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파’ 등 선리탐구 흔적 보여
“대사와 함께 증험 못해 안타까워”
체하는 병으로 고생…포장 간청

▲ 〈영해타운첩〉의 추사 편지
긴 여름 장마는 제주 적소의 추사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를 다녀간 태전 편에 자신의 처지를 세세히 전했건만 초의의 답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쉴 새 없이 퍼붓는 여름비가 멈추기를 고대하는 추사의 마음은 긴 여운을 남긴 잔영처럼 애잔함이 묻어난다. 이런 그의 고단한 적소의 일상이 잘 투영된 이 편지는 〈나가묵연첩〉과 〈영해타운첩〉에 함께 수록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태전 스님 편에 보낸 편지는 받아보셨습니까.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비가 계속 내려)대지는 마를 사이가 없고, 풍토병이 만연하니 청량한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쾌청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스님은 생활하는데 이런 고통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먹으면 체하는 병으로 더욱 지금의 처지가 가장 고민됩니다. 만일 포장을 얻어 위도를 뚫는다면 신선세계에서 만들었던 더할 것 없는 묘미(妙味)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생각하기도 어려워 망상 자체가 우습기만 합니다. (운문암의) 백파가 그 사이 회답을 보내왔는데, 어지럽게 이야기한 것이 더욱 심합니다. 또한 큰 사자후로서 저지시켰습니다. 너무도 우스워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대사와 함께 한번 증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침월이 돌아가는 길에 간략하게 소식을 전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7월 27일 늑충(頃因太顚僧寄 果卽收照 ?天有漏 后土不乾 ?濕浸淫 甚思淸凉界一銷 未知團蒲安養無此苦障否 此狀阻食一症 尤爲現在最悶 若得泡醬 開發胃道 何異香積無上妙味也 亦難着得 妄想可呵 白坡間有答來 胡亂說去答甚矣 又以大獅吼截住 好覺噴筍 恨無以與師一證耳 枕月之歸 略申 不宣 七月二十七 沖)

실제 이 편지가 어느 해에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백파의 선리 문제가 거듭 언급된 것으로 보아 제주 유배 초기의 편지일 것이라 짐작된다.
이는 추사가 자신의 선리 논점을 정리한 〈변망증십오조례(辨妄證十五條例)〉를 1843년에 저술하였기 때문에 이에 앞서 백파와의 선리 논쟁이 왕복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러한 사실은 그가 “백파가 그 사이 회답을 보내왔는데, 어지럽게 이야기한 것이 더욱 심합니다”라고 한 점이나 “큰 사자후로서 저지 시켰습니다”는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백파의 선리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무도 우스워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입니다”라고 한 점이다. 이는 그가 전한 사자후보다 더 신랄한 일성(一聲)을 고한 것이라 하겠다.
선리의 변론에서 보인 치밀한 고증을 토대로 한 그의 논리 구성은 그의 학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아울러 방대한 자료의 섭렵을 통한 그의 달변은 당대 불교계를 대표했던 인물, 백파와 맞서 논쟁을 이어간 그의 근기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리의 탐구 흔적은 그가 백파에게 보낸 〈여백파(與白坡)〉 3통과 〈서시백파(書示白坡)〉에도 나타난다. 논쟁의 중심에 있던 초의에게 일증(一證)했던 성의 있는 그의 학문적 태도는 “대사와 함께 한번 증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라는 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편 추사는 제주의 풍토를 감당하지 못해 “먹으면 체하는 병으로, 더욱 지금의 처지가 가장 고민됩니다”라고 실토한 것. 초의가 보낸 포장(泡醬)으로 심신을 달랬던 그였기에 “위도를 뚫는다면 신선세계에서 만들었던 더할 것 없는 묘미(妙味)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 하였다.
이는 초의에게 포장을 보내달라는 간청인 셈이다. 포장은 2월에 담근 장에 더덕이나 도라지 같은 것을 침장하여 만든 일종의 장류라 여겨진다. 이런 진미를 얻어 위를 달랜다면 신선세계에서나 맛 볼 수 있는 묘미라니 포장을 청하는 그의  은근한 요구는 이렇게 맛깔스럽다. 지기(知己)란 이런 멋이 있어야 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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