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틀린 용어 바로잡기 사자→용

불을 좋아해 향로 뚜껑에 장식
고려향로 두 개가 있다.(그림①-1, 그림 ②-1) 뚜껑에 하나는 누가 보아도 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보아도 용이다. 사자는 뿔도 없고 얼굴 모양이 용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사자를 찬찬히 살펴보면 목 부분에 갈기 같은 것이 있는데 용에서 보던 제1영기싹모양의 도르르 말린 형태이다. 얼굴을 위에서 보면 눈썹이 제1영기싹으로 되어 있다.(도 ①-3) 일반적으로 용의 눈썹은 제1영기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오른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보주이다. 사자는 보주를 지닐 수 없다. 보주를 지닐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존재는, 석가여래-관음보살-지장보살-용 등이어서 아무나 지닐 수 없다.
 그러니 보주로 보아서 사자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용인가? 사자모양인데 용이라 할 수 있을까? 호승지는 용의 아홉 아들 가운데 불을 좋아하여 향로 뚜껑에 장식한다는 용의 이름을 산예(?猊)라고 불렀는데 사자를 일컫는다.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산예출향(?猊出香)이란 말을 썼는데 바로 이런 향로에서 향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리라. 그러면 왜 사자 모양인가? 용은 변화무쌍하여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용은 봉황의 모양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백호의 모양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인간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모습에는 반드시 용의 속성, 즉 용성(龍性)을 지녀야 한다. 그 용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보주이다. 그리고 각 부분이 영기문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우선 동물모양으로 보주를 지니고 있으면 무조건 용으로 보면 된다.
지난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천하제일 비색 청자전’에서 항상 보아온 ‘고려청자 사자향로’를 살피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저 둥근 보주를 붙들고 있으려니 했는데, 무수한 보주를 음각한 무량보주가 아닌가! 처음으로 확인한 순간 이제는 사자가 아니고 용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그림 ①-4, 5) 그러므로 ‘고려청자 사자향로’라고 모든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용어를 ‘고려청자 용향로’라고 고쳐야 한다. 더구나 꼬리는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으로 전개하여 가는 영기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그림 ①-2) 용의 꼬리는 예부터 꼬리가 제1영기싹이나, 제2영기싹이나 제3영기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만물생성의 근원인 꼬리에서 용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낸 것인데, 우리는 꼬리를 용의 끝으로 보아왔지 시작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여래의 현신이 피어오르는 용향로
누가 보아도 용으로 뚜껑을 삼은 고려청자 향로가 있다.(그림 ②-1) 그 용은 오른 손으로 역시 무량보주를 들고 있다. 입체적으로 조각하였으며 정상에는 구멍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그림 ②-2) 그 큰 무량보주 입에서도 향기(香氣)가 피어오르도록 한 것이다. 두 작품은 형상은 다르지만 모두 용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향로의 예가 있다. 물론 사자모양이다.(그림 ③-1) 그러나 이 사자는 두 앞발로 두 발등에 놓인 작은 보주를 짚고 서있다.(그림 ③-2) 즉 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사자로 알고 있는 수많은 동물 가운데에 용으로 보아야할 도상이 많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보주가 없더라도 사자 모습 가운데에 용일 가능성이 더러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래를 현신시키는 향기가 피어오르는데 사자를 조각할 리 없다는 것이다. 병향로(柄香爐)의 사자 모양도 말할 것도 없이 용이지만 삼국의 학자들은 사자진(獅子鎭)이라고 부른다.(그림 ④-1, 2) 그런데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오지 않는가. 고리가 아니고 수많은 보주를 고리모양으로 만들어 무량한 보주가 입에서 나오는 형국을 그렇게 표현했다. 사자가 아니고 용이다. 용의 모습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인식해나가면서 용의 개념이 조금씩 정립하여 가는 것이다.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는 신비로운 광경이며 바로 그 향기에서 여래나 보살이 화생한다는 진실을 최근 저서〈수월관음의 탄생〉에 자세히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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