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마음으로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게 지혜입니다

 

▲ 그림 최주현


내가 가는 이 길이 부처의 길입니다.
굶었든 먹었든
누가 와서 그냥 따귀를 대빵 주먹으로 갈기든
‘이게 부처의 길이다.’이럭하고선 가보세요.
그럼 진짜 부처가 되죠.
도둑질을 해도 꾸준히 하다 보면 아주 그냥 도가 트듯이
이 공부도 줄창 그러다 보면 바로 자기가 진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오공의 뜻에 대하여

문) 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오공 즉, 공심 공생 공용 공체 공식의 뜻에 대해 궁금합니다.
답) 내가 항상 둘로 보지 마시라, 둘로 생각하지 마시라, 둘로 행동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뿌리가 내려서 완벽하게 자기가 잡혔다면 꿈에도, 하다못해 벌레를 봐도 둘로 보지 않는다. 어떠한 무서운 귀신을 본다, 어떠한 뱀을 본다, 어떠한 큰 짐승을 본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앞에 닥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공생이라는 얘기 많이 하죠. 공생. 내 몸뚱이 하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생입니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도, 오장육부에 생명들이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봐도 공생이요, 외부의 모두를 봐도 공생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공, 공을 갖다가 수만 수십만 개를 한데 합쳐도 공은 공이거든요.

모든 살아 있는 것도 모습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생명은 똑같습니다. 생명이라는 건 하루 만에 죽는 거나 며칠 만에 죽는 거나 여든 만에 죽는 거나 백 살 만에 죽는 거나 생명이라는 자체는 똑같아요. 또 마음을 천차만별로 쓴다는 것도 다 똑같아요. 그런데 사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이런 게 자기네들 통 속에서, 즉 말하자면 자기네 끼리끼리 살기 때문에, 그 끼리의 모습, 행동으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이치를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우리가 부처님, 보살들 사는 생각을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습은 다를지언정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마음은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어요. 공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모습은 죄 다르지만 그 마음 씀씀이야 어디 둘이겠느냐. 이게 바로 공체입니다. 요만한 모습도 있다는 거, 움죽거리고 산다는 거 이거죠. 공체. 우리가 전부 공체죠. 이 짐승도 이렇게, 소나 무엇도 딱 배 갈라서 이렇게 다 해 놓으면은 참 그거 볼 만합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죠. 육신을 잘라서 갈라놓으면 그 육신이 죽는 바람에 그 육신 속에 있던 생명들도 다 같이 죽게 되죠. 그러니까 공체며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용이다 이런 거는 예쁜 사람 미운 사람 이런 거를 따지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더 불쌍하게 생각해라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면 전자에 어떻게 산 것을 다 알게 돼 있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걸 받는 것이지 자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하고 뭐 어떻게 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공부 못하고 사는 것도 다 일리가 있어서 공부 못한 거고 또 그렇게 못살게 된 것도 일리가 있어서 못살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못살게 되는 것도 잘살게 되는 것도 그게 다 똑같아요. 잘산다고 해서 근심 걱정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못사는 사람 근심이 요만하다면 잘사는 사람의 근심은 큰 대들보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것이 잘살든 못살든, 못사는 사람은 끼니를 거를까 봐 앨 쓰지만은 잘사는 사람은 끼니를 거를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거죠. 이 문제를 여러 가지로 볼 때 이게 참, 우리 같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도 나를 버리지 못해서 편안치 못하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다, 이게 어느 정도 돌아가야 진짜 보살행으로 넘어간단 얘깁니다. 남이 보살이다 보살이 아니다 이러기 이전에 말입니다. 그럼 스스로서 행동하는 거 보면 벌써 알아요. 그 행동은 자기가 마음 쓰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니깐요. 그러니까 그게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이다. 공용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공식으로 돌아간다. 찰나찰나 환경이 바뀌고 또 환경이 바뀌고, 찰나찰나 바뀌면서 돌아가는 일들을 그냥 여여하게, 바뀌는 대로 그냥 바꿔지면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본래 우리가 여여한 생활을 산같이 물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 마음들이 그렇게 되질 않아서 그걸 인식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그걸 어렵게 생각하고 그냥 잠재해 버리죠.

공식 하면은 벌써 원식인데 ‘공식’ 하니까 먹는 걸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번 이 모습이 있는데 이 모습이 저 모습 안으로 싹 들어갔을 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모습 안으로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만 개가 들어갔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 있는 자체가 바로 공식이기 때문이죠. 공한 자체기 때문에 이 공한 자체에 이 공한 자체가 모두 들어가면 그냥 공식이 돼 버리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둘이 아니다. 보살도 중생하고 둘이 아니다. 벌레하고도 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그 점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데, 정말 우리가 그 도리를 모른다면 도깨비장난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영상으로 그냥 체가 생겨 가지고 그냥 구름 위에 떠다니면서 그냥 움죽거리고 사는 것과 같은 거죠.

이거 정신 차려서 알지 못하신다면 요다음 생에 자기가 훨훨 털고 나설 수가 없어요. 이건 ‘듣고 보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 바로 듣고 알 수 있다는 얘기죠. 이 모습 아닌 모습, 생명 없는 생명, 마음 아닌 마음, 함이 없는 용, 또 모든 것을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먹음 없이 먹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다 바닷물을 삼킨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삼켰으면 바닷물을 토해 낼 줄을 알아야 하는 그 도리가 원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게 지금 말로 공식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되죠. 그러면 그 바닷물을 다 집어먹었을 때에 그 물 속에는 뭐든지,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을 테죠. 죽는 것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들어 있고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다 들어 있는 거죠.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그 마음속에, 별의별 가정 속에 그 애타는 마음들, 이쪽에는 이런 거 저쪽에는 저런 거, 모두가 이렇게 들어 있는 그 자체가 몽땅 그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죠.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는 거를 다 삼킬 수 있어야만 그게 공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공식이라고 진짜 하려면 그것도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그 물을 정화시켜서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 이런 소리죠.
이 문제가 참, 우리가 그냥 듣고 그냥 보고 이렇게 그냥 헤어지고 이러지만은 그걸 헤어지든지 듣든지 잠을 자든지 깨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살아나가면서 악한 사람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만나고 악한 일도 생기고 선한 일도 생기는 데서 다 이거를 둘 아닌 도리를 배우시란 얘기죠. 악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끔 관해 놓으면 그것이 스스로서 둘이 아니게 처리가 된단 얘기죠. 그것이 이렇게 공부하는 길이거든요. 또 우리가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악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은 그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그걸 관해 놓아라. 상대방도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성취된다거나 그것이 잘 무마가 된다거나 이렇게 된다면 그게 바로 경험이자 바로 자기가 길을 가는 데에 걸림 없이 여여하게 걸어가는 길이죠. 이게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그런 겁니다.

여여하게 된다는 것이…

문) 대행 스님께서는 10년 이상을 산에서 많은 수행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같은 중생들은 집에 가서 밥 먹고 편안하게 자면서 마음엔 고통만 있고 요럴까 조럴까 생각도 많고 그러니 스님처럼 여여하게 된다는 것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멀어지는 거예요.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10년, 20년, 30년을 했어도 종이쪽 하나 차이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여여하지 못한가? 다들 부처라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저분처럼 저렇게 수행을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할 수가 없지.’ 이렇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또 ‘내가 저렇게 보살이 되지 못했고 또 부처가 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이렇게 곤고하고 자꾸 이렇게 끄달리게 되고 이렇게 괴롭지.’ 이런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왜? 오직 내가 했던 이것도, 이것도 바로 부처의 길임에는 틀림없다 이겁니다. 부처의 길이에요, 이 가는 길이. 굶었든 먹었든, 따귀를 누가 와서 그냥 대빵 주먹으로 갈기든 ‘이게 부처의 길이다.’ 이럭하고선 가 보세요. 그럼 정작 진짜 부처가 되죠. 전부 부천데 부처님이 되시는 거죠, 그때 가선.
그리고 요럴까 조럴까도요, 부처의 길입니다. 요렇게 조렇게 바꿔지는 것도 부처의 길입니다. 그래서 걸리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이 왜 걸리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요렇게 바꿔졌든 조렇게 바꿔졌든 바꿔진 사이도 없고 안 바꿔진 사이도 없어요. 자기가 생각 낸 대로. 그 도리를 알기 때문에 종이짝 하나 사이다 이겁니다. 제발 좀 어렵게 생각들 좀 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꾸준히 해 나가세요. 그러면 뭔가가 자기한테서 그게, 즉 말하자면 도둑질을 해도 꾸준히 하다 보면 도둑질이 아주 그냥 도가 트듯이 이 공부도 줄창 그러다 보면은 바로 자기가 진짜 부처가 되는 겁니다.

시간 정해 놓고 좌선하고 있는데
문) 참나를 알아보리라고 법당에 가서 좌선을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좌선을 해야만이 되는 건 선이 아니에요. 일상생활이, 모두 일거일동이 다 참선이거든요. 앉아서 좌선을 해야만이 되는 게 아니라, 앉아서 좌선을 해서 내 마음을 숙연히 하고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리하게 이렇게 수행은 할 수 있을지언정 도는 이룰 수가 없어요. 도라는 것은,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는 크고 작고 악하고 선한 것을 한데 합친 눈물이 바로 자비라 그랬거든요. 악하고 선하고 안고 서고 눕고,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움죽거리는 거 하나하나, 티끌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놓는 것, 우리가 놓고 돌아가는 거. 이렇게 말하면은 아주 쉽겠군요.
‘색즉시공’ 이랬죠? 색으로부터 들어갔어요, 공으로. 공에서 ‘공즉시색’ 색으로 다시 나왔거든요. 그랬으니까 색으로 들어서 공을 돌아서 색으로 다시 난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선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 참선인가 말입니다. 우린 다시 ‘부처님께서 동쪽의 샛별을 보고 깨쳤다.’ 그랬는데, 우리는 임신을 해서 이 세상에 이 육신이 났다. 또 육신이 나 가지고 성장을 하니까 마음을 깨쳐라. 마음이 나야지 육신과 더불어 실상이 된다. 하나하나 버릴 게 없는 것이 그때는 또 나오지 않느냐 이겁니다. 하나도 가질 게 없고, 가질 게 없는 걸 알아야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것이 나옵니다. 그때 색으로 다시 나와요. 그럴 때 하나하나 소소영영하게 이것이 법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또는 물질 하나하나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 도리를 알면은, 버릴 게 없기 때문에 하나도 내가 가지고 다닐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거든지 잘하는 거든지 잘된 거든 잘못된 거든, 어떠한 물건이 되든 어떠한 물질이 되든 그런 거를 다,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상관없이 놔라 하는 것이 바로 이 선 공부입니다.

진정으로 베푼다는 것은
문)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 보면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 그저 돈을 내어 주는 것만이 좋은 것인지, 그게 진정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헛갈립니다. 진정으로 베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우리가 마음을 착하게 써야 된다 이런 게 있죠. 우리가 거저 이 컵을 누구를 줬으면 컵이 꼭 나한테 오게 돼 있습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돈을 만약에 불쌍한 사람에게 이렇게 줬는데 그 돈이 어디 틈을 타서 길을 찾아서 자기한테 다시 그 돈의 몇 배가 돼서 오더란 얘깁니다. 그런데 이걸 내 주면은 우리가 당체 어렵게 되고 못살게 되고 그러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시게 되겠죠. 그러나 진짜로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자기 마음이 움죽거리게 되니깐요. 마음뿐이 아니라 몸까지 움죽거리게 되니깐요.

그런데 길에서 앉은뱅이라든가 또는 서서 다니면서도 부모가 없어서 얻어먹는 애들이라든가 이런 애들을 그냥 주면 또 그 돈이 없어지게 돼요. 그들에게 이렇게 돈을 주고 그 애를 한번 지켜보니까 돈을 가서 다 뺏겨요. 뺏기고 난 뒤에 저녁 한 끼니 우동 한 그릇 사 먹여요. 왕초가 있더군요, 그것도. 그러니까 그런 걸로 줘서 잘되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떡하든지 그 길을 이쪽도 좋고 이쪽도 좋게 빠져나가게 해서 좀 저절로 잘 사람을 만나서 사람 노릇을 하고 살게 이렇게 해 주는 것이 원칙이겠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을 하셔야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주머니에서 탁 털어서 딱 줄 때에 내가 내 주머니에 얼마가 있고, 언제 이거를 쓰고, 이런 생각을 하면은 이거 못 줍니다. 절대로 못 줍니다. 돈 쓸 데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을 다 없앱니다. 이게 급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건 남의 일이기 때문에 급하지 않다 이게 아닙니다. 급하니깐 빼 줬다. 그런데 주머니가 비었으니깐 그 이튿날 또는 그날 밤에 쓸 돈이 또 주머니에 들어오더라. “스님, 그거 당장 쓰실 건데요.” 이러거든요. "쓸 거니깐 쓰지, 안 쓸 거라면 쓰니?” 그러죠. 쓸 거니까 쓴다 이거예요. “주머니가 비는데요.” 그러거든요. “응, 주머니에 비면 또 담기겠지, 뭐.” 이게 믿지 않을는지 모르시겠지만 자불이 알고 있으니깐 이거 다 갖다 주게끔 만듭니다. 돈 때문에 애 쓰지 않는 사람이 갖다 주게끔. 그래서 돈 때문에 금방 죽겠다, 자식들하고 죽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기면 그걸 줘야 됩니다.

우리는 여러분한테 받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근데 받는 거는 다 받지만 주는 거는 왜 그럼 몰래 그렇게 하시는 일이 많으냐. 몰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죠. 내가 만약에 가난해서 그 돈을 좀 받아 가는데 그걸 전부들 알려 놓으면은 내가 미안해서 거기를 어떻게 또 발을 댑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죠. 그러니깐 여러분도 그렇게 하든 못하든 마음은 좀더 넓게 둥글게 쓰시라 이겁니다. 마음을 둥글게 쓰시면은 자식네에도 그게 내려가고 그냥 대대로 이렇게 물결 흘러서 내려가듯 그냥 다 내려가게 돼 있습니다. 누가 뭐 받아라 안 받아라 이걸 떠나서 그냥 받게끔 돼 있습니다.


저같이 무식해도 마음공부 할 수 있는지요
문)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근근이 살다보니 가방끈이 좀 짧습니다. 저같이 무식한 사람도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요.

답) 우리가 살아나가는 생활이 없고 인간이 없다면 글을 어떻게 모두 만들어 놨을 겁니까. 글도 이차예요. 내 근본부터 알아야 그 글도 필요하게 쓸 데가 있는 거지, 내 근본을 모르고서 어떻게 글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학식이라는 건 나중에 내가 공부를 다 해 가지고 융통성 있게 남한테 얘기해 줄 때 쓸 수 있는 그런, 즉 말하자면 언어라고 그럴까요?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주 무식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며느리도 또 데려왔습니다. 근데 이 사돈집도 무식하고, 이 지금 양쪽 사돈이 다 무식한 겁니다. 그래서 이 지금 사돈집에서 딸을 좀 보내 달라고, 자기 마누라가 죽었으니깐 보내 달라고 편지를 하려니 글을 알아야 편지를 하죠. 그래서 하얀 백지에다가 관을 하나 그렸습니다. 관을 하나 그려 놓고서 그냥 보냈습니다.
저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왜 대막대기 들고선 이렇게 한 그거를 하나를 그려놓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하나 그리고 그 대막대기 그리고, 또 사람 죽으면 머리에 쓰는 건 있지 않습니까. 그 건 쓰고 있는 거를 하나 그려서 놓고 관 하나를 앞에다 그려 놓고 그래서 그걸 착착 접어서 보냈습니다. 예전에야 사람들이 들고 다녔지 언제 뭐 지금처럼 부치고 이랬습니까?

그래 사람을 시켜서 보냈더니, 그쪽은 그쪽대로 무식한 거예요, 또. 가만히 보니깐, “옳지, 옳지! 그래 맞았어. 오, 상을 입었구나.” “얘야, 아가야!” “예.” “너희 상을 입었으니 어서 가 봐라.” 그러니까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얘, 이걸 봐라.” 그러니까 그 며느리조차도 무식하거든요. 그런데 보니깐 아, 참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하는 소리가 “야, 글도 멀고 다 필요 없구나. 이게 좀 좋은가. 이거는 뭐 복잡하게 볼 것도 없고 아예 그게 참 명필이로다.” 저 아버지가 명필이라는 거예요, 며느리가 하는 소리가. 그러고 하니깐 사돈 영감인 시아버지가 있다 하는 소리가 “참, 우리 사돈, 참 잘 만났어. 명필이야.” 이랬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 그 뜻으로 아는 거, 이게 우리가 학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런 데 쓰는 학식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대로 진실하게 사람의 마음을 가지면서 항상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때에 그 진실하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그 마음에다가 융통성 있게 이렇게 해 나가는 게 지혜라고 볼 수 있겠죠. 그 지혜를 풍기면서 우리가 잘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면 그 글도 필요하겠지만, 이왕지사 글이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가 그렇게 명필로 쓰자고요. 그래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자기가 융통성 있게 지혜를 가지고 진실하게 사는 자 앞에는 누가 그걸 당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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