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의 견해 그릇됨 지적
초의 또한 백파 선리 비판
대흥사서 떡차 만든것 밝혀져

▲ 〈영해타운첩〉에 수록된 추사 편지.
추사의 명성은 정치적인 몰락에도 여전했던 듯하다. 조선을 대표했던 그의 예술과 학문적 궁리는 사람을 끌어 들이는 강인한 흡인력이 있었던가. “영남의 스님이 이제 돌아간다고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는 추사의 고백은 당시의 이러한 정황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편지는 〈나가묵연첩〉과 〈영해타운첩〉에 함께 수록된 것으로, 초의에게 청한 그의 걸명(乞茗)이외에도 조선 후기 불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신랄한 비평은 다음과 같다. 
 
두통의 편지는 이미 박아 편에 부쳤습니다. 영남의 스님이 이제 돌아간다고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의) 뜬 구름 같은 황당한 말은 대략 타파한 것이 있는 듯 합니다만 그의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 우습게 느껴집니다. 그 사람의 천품은 참으로 좋지만 들은 것이 모두 그 모양으로 황당한 것들이었습니다. 요즘 선림에서 애꾸눈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동요 시키는 것이 기괴한 말뿐이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차에 대한 일은 앞의 편지에서도 누차 이야기했지만 작은 떡차 몇 십 편으로는 얼마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100원어치만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7월 20일 늑만휴가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답장을 못했습니다. 당연히 추후에 보내겠습니다. 이 뜻을 전해 주십시오.

(兩角書 已付朴雅矣 嶺衲今又告歸 不知其何所聞而來何所見而去也 其浮雲荒唐之說 略有打破者 其眼似?乎爾 更覺一笑 其天分極好而所得聞者 皆如許荒 近日禪林中?却人動 輒奇怪耳 重呵重呵 茶事前書亦有縷及而小團數十片 恐不支幾時供 限百圓可以買取則似好 再深商之 如何如何  餘姑留不宣 七月二十日  万休有書 今未及答 當追付 及此意也)
  
 박아 편에 보냈다는 편지(7월 16일)는 지난 호에 소개한 바 있거니와 4일 만에 다시 차를 재촉하는 편지를 연이어 보낸 셈이다. 추사에게 초의의 편지를 전해 준 영남에서 온 스님은 4일 만에 추사와 이별을 고한 듯, 그와 나눈 학문적 교감을, “(그 사람의) 뜬 구름 같은 황당한 말은 대략 타파한 것이 있는 듯 합니다만 그의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 우습게 느껴집니다”라고 하였다. 아마 추사의 막힘없는 불교관이나 경전의 이해에 놀란 영남 스님의 태도를 이리 표현한 듯하다.

이어 추사는 “그 사람의 천품은 참으로 좋지만 들은 것이 모두 그 모양으로 황당한 것들이”였다는 자평을 초의에게 말한 것이다. 이 무렵 백파의 선리 문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는 당시 불교계의 그릇된 편견을 “요즘 선림에서 애꾸눈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동요 시키는 것이 기괴한 말뿐이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라고 할 정도였다. 백파가 자신의 선리에 대한 견해를 보냈지만 추사는 백파의 견해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초의 또한 〈선문사변만어〉에서 백파의 선리에 그릇됨을 지적하였고, 추사는 초의를 옹호한 바 있다.

제주 적거에서 차에 의지했던 추사는 “차에 대한 일은 앞의 편지에서도 누차 이야기했지만 작은 떡차 몇 십 편으로는 얼마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100원어치만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 하였다. 쓸쓸한 적거지에서 추사를 위로했던 차는 추사의 일용품 중에 가장 소중한 물품이었다. 아울러 대흥사에서는 늦게 딴 찻잎으로 작은 떡차를 만든 사실도 함께 밝혀진 셈이다. 만휴는 초의의 제자로, 추사와 교류했던 대흥사 승려이다. 실제 〈영해타운첩〉에는 “만휴가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답장을 못했습니다. 당연히 추후에 보내겠습니다. 이 뜻을 전해 주십시오”라고 한 대목이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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