 연꽃, 모란, 국화 등 현실에서 보는 꽃들의 이름들이다. 그 두 가지가 결합하여, ‘인동당초문’ ‘모란당초문’ ‘연당초문’ 등으로 불려서 널리 쓰인다. 그런데 바로 현실에서 보는 형태로 용어를 만들었기 때문에 엄청난 오류와 대혼란이 생긴 것이다.

<당초문(唐草文)>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무도 의심하고 있지 않은 당초문. 이 용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중국의 '당(唐)나라 풀'이다. 말이 되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 용어를 보고 웃는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이건 한국이건 육지에서 온 문물에는 당(唐, 일본 말로 ‘카라’)이란 말을 용어의 접두어로 간혹 써왔었다. 그러면 '당나라 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일본의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카라쿠사몽'. 그 이국적인 어감을 좋아하는가 보다. 일본학자는 '식물의 덩굴무늬'를 平安(헤이안)시대 부터 당초라 불러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다.

당초(唐草)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전거는, 서기 1001년쯤 헤이안 시대의 궁녀 ?少納言(세이슈우나곤)의 수필집인 『枕草子』(마쿠라노소우시:베갯머리의 서책)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말이 나온다. 「蒔?(마끼에)는 唐草」. 蒔?는 칠공예 기법의 하나로 금·은 가루를 뿌려서 다듬는 일본 특유의 미술 공예품, 또는 그 기법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후기에 완성된 작자미상의 설화집인 『今昔物語集』(곤쟉구모노가다리슈) 즉 “옛날과 지금의 이야기” 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唐草의 蒔?의 唐櫛?」.
이들 고전에 근거하여 일본인은 ‘唐草文’이란 용어를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사학자들은 아무 갈등이나 의문 없이 식민지시대에 일본인으로 부터 배우거나, 해방 후 일본에 유학하여 그대로 당초문을 배워 와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모든 국민들은 당초문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 간단한 언급을 취하여 당초문이라 해서 지금은 세계 공통적인 용어가 되었으니 당초문의 실체는 점점 미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조형의 본질 찾을 수 없는 이름
중국은 만초문(蔓草文)이라 부르는데 용어는 당초문과 다르지만, 넝쿨무늬를 가리키는 것은 같다. 서양에서도 같은 내용의 용어를 쓰되 정해진 용어가 없는 듯하다. 대개 'plant like decoration' 혹은 'foliage scroll'이라는 용어를 쓸 정도이다. 불어로는 ‘rinceaux' 독일어로는 ’laubwerk'라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모두 ‘당초문’이다. 우리나라 외국어 사전은 일본에서 만든 외국어 사전을 모두 번역한 것이어서 우리나라 모든 사전류들을 찾아보면 모두 ‘당초문’이다.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아직도 일본 식미지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저 장식일 뿐이어서 아무 의미가 없다. 일본학자들은 이슬람 미술, 그리고 유럽의 그리스, 로마, 기독교 미술 등에 나타난 서양의 조형들인 덩굴무늬들도 모두 당초문이라 부를 뿐만 아니라 인도, 동남아시아 등의 덩굴무늬들도 모두 당초문이라 부르고 있어서 동서고금(東西古今) 세계의 모든 넝쿨무늬는 당초문이 되어버렸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바꾸어 ‘덩굴무늬’ 혹은 ‘넝쿨무늬’라 하지만 틀린 용어임은 마찬가지이다. 그 용어에 따라 조형의 해석도 단지 ‘당초문’ 혹은 ‘덩굴무늬’라는 장식일 뿐이다.

그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을 읽어보면, ‘덩굴을 이루며 연속문양을 이루며, 주제의 식물에 따라 인동당초문, 포도당초문, 모란당초문 등 이름 붙이지만, 양식화되어 무슨 식물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부터 건축과 공예의 장식문양으로 세계각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스의 도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은기나 염직, 이슬람 도기 등이 좋은 예이다’ 대체로 이렇다. 당초문은 단지 그런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세계의 일체의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에 걸쳐 광범위하게 쓰이며, 한 마디로 일체의 조형미술은 당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당초문이란 말이 올바르지 않으니 왜 틀렸는지 밝혀야 하고 올바르게 그 근본을 분명히 밝혀서 새로운 용어들도 만들어야 하니 세계 각국의 미술사 연구는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다투어 일본에 유학하여 동양의 미술을 연구하여 그들도 통일된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카라쿠사몽’이라 부르니 어이가 없다. 국제적 용어로 되어버린 당초문이란 용어를 차치하고라도 서양에서도 역시 덩굴 장식무늬로 알고 있으니, 이 당초문을 바로 잡으려면 인류의 문화를 종전과는 다르게 새로이 정립하는 거창한 작업이어서 인류문화의 혁명과도 같다.

당초문은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무늬 가운데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당초문이란 것은 용과 보주와 만병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런데 동서양 학자들이 용, 보주, 만병을 모르니 당초문이란 용어가 왜 틀리는지 더욱 알 수 없다. 서양학자들은 더욱 불리하여 훨씬 낮은 수준이다. 당초문이 차지하는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크고 중요하므로 인류의 미술사학 연구는 지금 부터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 이제부터 세계의 모든 학자와 총칼 없는 침묵의 전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그들은 침묵하거나 올바른 정답을 제시하여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초문의 정체를 충실하게 증명해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서양의 미술을 풀어내면 오랜 세월 끝에 그들도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나대로 당초문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풀어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풀어낼 것이다.

조형화된 넝쿨은 실물과 무관
식물에는 넝쿨식물이 따로 있다. 같은 말로 덩굴식물이라고도 하는데, 줄기가 길쭉하여 곧게 서지 못하고 다른 물건을 감거나 거기에 붙어서 자라는, 즉 집의 담이나 벼랑 등 수직경사진 곳에서 길게 줄기를 뻗어 자라나는 식물들이다. 넝쿨식물의 종류에는 우리가 흔히 많이 알고 있는 나팔꽃, 수박, 참외, 포도, 수세미, 오이, 담쟁이덩굴, 능소화, 다래덩굴, 줄장미(덩굴장미), 등나무, 호박, 머루, 칡, 오미자, 갈퀴덩굴, 꼭두서니, 메꽃, 더덕 등과 같은 식물들이 있으며, 포도과에 속하는 식물들도 거의 다 넝쿨식물이다. 이들 넝쿨들은 잡풀에 속하여 예부터 생명수나 우주목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미미한 잡풀이므로 인류의 조형미술의 주류를 이룰 수 없는 것은 뻔하다.

그러면 기원 전 고대의 조형미술에 나타나기 시작한 넝쿨식물은 이러한 현실의 넝쿨식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아무 관계가 없다. 조형미술에 나타나는 넝쿨모양식물은 현실에서 보는 넝쿨식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 심지어 가장 비슷한 포도 넝쿨마저 포도 넝쿨이 아니다. .
인동당초문, 연화당초문, 모란당초문, 국화당초문, 포도당초문 등은 과연 맞는 용어인가? 인동, 연꽃, 모란, 국화 등은 넝쿨식물이 아닌데 주어진 공간에 맞추어 왜 한 줄기로 혹은 사방으로 여러 갈래로 전개하여 가는 것일까? 문명의 발상부터 왜 그런 조형을 만들었을까? 그런 조형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그런 조형의 전개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원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인류가 역사를 이루어 오는 동안 어느 미술사학자도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오히려 모른다고는 말하지 않고 억지로 답을 만들어 내려는 데서 동서양 미술사는 더욱 더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당초문이 아니라면 그 수많은 당초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무엇인지 모르면 단지 ‘당초문’이라한다. 그 예가 고려청자 암막새 무늬이다.(사진 1) 그 모든 당초문은 ‘영기문(靈氣文)’이라는 방대한 조형의 카테고리에 포함될 뿐인데 이 낮선 ‘영기문’이란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나가 보기로 한다. ‘무엇인지 모를 당초문’에 세계가 놀랄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늬에 세계미술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조형에 열쇠가 숨어있는데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일향 한국미술사 연구원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