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민지배 이전까지

꽁빠웅 왕조 바돈 왕(1781-1790)이 1790년에서 1797년까지 만들다 미완성으로 끝난 민군대탑은 미얀마의 열강 침탈을 불러왔다. 바돈 왕은 왕권 강화와 내부 결속을 목적으로 불사를 시작했지만 혹독한 노동에 지친 일꾼 1000여 명이 영국군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도망치며 침공의 빌미가 된다.
몽고군이 1310년 경 물러간 후 미얀마는 중북부 샨족(Shan)의 잉야(Innwa)왕조와 남부 버고 왕조의 두 개 왕조가 대립한다. 샨족은 현재도 미얀마 인구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잉야 왕조는 수계작법을 확립한 버고 왕조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용하고 보호와 진흥에 열심히 나섰다. 잉야왕조의 불교수용은 상좌불교가 미얀마 북부 산악지대까지 멀리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잉야 왕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미얀마인에 의한 불교 저작활동이 활발히 이뤄진 것이다. 초기불교 전통의 경전에 바탕한 이야기나 논서에 대한 주석서, 그리고 초기경전어인 빠알리어에 대한 문법서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논서에 대한 주석서로는 마하아리야왐사(Maharyavamsa) 스님에 의한 ‘Abhidhammatt havibhavaini’나 빠알리어에 관한 ‘Ganthabharana’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이 시대의 많은 스님은 자타카, 즉 부처님의 생애나 본생담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 시기를 ‘불교가 미얀마화’한 시기라 평가한다.

16세기에 이르면 샨족은 다시 버마족에 주도권을 내준다. 1510년에 버마족의 따웅우(Taung Oo) 왕조가 미얀마 대부분을 통일한다.

따웅우 왕조 당시 스리랑카로부터 장로스님이 건너오고 왕들은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승원불교를 발전시켰다. 버잉나웅(Bayinnaung) 왕의 경우 잉와 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의 마니뿌르, 중국의 운남성 그리고 태국 등지까지 정복활동을 펼쳤다. 버잉나웅 왕은 독실한 불교도로 정복지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많은 불탑을 보수하고 불교경전을 일반에 보급하는데 노력했다. 또 스리랑카에 불교가 발전되도록 지원하였으며 샨족의 근거지인 산간벽지에도 전도사를 파견했다. 따웅우 왕조의 지원으로 많은 학승이 배출되고 빠알리어로 쓰인 많은 초기불교전적이 미얀마어로 번역됐다. 이 왕조는 약 200년간 지속됐는데 태국의 침입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식민서구 세력의 압박을 받아 멸망했다.

제5결집의 결과물인 대리석판에 새긴 석경. 파손을 막기 위해 탑 속에 안치된 모습
민심 결집 위한 제5차 결집

따웅우 왕조 시대에는 제5차 결집이 이뤄졌다. 미얀마에서 ‘제5차 결집’은 불기(佛紀) 2400년을 기념해 개최됐다. 민돈(Mindon : 1853~1878) 왕이 만달레이에 2400명의 학승을 모아 결집을 개최했다.

이들 스님들은 1868년에서 1871년까지 약 3년 동안 불교에 정통한 학승들의 감독 아래 빠알리 삼장(三藏)을 독송하며 교정했다. 상좌불교에서 전통적으로 경전은 패엽(貝葉) 등에 새겨져 내려왔는데 필사해오는 과정에서 오자나 탈자 등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은 교정 삼장은 총 729매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흰 대리석에 4년간 새겨졌다. 총 율장 11매, 경장 410매, 논장 208매였다.

현재에도 제5결집의 결과물인 대리석판에 새겨진 석경은 만달레이 구릉에 잘 봉안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각각의 석경은 파손을 막기 위해 탑 속에 안치되어 있다. 입구는 대단히 다채롭고 화려한 꾸도더(Kuthodaw) 파고다가 있다. 이 파고다는 ‘왕의 공덕’이라는 의미와 함께 입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The World's Biggest Book)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미얀마는 이 전통에 의해 ‘제5차 결집’ 이후 1954년부터 3년간 불기 2500년을 기념하는 ‘제6차 결집’을 개최한다.

‘제6차 결집’의 삼장은 현재 책으로 출간돼 유통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인도문자(Devanagari)로 빠알리(Pali) 삼장을 출간하는데 저본이 됐다. 현재 날란다 에디션(Nalanda Edition)이라 불리며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점은 인도불교사에 있어 ‘제4차 결집’은 C.E. 1~2 세기 경의 끼니쉬까왕 때의 결집으로 이야기되지만 빠알리어 경전은 아니었다. 때문에 상좌불교 전통에서는 B.C.E. 1세기 경 스리랑카의 알루 비하라에서 이루어진 결집을 ‘제4차 결집’으로 본다. 즉, 민돈 왕에 의해 이루어진 결집이 스리랑카에 이어 진행됐기에 제5차 결집으로 보는 것이다.

민돈왕의 제5차 결집은 미얀마가 자주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고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 시기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한 영국이 미얀마 중하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민돈왕은 미얀마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미얀마 수도를 잉와(Ava)에서 만달레이로 옮기고, 내륙의 중심부를 흐르는 에야와디 강의 항로를 정비하고 교통체계를 확대했다. 또 전국에 전화통신체계를 갖추고 서양기술을 빌려 채광과 벌채방법 등을 개선하는 등 산업화와 근대화에 최선을 다했다. 민돈왕은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한편으로 영국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유럽세력과도 관계를 맺으며 미얀마를 지켜나갔다.

이와 함께 서구열강의 위협에 흐트러진 민심을 불법을 통해 수습하고자 했다. 이는 고려시대 몽고 침입 시 국난극복의 방법으로 대장경을 간행한 것으로 떠오르게 한다.

민돈왕은 독실한 불교인으로 평소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불교교단의 정화와 발전 그리고 포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1858년에 타락한 승려들을 참회시키는 정화와 외세가 침투한 남부 미얀마로의 전법활동을 장려하고 불교 성전 시험을 대대적으로 여는 정책 등을 펼쳤다. 또한 이 시기에 미얀마의 2대 분파인 셰진파(Shwezin)파와 투담마파(Thudhamma)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석경이 있는 꾸도더(Kuthodaw) 파고다에서 경전을 보고 있는 여자의 평화로운 전경
개화 군주 민돈왕의 안타까운 최후

안타깝게도 민돈왕은 모든 방면에서 미얀마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항상 신변의 위협 속에 살다 병으로 최후를 맞았다. 개화군주(開化君主)로 민돈 왕의 치적은 여러 가지로 평가된다. 그는 그의 신하들뿐만 아니라 그를 만났던 영국사절도 그를 칭송했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국내외 사정도 밝았고 국사를 처리하는데 정통했고 또한 종교적인 인품을 지녀 매우 젊잖고 친절하여 두루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난 후 왕위는 그의 아들인 띠보(Thibaw)가 물려받았지만 꽁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영국은 미얀마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고자 전쟁의 구실을 만든 후 진격하여 곧바로 궁궐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잘 훈련된 병력에 근대식 장비와 무기를 앞세운 영국군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고 만다. 이 때가 1885년 11월 28일이다. 미얀마의 마지막 왕 띠보는 바로 인도로 끌려가 30년간 그곳에서 살다가 1916년에 죽었다. 지금도 미얀마 사람들은 영국군에 11월 말에 끌려간 날을 ‘빠도무 네이(Pardawmu Nay: 띠보 왕이 끌려간 날)'라 하여 슬픈 마음 마음으로 기념한다. 반면 인도 무갈 왕조의 마지막 왕은 인도에서 미얀마로 끌려와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양곤 시내 한복판에 남아 있다. 미얀마는 이렇게 영국 제국주의자와 벌인 이전의 1824년과 1852년의 두 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침탈에 무너지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1753년 경 미얀마에는 꽁바웅 왕조 시대가 열린다. 이 왕조는 미얀마 역사상 세 번째 통일 왕조이자 마지막 왕조다. 꽁바웅 왕조를 끝으로 미얀마는 식민지 통치의 질곡에 놓이게 된다. 이 왕조 역시 이전의 왕조와 같이 불교진흥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일반 대중에게까지 불교가 널리, 깊이 보급됐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도 재건됐으며 불교전적을 미얀마어로 번역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난다. 특히 디가 니까야(D?gha Nik?ya) 등의 경장의 주석서가 이 시기에 번역된다.

이 시기 스님들이 마을에 들어갈 때 복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인다.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偏袒)의 문제가 대립됐다.

결국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종교회의가 1788년에 개최되고, 두 파는 논쟁 끝에 통견이 옳다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도 미얀마에서는 거리 탁발을 나가기 전 감독 스님이 한사람 한사람 통견하는 등 위의를 점검하고 있다.

꽁바웅 왕조 시대에는 사찰 내에서 불교 외에도 춤과 무용, 점성술, 안마술, 승마술, 무술 등도 가르쳤다. 특히 인도에서 많은 산스끄리뜨 문헌이 전해져 일반대중들도 사찰에 오면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스리랑카와의 불교 교류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왕명에 의해 상류계층 만이 구족계를 받는 출가가 허용됐다. 하지만 왕명에 반발해 출가를 하고 싶은 하층민들은 미얀마에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가고자 했다.

1800년 미얀마에 들어온 그들은 왕의 환대와 함께 구족계를 받게 된다. 이들 스리랑카 스님은 구족계를 받고 1802년 다섯 명의 미얀마 스님들과 함께 많은 빠알리 전적을 가지고 되돌아갔다. 특히 미얀마 교단이 스리랑카 교단의 대표인 승왕(僧王: sangharaja)에게 전하는 서신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후 스리랑카에는 그들에 의해 새로운 상가가 생겼는데 이 상가가 바로 ‘아마라뿌라 상가(Amarapura Sangha)다. 현재까지 스리랑카 불교의 한 종파로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불교 교류가 가능한 것은 지난번에 다뤘듯 1192년 미얀마의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구족계를 받아 미얀마에 상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 상좌불교권을 관통하는 하나의 역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꾸도더 파고다 앞에서 스리랑카 대표인 아상가 교수와 캄보디아 대표 교수와 함께한 조준호 교수〈사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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