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원암에 친견 인파 구름처럼 운집
서울 대원암에 친견 인파 구름처럼 운집
  • 대담=김광식 교수(동국대)
  • 승인 2013.05.21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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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굴이 무영수 - 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박재원

박재원 / 한마음선원 상임고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국제불교도협의회 수석부회장 익성회 회장, 한마음선원 이사 한마음 전국불자회 전국회장 등 역임
“나는 만담가 아니야!” 강연 거절
청년모임 익성회, 스님 도우며 공부
부산 법회에 5만명 참석
탄허 스님 소개로 한마음선원과 인연

-회장님과 탄허 스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요?
저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서 5·16이 나던 해(1961)부터 국사편찬위원회의 편사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을 하다가 문집 같은 것을 보면 왕도정치니 천리(天理)와 같은 개념이 나와요. 이런 것은 한문으로도 직역이 잘 안 되는 철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을 공부 좀 해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방면에 조예가 깊은 탄허 스님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가요?
그 시절에 저는 30여 명의 청년지도자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친목회 성격이었지요.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저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탄허 스님에게 가서 인사도 하고, 자주 뵈러 갔어요. 스님은 그럴 때면 저희들에게 질문을 툭 던지시고, 저희들은 그것에 대해 궁리를 하면서 자꾸 친해갔죠. 그러나 스님은 저희들의 질문에는 잘 대답하시지 않는 조금은 오만한 분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는 등 친근하게 모시다가 10여 년이 된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저희들의 모임은 익성회라는 이름을 띠고 새출발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에 스님께서 익성회(溺誠會)라는 단체명을 지어 주시고, 그 뜻을 적어도 주셨습니다. 즉 스님이 익성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때 스님께서는 저희 회원 30명 전부에게 수계 법명을 개인적으로 지어 주시고, 그를 증명하는 문건을 직접 붓으로 써주시기도 했어요. 제가 받은 이름은 도안(道眼)입니다. 저는 익성회의 회장으로 활동을 하여 1980년까지 회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익성회 회원들에게 우리가 스님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라고 그랬어요. 우리 회원들은 가정형편이 비교적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외교구락부에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교육, 정치, 철학, 사상, 종교, 문학 등 각 방면의 권위자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고 저녁식사 대접을 하고 헤어지는 행사를 몇 년간 하였는데 이런 것에도 탄허 스님이 버팀목이 되어 주셨지요. 그 시절에 탄허 스님을 따르던 서울법대 전창열, 명호근 등의 불교학생회 출신들이 스님에게 많이 배우고 있었지만 우리와는 차원이 조금 다르지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스님이 서울에 오셨다고 해서, 내가 대원암에 가보면 대원암에는 스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운집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스님의 지식, 학식을 배우려고 하였고 간혹은 스님에게 글씨를 받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님에게서 무엇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님의 경륜, 뜻을 바깥으로 널리 퍼지게 도와주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시자 스님으로부터 저에게 전화 연락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부리나케 쫓아가서 뵙고, 어떤 때에는 외부에 같이 가기도 합니다. 석관동에 있는 박초당 선생 집에 공양갈 때에도 같이 간 적이 있는데, 박초당 여사가 저를 좋아했어요. 그 분도 박가(朴家)이고, 나도 박가라 친했어요. 그 당시에 제가 경주에 신라오릉보존회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박씨만 300만 명이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박씨 종친회를 조직해서 내가 상임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주에서 행사를 하면 우리 회원 20여 명이 몇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같이 가서 행사를 하는데, 올 때에는 꼭 학하리(장경각)에 들러서 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스님의 경륜을 외부로 알렸다는 내용을 들려주시지요.
제가 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거절당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예를 들면, 저희 익성회가 주관을 해서 탄허 스님을 모시고, 전국에 다니면서 순회 법회를 가졌습니다. 스님은 외부 법회에 가서 하는 강연 같은 것을 잘 응하시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와서 강연 요청을 하면,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못 알아들을 말을 나보고 씨부리라는 것이냐! 나는 만담가가 아니야!” 그랬어요. 그러나 제가 찾아가서 강연 부탁을 하면 대부분 들어주셨어요. 저는 “법회 계획을 갖고 진행하려고 합니다” 하면, 스님은 ‘글쎄요’ 하시면서도 긍정도 부정도 안 해요. 혹은 ‘알았습니다’라고도 하셨지만요. 그래서 나중에 힘을 모으자고 해서 대전, 대구, 부산에서 전국 법회를 기획하였습니다.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할 때에는 5만 명이나 왔고, 대구에서 할 때에도 3만 명이 왔어요. 우리 30여 명 회원들이 대불련 관계, 천태종 관계 등 각종 조직을 동원하는 활동을 해서 그런 인파가 온 것입니다. 부산 구덕체육관 행사에서는 2만 명은 체육관에 들어오고, 3만 명은 바깥에서 들었어요. 우리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행사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때 통도사의 경봉 스님이 오셔서 탄허 스님에게 “아니 탄허당은 말야, 내가 통도사 절 바깥에서 한 부산 시민회관 강연회에 모인 숫자가 2400명이 최고인데, 당신이 내 마당에 와서 5만 명이라는 사람을 모아서 강연을 하였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하였습니다. 이 강연회의 내용은 불교와 동양철학이었는데 그것은 탄허 스님의 법문집 〈부처님이 계신다면〉과 이번에 우담거사가 만든 〈연보〉에도 나옵니다. 지금 현재까지 불교 법회에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온 법회는 없어요. 그때 그 법회가 언론에 보도되고 그랬어요. 내가 그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부처님이 계신다면〉을 우담거사가 만들 때에 우리 종친회 사무실에서 하였어요. 내가 종친회 상임이사장을 하니깐 사무실이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원빌딩 314호실이었는데, 거기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회장님이 대통령 출마를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탄허 스님과 여기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 부탁에서 나온 것입니다. 1980년에 10·27법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탄허 스님과 대행 스님이 법난이 일어나서 불교가 당하였으니 불교를 위해서 싸워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스님에게 그런 당부의 말씀을 들은 것은 대원암입니다. 탄허 스님은 저에게 “투쟁을 해다오”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스님이 저를 믿었어요. 스님은 당명까지 지어주셨어요. 스님이 당명, 방향 등 그런 것에 대해서 구두로 말씀하시면 저는 전부 메모해서 진행을 하였지요. 그때 스님이 써주신 설명서가 다 있었는데 제가 만든 당이 탄압을 받고 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전부 유실되었습니다.
하여간 그때에 스님은 저에게 당신께서 마지막에 내가 하는 정치에 모든 것을 걸어보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익성회 회원들에게 동의를 다 받아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창당은 익성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 밖에 외부에서 정치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일민립당(圓一民立黨)이라는 당명까지도 정해 주시고, 정관도 나오고, 창당준비위원회도 조직하고, 창립대회도 준비하고 정당의 골격을 갖추고 전국 27군데에 지구당 조직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롯데호텔에서 창당대회를 하고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하는 날, 입후보하려고 하는데 어떤 허름한 호텔에 갇혔어요. 잡혀간 것이지요. 잡혀가서 이십 몇 일을 갇혀 있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등록을 안 받으려고 피하고 그래서 우리쪽 사람들이 가서 실력행사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깐 선거 벽보도 못 나왔지요. 그때(1981.2) 후보로 나온 사람이 민정당의 전두환과 민한당의 유치송인가 단 두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대행 스님도 이런 일에 탄허 스님과 뜻을 같이했어요. 대행 스님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대행 스님을 여자라는 생각을 갖고 접근하면 큰일납니다. 탄허 스님은 정치의식, 민족의식이 대단한 스님이었지요.

-탄허 스님의 글씨는 유명하지요. 고문님은 보관하고 계시나요?
저는 스님에게 글씨를 백 수십 개를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한 점도 보관하고 있지를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경주의 행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꼭 장경각을 들립니다. 스님이 계시면 인사를 드리지요. 그러다가 1978년인가 들렸더니 스님께서 학하리에 바로 옆의 딸기밭을 샀다고 그러셨습니다. 그 딸기밭에 담장을 치면 그 안에 건물을 쉽게 지을 수 있다고 역학으로 풀이하시면서 담장을 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옆에 있는 시자에게 얼마가 드느냐고 물어보니 1600만 원인가 그렇다고 해서 회원들에게 얼마씩을 배당해서 바로 일을 할 수 있게 조치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밤새도록 붓글씨를 써서 법화경으로 8쪽의 병풍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써주시면서 유묵 몇 십 점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을 회원들에게 한 점씩 다 나누어 주었어요. 그때 회원들이 개인당 50만 원씩 냈을 것입니다. 그때 돈 50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글씨와 관계된 비화는 없을까요?
그런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회갑 때에 선물을 뭘 드릴까 궁리하다가 스님의 글씨를 받아서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해서 대원암으로 찾아와서 박대통령이 스님의 글씨를 참 좋아하시니깐 하나 써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두 시간 동안 대답을 않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시자가 저에게 전화 연락이 오기를, 회장님밖에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 급히 와달라고 그랬어요. 저는 그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와 대원암으로 달려갔지요. 대원암에 가서 스님에게 “저 왔습니다” 하고 들어갔더니 스님은 조회장을 앉혀놓고 눈을 감고 계셔요. 저는 스님에게 “스님의 글씨를 한 점 조회장에게 드리지요”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조회장에게 “박대통령이 내 글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하면 되는 것이지 조회장에게 부탁할 일이 있나요” 하셨습니다. 이렇듯이 어떤 면에서는 스님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면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수타사에 맡겨 놓은 스님의 유묵에서 한 점을 갖고 오라고 해서 조회장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연유가 돼서 스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진에서 스님의 전용차를 준비하고, 비행기를 준비시켜서 갔다 오셨습니다. 성지순례를 갖다가 돌아오신 때에, 스님 생신 파티 겸 성지순례 보고회를 겸해서 하얏트호텔 오렌지룸에서 파티를 제가 주관해서 열어 드렸습니다. 그때 300명을 모셨습니다. 참! 저도 개인적으로 스님 글씨를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 어머님이 후두암으로 3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스님께서 나를 특별히 생각하셨는지 진묵대사 49재 제문을 쓰셔서 저에게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병풍으로 해서 놔두었는데 우리 모친이 돌아가셔서 용인공원 묘지에 모셨어요. 그때가 12월이었는데, 옷가지와 유품을 불에 태우다가 그 불씨가 갖고 간 그 병풍에 옮겨 붙어서 그만 그 자리에서 불에 타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그런 일이 있어서 저는 스님에게 고맙게 생각을 하였지요.

-그 시절의 조계종 종정은 성철 스님이었는데, 탄허 스님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 두 스님은 다 훌륭한 분입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의 재가 제자에 이름이 얹혀져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무게의 중심을 탄허 스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탄허 스님 같은 분은 나올 수가 없어요. 유불선을 회통하신 실력,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의식, 미래를 전망하는 예지력 등은 그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지금 스님들은 불교의 선, 교 중에서 일부분만 조금 알지요. 나도 국제불교도협의회를 할 때에 성철 스님을 뵙고 그랬지만 저는 탄허 스님을 더 존경합니다. 다만 성철 스님은 제자 분들을 잘 두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 스님의 추모, 계승, 사상 정리 등이 잘 되었고 그에 비해서 탄허 스님은 그런 점이 약해요. 저는 그 점이 상당이 아쉬워요. 탄허 스님에게도 각성·무비·혜거 스님 등이 있기야 있지만 오대산과 재단이 불편한 것도 걱정입니다. 제가 지금 나이가 80이 넘었고, 몸도 불편합니다. 내 나이가 60대라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뛰어보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요.

-탄허 스님과 대행 스님 간에도 인연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인연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드리기에는 그렇고 추후에는 그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곳 한마음선원에 오게 된 것은 탄허 스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이곳에 온 것은 1970년 대 초부터입니다. 탄허 스님이 대행 스님을 도와서, 대행 스님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여간에 탄허 스님은 대행 스님을 자주 찾아와서 대화를 하시고 그랬어요. 또 1978년부터 3년 동안을 이곳에 오셔서 대중 300여 명에게 화엄경 강의를 해주시기도 했어요. 그 대중에는 이곳의 스님과 재가자 그리고 천주교의 수녀도 있었어요. 강의하실 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셨습니다. 또 1979년에는 탄허 스님을 모시고 대한불교회관(지금은 한마음과학원 건물, 구 법당)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하였습니다. 그때 에 ‘덕도지도’라는 좋은 글씨도 써주셨지요. 탄허 스님이 한마음선원을 조계종으로 등록케 하여 좋은 방향으로 회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익성회 회원들의 부인들을 조직하여 심단회(心丹會)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도 탄허 스님을 뒷바라지를 해드리고 스님 법문도 듣고 그랬어요. 그 대표가 김영숙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익성회 회원, 심단회 회원을 이곳 한마음선원으로 데려와서 불교 활동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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