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 스님 (독일 뮌헨 불이선원 선원장)

“외부의 힘 믿는 종교와 차별
과학으로 증명되는 불교는 진리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순간 부처”

▲ 현각 스님은 … 1964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가톨릭 가정에서 어났다. 1983년 예일대에 입학해 서양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1989년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 비교종교학과로 진학했지만 서양 종교와 철학에서 정신적 만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1990년 케임브리지 선센터에 입문하게 되고, 그해 11월에는 한국으로 와 1년간 신원사에서 동안거를 시작한 이후 송광사, 정혜사, 각화사, 봉암사 등 선방에서 용맹정진했다. 1996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으며, 2001년 8월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으로 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다. 현재는 독일 뮌헨 불이선원 선원장으로 유럽에 불법을 설파하고 있다.
파란눈의 수행자 현각 스님은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재 독일에서 설법을 펼치고 있는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5월 16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열린 정각원 법회에서 ‘종교보다 통찰’이라는 주제로 불교의 수행을 강조했다. 결국 불교는 신앙이 아닌 하나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 그 자체임을 강조한 스님의 강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리=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모든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에서 시작했습니다. 아테네는 시민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시민들이 수학, 음악, 시를 배우게 했습니다. 사회가 폭넓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맹목적으로 살지 말고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어떤 종교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참나 진아를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론은 국가의 지침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화두를 던진 셈입니다.


숭산 스님께서는 염불, 기도, 진언 등을 행하며 진아를 깨치셨고 1972년부터 미국에 건너가서 서양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 법회에서 저는 서양인으로 보는 한국불교와 수행이 얼마나 종교 본연의 의미와 다른지 얘기하고자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스마트폰으로 비행기표를 끊고 비행기 안에서는 아이패드로 원고 마감을 하면서 왔습니다.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25년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지금 흔하게 마시는 아메리카노 같은 커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커피맛에 길들여진 저희 서양 사람들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당시는 이걸 살 수 있는 곳은 이태원 던킨도너츠뿐이었습니다. 화계사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차를 3~4번 갈아 타야 하기 때문에 1년에 2번 정도만 겨우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곳곳에 스타벅스 같은 커피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또 시리아 내전 같은 국제 뉴스들을 몇분만에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편리함은 모두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내 바깥에 있는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본성보다 바깥에 있는 힘을 믿는 순간부터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어버리면 내 종교가 타인의 종교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게 돼 버립니다.


요즘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주마다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종교들은 이런 현상들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곰팡이 냄새나는 책에 의존해 자신들의 교리적 잣대를 여기에 들이대고 있으니 말이죠.
저는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불교 알리는 일을 포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특히 서양인들은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도 매우 싫어합니다.


얼마전 독일에서 4일간 용맹정진을 지도했습니다. 저는 참가자들에게 이것은 절대자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참나를 보는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불교는 종교라 생각지 않고 일종의 참나를 찾는 하나의 기술이라 생각합니다. 자세를 정리해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정리하고 생각을 챙기고 스스로 묻고 알아보며 통찰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참다운 나, 소리 듣는 나, 이게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수련생들에게 절대 책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미 서양인들은 300년 전에 번역된 불교 경전으로 많은 불교 교리를 접해 왔기 때문에 굳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아도 불교 지식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강조합니다. 수련회에서는 이 반야심경을 한국어와 독일어 두 개로 동시에 읽게 합니다.
우주적 모양 자체가 공함이고 이것이 물리학으로 증명된 일입니다. 실제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일이죠. 서양인들이 이런 매력에 끌리고 있습니다. 참선이라는 체험으로 몸소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4일의 수련을 끝내고 나면 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안의 일이 시원스레 풀리는 기분에, 옛날 고향으로 돌아간 기분에 울었다고들 합니다.


내일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님전에 3배도 올리고 연등도 켜고 할 것입니다. 연등은 세상의 밝은 빛이 되겠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불교의 보배는 화두선입니다. 나를 바로보는 행동, 자세, 호흡, ‘나는 누군인가’ 하는 질문은 머릿속에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호흡을 통해 스스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바로 그 자리, 시비가 없고 선과 악이 없으며 구별이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나와 똑같다는 걸 체험으로서 알 수 있습니다.
 

‘참나’란 단어도 사실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e=mc2은 과학자들이 신봉하는 명제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실험으로 이를 탐구하고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앞서 누군가가 말했기 때문에 믿어야 해요’ 라고 얘기합니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이고 이를 증명하고 확인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나무탁자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모양도 네모나고 이렇게 두드리면 소리도 나무소리가 나지만 라이터로 태우면 형체가 사라집니다. 이 세상의 기본적인 본질은 쿼크(quark,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기본적인 입자)입니다. 이 속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본질, 공기 또한 마찬가지이며 아무것도 없는 셈입니다. 우주의 기본물질은 무입니까? 우주의 미스터리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공한 일이 모양으로 색깔로 나타난다는 말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직접 코, 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본성품과 온 우주의 본질이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내일 여러분 부처님오신날이라고 절에 가서 부처님을 볼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좌선하며 오른손을 풀어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 사실을 깨치고 손바닥을 바닥으로 내림으로 온 세상은 나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내가 현실이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숭산 스님께서는 깨닫기 전후의 차이가 뭐냐는 제자의 질문에 “깨닫기 전 하늘은 푸르렀고 나무는 초록색이었다는 알았다. 그리고 깨달은 후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초록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특별한 순간에 집착하니 찰나찰나 순간을 믿지 않는다고 틱낫한 스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옛 경전들에서도 깨달은 순간 꽃비가 내리며 온 세상이 감동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는 깨달음의 순간을 미화시킨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배고플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순간순간 깨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증명할 수 있는 지혜이며 불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펴며)손가락이 다섯 개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열반하실 때 당신의 말씀을 믿지 말고 스스로 체험하고 증명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내가 너에게 진리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팔레스타인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폭탄테러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는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태를 단 한번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을 바탕으로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불교는 말로써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볼 수 있느냐 느낄 수 있느냐 이렇게 묻는 체험으로서의 종교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어떤 종교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찰나찰나 순간순간이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일, 어제를 생각하는 것으로 시공간을 만들지 말고 지금 이순간 물을 마시는 것이 나의 삶이라 여기십시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진리,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순간이 곧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아닌 ‘순간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오신날’은 ‘순간님오신날’이 되겠죠. 생각에 빠지면 중생이요, 순간 찰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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