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4〉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연관 스님

연관 스님 (봉암사 등 제방에서 수행) 〈조계종 표준금강경〉 편찬위원장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역임 실상사 수월암에서 경전 번역 및 정진
소식하고 후학들 하는일에 간섭 안해
기억력 탁월, 칠판가득 외워쓰고 강의
스님 명성은 타고난 소양과 노력 결과
경전 번역할 때 직역 고집

-스님은 탄허 스님의 화엄경 교정 작업을 하신 분입니다. 어떤 연고로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나요?
저는 1967년도에 출가해서 주로 선방에를 다녔어요. 그 시절, 옛날에 어릴 때에는 바람기가 있어서 여기저기 선방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상원사 선방에서 결제를 하고 지내는데 오대산 단풍이 드는 것을 보고서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어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누더기를 입고 새벽에 걸망을 지고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는 여기 저길 다니다가 상주 남장사가 문중 절이라, 그 절 나한전의 방을 하나 얻어서 혼자서 지내게 되었어요. 거기에 있으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군불을 때고 있는데, 어느 날 제 앞에 나타난, 키가 큰 사람이 있었어요. 딱 보니 그 사람이 무비 스님이었습니다. 그 무렵에 제가 무비 스님에게 제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쓴 것 같아요. 무비 스님은 저를 보더니만 당장 짐을 싸라고 그러는 거예요. 무비 스님이 날 데리러 온 것이지요. 스님은 당장 가자고, 차를 세워놓고서는 그랬어요. 그래서 그 길로 무비 스님을 따라온 곳이 탄허 스님이 작업을 하시던 서울 세검정의 대원군 별장이었어요. 그곳에서 탄허 스님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교정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대원군 별장(석파정) 시절의 생활을 들려주세요.
그때에 탄허 스님이 하시는 것을 교정 본 사람은 처음에는 저하고 무비 스님 단 둘이었습니다. 본래 교정은 둘이 보아야 하거든요. 그 밖에 사무를 돕던 처사 한 사람이 있었고, 시봉으로는 윤창화가 있었죠. 제가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참여는 했는데 사실 저는 솔직히 화엄경을 교정 볼 실력이 있어 간 것도 아니고, 지금이나 그때나 글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오직 무비 스님의 인간적인 배려가 작용한 것이라 봅니다. 아마 제가 측은해서 데리고 간 것이 아닌가 하지요. 저와 무비 스님은 해인사 선방에 같이 살면서 무척 친하게 지냈어요. 무비 스님은 저의 선배님이신데, 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셨어요. 그리고 그때에는 아침 먹고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강의를 하셨어요. 그때 들은 것이 치문하고, 대학과 중용인 것 같아요. 그 강의를 저와 무비 스님, 창화, 처사 등이 들은 것 같아요. 강의를 듣고서는 하루 종일 교정을 봤죠. 그때는 먹을 것이 없었고, 가난했어요.

-그곳에서 작업을 하다가 1974년 초에 개운사의 대원암으로 이전하였지요?
맞아요. 본래 대원암은 비구니 절이었는데 총무원에서 비구니들을 흥국사로 내보내고 탄허 스님이 그리 입주한 것이죠. 그렇게 된 것은 탄허 스님이 그리 훌륭한 일을 하시는데 절이 없어서 되겠나 해서 총무원에서 결정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죠. 그 세부 사정, 정치적 결정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때만 해도 제 나이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것은 몰랐죠.
-그런데, 대원암에서는 일장·시몽 스님 그리고 비구니 스님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사정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대원암에서도 처음에는 저와 무비 스님 둘이 하였는데, 그때에는 대원암에다가 사진 식자기를 세 대나 들여놓아서 하루 종일 ‘타딱’ 하면서 기계가 돌아갔어요. 그러니깐 물량이 부족한 것 같고 그래서 사람을 더 부르자고 저하고 무비 스님이 상의해서 일장 스님을 데려오게 되었어요. 일장 스님은 무비 스님하고도 알고, 저도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그 스님은 글이 좋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와 무비 스님이 일장 스님을 데려오기 위해서 통도사의 어느 암자까지 내려갔습니다. 가서는 “서울로 올라갑시다”고 해서 대원암에서 작업을 같이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수좌로 살다가 서울 시내에서 갇혀서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답답해서, 그냥 걸망을 싸고 나왔어요. 제가 나온 이후에 무비스님도 나왔지요. 그래서 교정 1세대가 나오니 교정볼 사람이 더 필요하니깐 일장·시몽 스님 외에 비구니인 성일 스님과 또 다른 비구니 스님이 들어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요. 그때에 그곳에는 고려대 출신인 최옥화(일초)라는 사람이 머리를 깎고 있었어요.

-대원암에서 탄허 스님에게 배운 것, 영향받은 것이 있다면?
글쎄요? 저는 그 시절 학문에 뜻을 크게 두지도 않았고, 강원도 졸업하지 않았고, 글을 배운 적도 없어서 공부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그런 데에는 학문의 기반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영향을 받는 것인데 저는 그런 바탕도 없었고 또 나이도 어렸어요. 그래서 어린 놈이 노장님에게 뭘 묻지도 못했고, 그리고 그때에는 제가 말수가 적었어요. 그러니까 스님께서 저에게 “말이 적으면 도(道)에 가까운 법(法)인데…” 하는 말은 들었지요. 다만 그때에 탄허 스님께서 고려대에 가셔서 장자 강의를 하셨고, 삼보법회에 가셔서는 기신론 강의를 하셨는데 저는 스님을 모시고 가서 들었습니다. 저는 기신론 강의를 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감화를 받았어요. 스님은 규봉의 기신론소를 갖고 강의를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감명을 받았어요. 그 강의가 저에게는 참 좋았어요. 고려대에서 장자 강의를 하실 때에는 고대 교수 몇십 명이 들은 것 같은데, 그 교수들은 인사도 잘 안 하고 그러데요. 그때에 스님이 교수들에게 큰 소리로 열강을 하시고, 자기 자랑을 하신 것은 기억에 있어요.

-대원암 시절, 지근거리에서 보신 탄허 스님에 대한 일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보니깐 스님은 밥을 무척 적게 자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해도 관여를 안 해요. 제가 거기에서 작업을 하니깐 자연히 스님의 상좌들하고 친하게 지내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 스님들이 먹을 것을 사와서 저희들과 같이 먹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뒷방에서 막걸리를 먹고 떠들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스님은 그런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하고 그냥 가버립니다. 저희들이 교정하는 방에 슬그머니 오셔서 드링크제 한 박스를 놔두고 가신 것이 기억나네요.

-대원암에서 나온 이후에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뵈었나요?
대원암에서 말없이 걸망을 지고 나와 버려서, 저는 스님을 뵐 체면과 염치가 없어서 그 직후에는 찾아뵙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님이 받은 인촌상 수상식장에도 안 갔어요. 또 스님에게 화엄경도 직접 받지 못한 것 같아요. 그리고 난 후에 1977년인가, 월정사에서 열린 화엄경 특강에 참여해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 겨울을 스님에게 배우게 되었지요. 그때 제가 월정사 특강에 가게 된 소회를 솔직히 말하면 학문에 큰 뜻을 두고 간 것은 아니고, 제가 아는 스님들이 그곳에 많이 모인다니 얼굴도 볼 겸, 바람도 쏘일 겸 해서 간 것이지요. 강의를 들은 스님들 중에서는 내가 나이가 어려 끄트머리에 속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달 동안은 꼬박 강의를 다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받은 수료증과 기념 앨범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거기에서 축구를 하던 것이 기억에 있어요. 그리고 그때에 심백강이라는 유생도 와서 배웠고, 스님의 시봉을 한 사람이 환원 스님이었어요. 멱정 스님도 생각납니다.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들으시면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무엇보다도 스님의 기억력이 엄청 좋았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큰 칠판에다가 모든 것을 외워서 다 써버렸어요. 그 칠판에 꽉 차게 써 놓고 강의를 하셨어요. 스님이 강의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유불선 삼교를 하나로 회통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동시에 왜 회통한 것이 하나인가를 많이 이야기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스님이 그렇게 강의를 외워서 하시고, 유불선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것은 타고 난 데다가 노력을 엄청나게 하신 결과일 것입니다.

-연관 스님은 1980년대 초반, 직지사의 관응 스님에게 3년을 배우시고 전강을 받으셨어요. 혹시 관응 스님에게 들은 탄허 스님의 이야기는 없습니까?
관응 스님도 경학에는 일가견이 있는 스님이지요. 기억력도 좋으시고 특히 유식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을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관응 스님이 유식을 강의하실 때에 탄허 스님이 와서 들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탄허 스님이 한문과 유불선의 대가이신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의를 들은 장소와 시기는 잘 모르겠어요.

-탄허 스님과 관응 스님을 비교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나요?
글쎄요, 제가 표현한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두 스님의 차별성에 대해서 제 소견을 말해 보지요. 관응 스님은 세상을 편하게, 고생 없이 사신 어른입니다. 머리도 좋으시고, 책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고, 일본 유학도 가시고, 유학 시절에는 신도 보살이 많은 후원도 해주셨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관음기도를 많이 하셔서, 관음보살의 위신력을 받아서인지 모든 일들이 수월하게 풀렸다고 그래요. 관응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큰일이 자연적으로 풀렸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관응 스님의 학문도 편안한 것 같아요. 학문이 수월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학문에 대해서 어렵게 골몰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노장님은 노장님 느낌으로 이해를 하였으면, 슬쩍 그 정도에서 머무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산 스님은 관응 스님을 포교사 기질도 있으시고, 선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를 하였다고 그러시지만, 제가 볼 적에는 투철하게 골몰한 것은 없지 않았나 봐요. 그에 비해서 탄허 스님은 삶 전체를 보면 파란만장하셨고, 고투를 하시면서 역경(譯經)을 하셨잖아요. 그리고 학문을 대하는 노력이 집요하시고, 이를테면 ‘결기’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의 인생에 역경(逆境)이 있어야 학문이 여물어요.

-연관 스님은 〈죽창수필〉, 〈금강경간정기〉, 〈선관책진〉 같은 선서(禪書)를 번역하셨어요. 이런 입장에서 탄허 스님의 직역 위주의 원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맞아요. 탄허 스님은 경전을 번역하실 때에 직역을 고집하셨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조금 들다 보니, 스님의 그 원칙이 맞다고 봐요. 그리고 저도 경을 번역할 때에 스님이 하신 작업의 성과물을 많이 배우고, 참고하고 있어요.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면, 한문도 외국어라 한문대로의 문법과 원칙이 있어요. 이런 것을 우리들이 잘 알아야 되거든요. 저는 작업을 할 때에 잘 모를 때에는 탄허 스님이 하신 것을 제일 중요하게 봅니다. 스님이 하신 것 그것을 바탕으로 번역하지요. 이렇게 후학들은 탄허 스님의 것을 기본으로 해서 번역도 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솜씨를 부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하여간에 저는 탄허 스님의 직역을 원칙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탄허 스님께서 그 같은 작업을 해놓지 않았다면, 그걸 누가 하겠느냐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스님은 우리 승려들이 보는 기본 경전 모든 것을 직역으로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그것 잘해 놓으신 거예요. 앞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윤문을 하고, 문장을 다듬어서 멋지게 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 누구라도 할 수 있지요. 어쨌든, 탄허 스님은 모든 것을 다 했어요. 이런 것을 탄허 스님이 아니면 누가 할수 있겠어요. 저도 나이가 들다 보니 탄허 스님의 글을 보면 아주 좋아요.

-스님은 탄허 스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탄허 스님에 대해서는 대종사, 대강백, 선교를 겸수한 고승 등 다양한 말들이 있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탄허 스님은 선(禪)을 강조한 분입니다. 스님께서는 불교 경전을 3년을 읽느니 참선 세 시간 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어요. 또 기독교 3년을 하느니 불교 석 달 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어쨌든, 탄허 스님은 불교의 생명은 참선이라고 하셨어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노장님은 늘 “참선해라”라고 저희들에게 그렇게 말씀했어요. 스님이 그렇게 선을 강조하신 것은 한암 스님 밑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탄허 스님을 불교사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를 새길 수 있을까요?
지금껏 탄허 스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사실 우리 불교를 이해하고 배우려면 한문을 버릴 수 없어요. 중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한문으로 된 것이 바탕이니까, 한문을 버리고서 불교를 알 수는 없어요. 최근에는 초기불교 등의 영향으로 산스크리트 같은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이지만 한문을 절대로 제외할 수는 없어요. 바로 그 점을 탄허 스님이 담당하셨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님이 하신 그런 것은 누가 못 따라와요. 제가 볼 때에 우리 불교계에서는 예전에 봉은사에 있었던 역경사 양성소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곳에서 역경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창순 선생님이 하신 태동고전연구소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런 연구소를 우리 조계종단에 만들어서 아주 전문적인 인재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한문으로 된 것은 외워야 합니다. 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하면서 승가교육을 한글로 해야지, 그렇지 않고 한글 중심으로 나가면 후에 가서는 문제가 많을 것으로 봅니다. 거사님도 기회가 있으면, 그런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세요.

-오늘 귀한 증언과 솔직한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 여러 이야기가 탄허 스님의 역사 복원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김선생님이 참고해서 취사선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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