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도리의 진리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나가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언제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지도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두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주인공에 맡기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면서
남을 증오하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니까요.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또 한 가지는, 아까 얘기했듯이 내 주인공을 믿고 맡기는 도리를 물러섬이 없이 공부하신다면 그것이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 혹성 자체가, 나로부터 전체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져 있고 전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는 까닭에 우리는 고마운 줄도 알아야 돼요. 물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네? 여러분은 공기 없이는 하루도 못 살죠? 근데 너무 흔해서인지 고마운 줄을 몰라요. 부모한테 받아 가지고 나온 육신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효도가 되는 거라고요. 그걸 모르면 안 되지요. 그걸 모르면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법을 알겠습니까? 여러분한테 그러한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공부를 할 때는 어느 거든지, 우주 전체를 다 한 손에 쥔다 해도 항상 무심으로 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는 겁니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생각을 해도 생각함이 없다 이 소립니다. 화를 냈어도 화낸 사이가 없는 거죠.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놓느냐고 하시죠? 그렇게 하시면 그냥 놓고 가는 거고 세 가지 네 가지를 같이 하는 겁니다. 아까 얘기해 드렸듯이 말입니다.

그 도리를 공부하면 능력이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것에도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꽃을 볼 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치, 이 꽃은 모르더라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꽃이 내 마음을 알게 돼요. 그런데 내 마음을 내가 알기 때문에 이 꽃 마음도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꽃하고 마음을 나눌 수도 있는 거죠.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죽은 거든 산 거든, 생각이 없는 거든 있는 거든 다 같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일체를 탐험할 수도 있고 비춰 볼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는 이런 대인이 되시라는 거지, 마짓밥이나 올려놓고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하고 영령들 위패나 써서 쭉 붙이고 여기저기 놓고 빌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불교라는 거는 ‘참불교’입니다. 불(佛)이라는 건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며 교(敎)라는 건 인간이 됐기 때문에 좋고 그른 걸 알아서 자식들에게도 말을 좋게 해 주니까 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입니다. 그런데 내 종교 네 종교를 왜 따집니까? 기독교가 들어오면 어떻고 천주교가 들어오면 어떻고 불교가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다릅니까? 마음이 달라서 그렇지요. 여러분이 공깃돌 가지고 놀고 또 땅치기 하고 소꿉장난하다가 “얘 아무개야, 밥 먹어라. 늦었다.” 이러면 그냥 툭툭 털고 들어가시죠? 예전에 안 그래 보셨어요?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라놓고 살거든요.

지금 그 무전 전력, 무전 광력, 무전 자력, 무전 통신, 무전 입력 모두를 여러분도 자유스럽게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여러 분야에서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서는 물질 광선을 쬐어서 병을 치료하는데, 그것은 물질과 물질이기 때문에 치료에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광력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건 물질 아닌 무전 광선이기 때문에 자력이나 전력, 광력, 통신력이 다 거기 포함돼요. 여러분이 병에 휘둘릴 때, 만약에 능력이 종합적으로 포함된 광선을 쬔다면 그것은 한 찰나에 없어집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모두 한군데서 나고 들지만 전기도 용도에 따라서 쓰이듯이, 생활도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듯이 우리가 다 용도에 따라서 마음을 조절하여 모든 자력을 쓸 수 있습니다. 얼굴은 하나인데 귀가 따로 있고 눈이 따로 있어서 보는 것 따로 있고 듣는 것 따로 있듯이, 그 능력이 같이 하고 있지만 용도에 따라서 적게 쓸 수도 있고, 요걸로만 쓸 수도 있고 저걸로만 쓸 수도 있고, 다 같이 쥐고 쓸 수도 있는 그러한 여건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면, 왕가에서 권도법이라고 하죠, 권도. 신하들이 아무리 진언을 해도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냥 권도법으로 해결을 하죠. 여러분도 그런 권리가 있다는 얘깁니다. 자비의 권도법. 이것은 자비의 칼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불기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죠. 그거를 모르니까 가난이나 병고 액난 같은 것이 닥치고 의욕이 없고 허망하고 괴로우며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없고 삶의 보람도 느끼지 못해요.
부처님께서 기복으로, 타력 신앙으로 하라고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참자비를 알게 하고 참자비의 법도를 알게 하고 참자비의 중용을 알게 하고 사람 사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겁니다. 그 뜻을 가르치시고 죽고 사는 걸 가르치시고, 사생이 다 부모 형제가 있고, 또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면서 아픔을 견디고 고에서 허덕인다는 그 사실을, 뼈를 깎는 아픔을 그렇게 견디고 살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가르치셨는데도 여러분은 생각조차도 못해 보고, 자기 속에 자기의 근본이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이 여러분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어떠한 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내기 이전, 그 자체 핵이라는 것은 어느 것도 붙지 않는 자리입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말입니다. 이건 표현입니다. 목이 타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렇게 물을 마시는데 (물을 한 모금 드심) 한 모금 먹는 그 순간에, 지금 목이 타서 죽겠는데 ‘내가 이걸 먹을 것인가, 안 먹을 것인가?’ 이게 거기 붙습니까, 안 붙습니까?
지금 자식이 “엄마, 물 줘”, “아버지!” 하고 지금 당장 뭐 좀 집어 달라고 그러는데 거기 뭐가 붙습니까, 안 붙습니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안 붙어요. “그러냐? 아이고, 얼마나 땀을 흘렸냐, 학교 갔다 오느라고.” 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부지런히 그거 갖다 주는 거지요. 거기 뭐가 붙어요? 거기 무슨 이론이 붙으며 거기 무슨 잘되고 못되고가 붙습니까. 또 애가 “똥마려워!” 하니까 바지를 벗겨 주기에 여념이 없는데 거기 뭐가 붙습니까? 붙지 않는 자리, 붙지 않는 거, 바로 그겁니다. 이론이 붙지 않아요.
만약에 이렇게 표현을 해 드려도 모르신다면, 내 입으로 10년 20년 이렇게 말해도 모르신다면 난들 어쩌겠습니까. 또 어떤 스님네들은 날더러 이단이라고 욕을 하죠. 나하곤 상관이 없어요. 허허허…. 왜 상관이 없나요? 상관이 없죠. 그건 그분들의 소견이고 마음이지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어요.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을 생각하면,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업신여겨 보지 말라고 그랬는데 사람이 그런다고 해서 어떻게 업신여기겠습니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일 잡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기 이전에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갖는다면 부처님 법 아닌 게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건 옳고 이건 그르다.’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유(有)의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건 옳고 이건 그르다. 그러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니라.” 하고 가르치셨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가르치신 줄 아십니까? “이것도 옳지 않고 이것도 옳지 않으니라.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어.” 그러니까 홀랑 모두 자빠졌죠?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느니라.’ 하니까요. 그럼 뭘 배워야 합니까?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뚜껑은 그릇이고 그릇은 뚜껑이니라.’ 이걸 가르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입니까,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입니까, 여러분 생명이 여러분입니까? 한번 따져 보세요. 어떤 게 여러분입니까? 셋 중에 따져 보세요. 생명이 여러분입니까, 마음이 여러분입니까, 몸뚱이가 여러분입니까? 잘 생각하셔서 인간의 도리를 지키면서 나가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언제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지도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두지도 않습니다.왜냐하면 뭐든 주인공에 맡기고, 남이 때리더라도 ‘아하, 내가 있으니까 맞지.’ 하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증오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 바로 좌선입니다.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하면 콧노래가 나오면서 일을 하게 되죠. 그러나 화두를 들고 그 화두 끊어질까 봐 애쓰고 애쓴다면 여러분은 껍데길 벗어나지 못해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태초며 여러분이 이 세상에 지금 있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런데 그 껍데기 속에 또 껍데길 붙여요? 그럼 언제 벗겨요?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오늘도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프로펠러가 일 초에도 수십 바퀴씩 돌아가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거를 붙들려고 하고 마음으로 그냥 기를 쓰고 안 놓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안 놓치면 뭘 하고 놓치면 또 어떻습니까? 그건 자기 소견이지 프로펠러는 그냥 돌아가요. 이유가 없어요. 근데 어리석게 왜 그걸 붙들려고 애를 써요? 그냥 돌아가는 대로 순응하면서 놓지요. 여러분이 하나나 고정되게 생활합니까. 지금 고정되게 먹고 고정되게 행하고 고정되게 만나고 고정되게 똥 누고 고정되게 보고 고정되게 가고 오고 그럽니까? 죽는 것도 고정되지 않습디다. 어려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고 그러지요. 만나는 것도 그런데 그걸 왜 붙들고 있습니까, 글쎄.

그리고 또 여러분한테 꼭 부탁 한마디 할 게 있어요. 애들이 나가서 안 들어오고 속을 썩이고 할 때, 온통 찾아다니고 들어왔는데도 욕이나 하고 밖으로만 온갖 짓을 다 한다면 오히려 애는 버립니다. 내가 아들이라는 거를, 자식이라는 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벌써 가설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주인공에 ‘주인공만이 저 애를 고칠 수가 있고 그 업장을 다 녹일 수가 있습니다.’ 하고 딱 맡겨 놓고 겉으로는 “얘, 너 어디 갔다 그렇게 늦었니? 그 몸도 부모가 준 몸인데 소중하지 않으냐. 그렇게 돌아다니더라도 건강해야지 몸이 나빠지면 안 된다.” 하고 좋게 말해 주고 따뜻하게 “배가 얼마나 고팠겠니? 어디서 뭘 먹었니?” 하면서 뭘 좀 해다 주세요. 아무리 밉고 속상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똥치는 막대기와 같은 어버이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데 한 번에 두 번에 안 된다 해도 그냥 물러서지 말아요. 항상 그렇게 하셔요. 또 자식에게만 그렇게 하는 게 아녜요. 부모가 그렇게 해 준다 하더라도 장래에는 그 자식이 자기 길을 걸어야 해요. 가시밭길이든 진창길이든 자갈밭이든, 무슨 길이든 걸어야 해요. 그렇게 가시밭길을 헤매지 않도록…. 우리는 나쁜 거 좋은 거 이렇게 상대적으로 되어 있죠, 네? 그런데 나쁜 게 있기 때문에 좋은 거를 안다는 그 사실을 아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 자식들이 고난으로 인해서 지혜를 키운다 하지만 그 고난도 알맞게 오게 해서, 그로 인해서 큰 빛을 알 수 있고 그것이 거름이 되게끔 할 수 있는 그런 자식들을 만들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인공에다가 다 맡겨 놓고서 잘해 주면, 돌아다니다가 언젠가 고달프고…, 장창 즐거운 게 아니거든요. 즐겁게 놀다가도 너무 지치면 그때는 따뜻한 데로 기어들게 돼 있어요. “아, 난 집에 들어가. 난 엄마 보고싶다. 난 집에 들어가.” 이렇게 부르짖게 돼요, 그땐. 그래서 오게 돼 있어요.

원주에서 이런 예가 있었죠. 자식 셋을 놔두고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나갔다는 거예요. 춤바람이 나서 나갔는데 아, 돈을 자꾸 솔솔 빼 가더니 그냥 집까지 다 팔아먹게 생겼어요. 이혼도 안 하고 그렇게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데도 자식들 때문에 남편은 마음이 약해져서 ‘딴 사람 얻느니 차라리 저 애들 엄마를 데리고 사는 게 낫지.’ 하고는 그냥 가다가 보니까 이태 삼 년이 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남편이 속이 썩어서 병이 들었어요. 병이 들었으니 이거를 어떡합니까? 차도가 없고 그러니까 그 남자가 우리 선원에 왔어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여자도 나무라지 말고 아무도 나무라지 말고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몸을 쉬어 가면서 모든 건 주인공한테 맡겨 놔라. 주인공만이 네 처를 해결할 수 있다. 나가든 들어오든 이혼을 하든 그런 것은 생각도 상관도 말고 주인공만이 해결을 해 주게끔 해라.” 이랬거든요. 그렇게 몇 달 가다 보니까 그 여자가 싹싹 빌고 어느 결에 들어와서 그냥 앉았더래요. 그래서 지금까지 잘 살아요. 그것이 뭐냐? 인간에게 자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자력! 아까도 얘기했죠? 그게 조절입니다. 손자병법보다 그게 더 편안하고 좋아요. 허허허….

저는 어떻게 게을러빠지고 그런지 예전에 뭐, 비가 오든 뇌성벽력이 치든 그냥 막 억수 같은 물이 내려가든 신발이 있든 없든…, 신발 벗어 들고 다닌 사람이니까. 시발점도 종점도 어디 갈 데도 없으니까요. 우리 공부하는 사람이 종점이 있을까요? 또 진리가 종점이 있습디까?
이 지구도 그렇고 혹성도 별성도 모두가 우리 인간보다 수명이 길죠. 혹성도 모두 차원대로 수명이 길고 그래요. 예를 들어서 여기 하루면 한 달이 될 수 있는 데도 있고 또 6개월이 될 수 있는 데도 있고…, 혹성마다 다 다르거든요. 그렇게 별성도 수명이 다르고 그런데….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괜히 찧고 까불려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이거는 이럴 것이다. 이거는 이렇게 와서 아주 파괴가 될 것이다. 이거는 이렇게 해서 그냥 폭발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니까 그 생각하는 대로 우주간 법계가 모두 통신이 되거든요. 그냥 통신이 되게 되어 있으니까 그쪽에서도 그걸 알게끔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그냥 일어나는 거지요.

그런데 물에서부터 오는 가스 종류도 수백 가지로 확산이 돼서 다르게 진화되거든요. 그러니 안개나 구름이 얼마나 많은 종류로 화해서 우리들을 이익하게 길러 내는가 아셔야 돼요. 태양도 그것을 조절을 하니까, 바깥에서 조절하고 안에서 조절함으로써 모두를 살리듯이 말입니다. 또 남편이 하는 일에 아내의 내조가 있으니까 가족이 함께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공부를, 공부라기보다도 공부라는 이름을 떠나서 우리 인간 도리의 진리를 파악하고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마셔요. 또 여기에 자주 오라면 “에그, 제 주인공 찾으라는데 절에는 가서 뭘 해?” 이러거든요. 여러분하고 우리하곤 달라요. 왜 다른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한 번 왔다 가시기만 해도 두절됐던 통신이 터져요. 여러분이 어떤 때 “나는 죽겠습니다.” 하고선 애쓰고 있어서 턱 보면, 보이는 물질이 아닌 영령들이 같이 앉아 있는 때도 있어요. 그래도 여러분은 모르잖아요.

내가 왜 이런 소릴 하느냐 하면 광력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충전을 해야 공부가 더 잘되기 때문이에요, 충전.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함으로써 입력이 된단 말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아이고, 저거 안됐구나.’ 하는 생각이 듦으로써 거기 입력이 된단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자주 오면서 자기 정성껏 하세요. 아니, 누가 여러분한테 집을 팔아서 가져오라나, 누가 여러분한테 무슨 대단한 것을 가져오라는 겁니까? 여러분이 집을 팔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태산더미나 하늘을 통째로 가져온다 해도 우리 마음의 지주하고는 못 바꿔요.

그러니 여러분도 그 지주를 잃지 말고 떳떳이 자기 성의껏, ‘내가 저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면서….’ 믿으라는 게 아니에요. ‘따르면서 지금 길을 인도를 받고 있는데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바로 저분의 입력에 의해서 충전을 받아야겠다.’ 하고 자기 성의껏…, 말 한마디라도 하고 가면 얼마나 좋겠소? 라디오도 전지에 충전을 안 하면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고 말입니다.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가는데 미국이라 한들 멀겠소?
아니, 이번에 뉴욕에도 안 갈 수가 없어요.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청년들이 지금 그걸 가지고 얼마나 많이 공부들을 하는데 이렇게 가깝게 한국에 같이 있으면서 그냥 물러설 수 있겠어요? 지금 거기에는 박사 학위 준비하는 사람들도 모여서 이 공부를 하고 있어요. 뉴욕뿐만 아니에요. L.A. 또 어디 주립 대학이라나 거기도 그렇고, 그렇게 모여서 공부들을 하고 있어요. 한 달에 세 번씩 서로 만나서 토론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게을리 하면 안 되죠.

지금 자기 두뇌에 물이 잡혀서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어떠한 괴로움이 있어도 그 도리를 파악한다면 겁날 게 하나도 없어요. 남한테 꾸러 다니지 않고 빌리러 다니지 않아요. 여러분 마음이 가난하니까 가난한 거지 여러분 마음이 풍족하고 풍요로운데 왜 가난해요? 가만히 보면 모두 일리가 있더라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그러면 오늘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서 서로 얘기를 하고 이랬습니다만 얘기 듣는 걸로 끝내지 마셔요. 나는 얘기로 끝낸 게 아닙니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길을 인도해 드렸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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