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의 재건과 선의 대중화(1)

용성 스님 등 초청해 법회 및 참선 수행
남녀선우회 조직… 부인선우회 법인화까지
참선으로 타력신앙 극복…자주적 인간 꿈꿔
全수좌대회 등 봉행해 선학원 외연 확대도

▲ 1931년 3월 23일 선학원 대방에서 개최된 제1차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
1921년 민족불교를 회복하기 위해 창설한 선학원은 1924년부터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사찰령(寺刹令) 이후 불교계의 왜색불교화로 인한 왜곡과 변질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불교계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과 통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자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그 씨앗까지도 고사(枯死)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은 선학원이 1922년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조직을 통해 보다 안정적 기반 하에서 선의 부흥과 대중화를 모색했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꿈꾸었던 법인화(法人化)의 노력은 총독부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불교계의 부정적 인식과 소극적인 관심은 재정난으로 나타났다.

선학원은 이후 약 7년의 세월동안 사무소를 직지사나 범어사로 옮기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학원 설립의 취지나 의미를 기억하고 되새겼던 교계의 사부대중은 그 침체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었다. 이와 같은 회한과 부활의 염원은 1931년 1월 적음(寂音)스님이 주석하면서 실현되었다. 창설초기의 어려움과 한계를 거울삼아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자구적인 노력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적음스님은 우선 당대의 고승을 초청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대승경전에 대한 강의와 설법의 장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 수행 역시 적극 권장하였다. 1931년 창간된 <선원(禪苑)> ‘선학원일기초요(禪學院日記抄要)’에 의하면 매월 평균 3~4회에 걸쳐 한용운(韓龍雲)·이탄옹(李炭翁)·백용성(白龍城)·김남전(金南泉)을 비롯한 스님들의 반야(般若)설법과 유마경(維摩經) 강의 등 다양한 법회가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인계 즉시 선학원의 대방(大房)을 거처로 하고 이탄옹 스님이 입승(入繩)을 맡아 20여 명의 납자와 신도들이 참선(參禪)을 시작한 것은 선학원 창설의 취지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대방을 비롯한 각 방의 도배를 새로 하고 온돌을 보수하여 수행환경을 향상시켰다. 더욱이 이 해 3월 1일에는 70여 명을 회원으로 한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가 조직되었고, 3월 21일에는 부인선우회(婦人禪友會)가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두 조직은 선의 대중화를 통해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보였다. 이 가운데 부인선우회는 1931년 3월 2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고승법회를 통해 선 수행을 비롯한 교학(敎學)에 대한 이해도 높여갔다. 특히 1932년 11월에는 그해 9월 만주사변 발발로 피해를 입은 만주지역 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현금과 의복을 모아 보내기도 하였다. 이 부인선우회는 체계적인 신행단체로 거듭나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인가받은 이후에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朝鮮佛敎中央婦人禪院)’으로 거듭나기도 하였다.

우리 모든 신도들은 선 즉 참선(參禪)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오로지 불교라면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것인 줄 알았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이생에서는 아무 일없이 만사성취(萬事成就)하는 요소인줄 알았으며, 지장보살만 부르면 죽을 때는 무사히 죽고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죽어서 극락세계를 간다는 단편한 불교의 교리인 줄 알았었다.

1935년 간행된 <선원>4호에 소개된 글이다. 지극정성으로 염불(念佛)하는 것만으로 복을 받고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타력신앙(他力信仰)이 불교의 전부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이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밖으로부터 들어온 불교가 이 땅의 풍토 속에서 발전하고 성숙했던 시기가 지나고 탄압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시기의 적나라한 신앙풍속도였다.

그러나 1931년부터 대중화된 선 수행을 통해 단순히 복을 빌기에 급급했던 부인(婦人)들은 “참선이 참다운 불교의 교리이며, 어두운 토굴에서 광명의 길로 인도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여 당시 부인계에서는 환희작약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참선은 수행이면서 신앙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하는 대신 참선을 통해 자주적 인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급기야 부인선우회는 1934년 안국동 41번지에 2층 가옥을 마련하여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一. 우리는 부처님의 정신을 체달(體達)하여 자선(自禪)을 선포실행하며 부인들을 인도 교양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로 하자.
一. 우리는 참선의 진리를 철저히 연구하여 생사대사에 함께 해탈(解脫)하자.
一. 우리는 중생제도를 하되 지옥중생이 다할 때까지 제도하기로 하자.

당시 부인선우회의 강령(綱領)이다. 극락세계에 태어나기 보다는 견성성불의 원(願)을 세운 것이다. 염불보다는 참선을 통해 해탈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매일 네 번씩 나누어 수행하며, 15일마다 선지식을 모셔와 설법을 들을 것을 정하기도 하였다. 선학원의 창설정신이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 1930년 대 선학원에서 열린 적음스님 입실건당 모습.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석우 적음 만공 용성 동암 스님.
재건 초기 선학원은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연을 넓히기 위한 행보도 본격화하였다. 우선 1931년 3월 23일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여 당시 교무원(敎務院) 종회(宗會)에 제출할 건의안을 작성하고, 3월 25일에는 적음스님이 종회에서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치해 줄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무원은 찬성은 했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결되었다고 한다.

한 사찰의 주지된 사람을 보면 선원에는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자들이 안거증서(安居證書)만 위조한 자도 있으며, 또는 안거증서도 없이 이력서에 기탄없이 안거횟수를 공공연하게 써서 사법(寺法)의 조문(條文)에 어긋남이 없도록 속이는 자가 많다. 이와 같이 선학(禪學)에 수양(修養)이 없는 자가 뭇 사람의 대표가 되고 본즉 사람들이 ‘선(禪)’자 한자를 물어보아도 해석하여 대답할 자가 없다. 그리고 선을 모르니 선원(禪院)을 외호(外護)하고 선승(禪僧)을 존경하고, 선학을 부흥할 뜻이 생길 수 없다.

김태흡이 1932년 <선원>2호에 투고했던 ‘호선론(護禪論)’의 한 대목이다. 선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수행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당시 불교계의 단면을 지적한 것이다. 2~3년 동안을 의무적으로 승당(僧堂)에서 선학을 연구하고 수행하는 일본 승려와는 달리 주지소임을 위해 사법(寺法)에서 주지자격으로 제시한 안거수를 허위로 기재하거나 위조하는 경우가 당시 우리 불교계의 세태였다.

한편 당시 선학원이 건의한 중앙선원의 설치는 일차적으로 선수행이 지닌 가치를 인식한 결과였지만, 민족불교 회복을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당시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대처승과의 차별화 의지였던 것이다. 즉 청정비구승들의 수행을 위한 사찰을 할애해달라는 요구는 선학원 창설 초기와 용성스님의 건백서(建白書), 그리고 해방이후 정화운동(淨化運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던 문제였다.

선학원은 중앙선원 설치건의와 함께 운영의 지속성을 위해 1931년 11월 16일 개최된 범어사 본산총회 때는 매년 600원의 선학원 경비보조를 청구하였다. 비록 범어사의 재정곤란으로 200원의 지원을 받는데 그쳤지만, 적음스님의 침술에 기반해 조직된 제약부(製藥部)의 수입, 그리고 남녀선우회와 부인선우회의 조직 확대로 운영과 수행의 기초가 튼실해졌다.

이밖에 선학원은 불서(佛書)의 간행과 보급, 기관지인 <선원(禪院)>지 창간 등을 통해 내적인 발전과 수행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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