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리지 않고는 전체 항복을 받을 수 없어요

여러분의 업식에서 순간순간 나오는 데에 속지 마십시오. 그게 꼬드겨서 화도 나게 하고 즐겁게 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어떠한 즐거움이 있어도 ‘아, 감사하구나.’ 하고 근본에 맡겨 놓고 또 악한 일이 생기더라도 ‘아, 거기서밖에 해결 못하지.’ 하고 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부하는 데 지름길이요 모든 업식을 바꾸어서 보살로 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용광로에 헌 쇠를 집어넣으면 새 쇠로 다시 재생되어 나오듯이 근본자리에다 그업식을 다시 되놓는다면 바로 자동적으로 보살로 화해서 나온다 이겁니다


▲ 그림 최주현

 광주에 오랜만에 온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만나 보니까 여기는 여기대로 아주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생활에 직결된 불법 공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설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름에 끄달려서는 절대 안 되며, 전체가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와 그 하나에 의해 전체 나투면서 시공이 따로 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각자 나로부터 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아실 것 같으면…. 우리는 미생물부터 거쳐서 그 뼈저린 아픔을 견디고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됐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어떠한 사생이든지 다, 부모와 자식 형제가 있는데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가 자식이 되면서 윤회에 말리다가 그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과거에만 그런 것도 아니고 현재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미래에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생각을 잘하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4월 8일이 다가옵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보면 모두 타의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나를 빼놓고 어디서 구하려고 하십니까? 나로부터 이 세상이 생겼고 나로부터 가정이 생겼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지 나 빼놓고 무엇이 있어서 종교라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나 빼놓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나라고 그런다고 나인 줄만 알지 마시고, 나만이 아니라 각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나’ 말입니다. 나! 나!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의 육신을 믿지 말고 너의 마음을 믿고 깨달아서 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라. 그렇게 된다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일체 만물만생이 다 둘이 아니니라. 그 도리를 알지어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타력 신앙으로써, 기복으로써 나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돈을 갖다 주고 이름표를 붙여 놓고 전기로 백 일 인등을 켠다고 하는데 그건 진짜 인등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진리가 일 초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찰나찰나 찰나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아셔야 하고 우리 인생이 백 년을 산다 하더라도 한 철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 몸이 없다면 부딪침이 없고 상대가 없어서 일체를 깨닫지 못하고 지혜를 넓히지 못하고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이 종교를 믿고 알려고 하는 것은 지혜를 넓혀 언제나 밝은 삶의 보람을 느끼기 위한 것이지 우상 숭배나 하고 밥이나 내려 먹으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스님이든 스님이 아니든 그걸 막론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온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각자 나를 발견해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신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미신의 행위를 하니까 미신이 있는 거지 미신의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미신이 있겠습니까? 오늘이 없으면 내일이 없듯이, 오늘 따귀를 맞았으면 내일 또 따귀를 때리게 되듯이 이러한 상대성 원리가 바로 하나로 뭉쳐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지혜를 넓혀서 파악할 수 있다면, 아마 돈을 드리면서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하실 거예요.

보세요! 내가 아까 말했듯이 인등을 켠다는 것은…, 여러분의 몸뚱이는 등이 되고 여러분의 마음 중심은 촛대가 되고 바로 여러분의 마음, 생각 내는 것은 촛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촛불을 항상 켜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몰라요. 그렇다고 해서 불당(佛堂)에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어디를 가지 말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배우려면 올바로 배워서 물러서지 말라는 뜻이죠.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죽는다는 것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을에 나뭇잎이 가랑잎이 돼서 떨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그 육신을 벗고 갈 때에 돈이 따라가겠습니까, 형제가 따라가겠습니까? 부모가 따라가겠습니까, 자식이 따라가겠습니까? 돈더러 가자고 그래도 안 갑니다. ‘네가 좋아서 날 따라다녔지 내가 좋아서 너를 따라다닌 건 아니니까.’ 하고 안 따라가더랍니다. 부모한테 가자고 해도, 또 자식한테 가자고 해도 같이 가 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도리를 명백히 아셔야 하며 마음의 촛불, 즉 인등이 항상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 백 일 동안 켠다고 한다면 백 일 동안만 불이 켜져 있고 백 일 동안만 진리가 돌아가고 그럽니까? 생각들 해 보세요. 일 초도 쉬지 않고 우리는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찰나찰나 마음이 바뀌고 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를 만날 땐 자동적으로 자식이 돼서 말도 행도 뜻도 그렇게 돌아가고, 또 아내가 오면 아내가 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남편이 돼서 금방 “여보!” 할 수 있는 그런 자동적이고 자유로운 힘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거죠. 오신통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할 때가 여러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 만날 때를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했느니라. 색이 즉 공이요 공이 즉 색이니라. 너희들은 둘로 보지 마라. 모두가 한 찰나 한 찰나 돌아가는 그 이치를 알면 공한 도리를 알 수 있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만약에 나로부터 알 수 있다면, 여러분 육신 속에 업식이 한데 뭉쳐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움죽거리게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제일 먼저 설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뭉쳐 있는 고덩어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만 알면 바로 즉시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과거에 걸어온 길을 짊어지고 나와서 그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악업이든 선업이든 그 업식 자체가 합쳐진 것을 ‘나’ 하나가 짊어지고 들어간 거죠. 아버지의 뼈를 빌리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서 그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바로 자기의 업식을 짊어지고 그렇게 여러분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치로 따지고 볼 때 집만 얻어 가지고 여러분이 그 안에서 살림을 하는 거죠. 이것을 절실하게 생각하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신다면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여러분의 보배를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인등도 인등이지만, 부처님께서 과거에 49년 동안 말씀해 놓으신 경전을 볼 때 “수많은 사생의 마음을 물방울이라고 비유한다면, 바다에 전부 들어가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퍼내도 줄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물컵에 여러분의 마음 한 방울, 물 한 방울 넣어 보십시오. 컵의 물이지 한 방울의 물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어느 것도 붙지 않는 자리입니다. 체가 없으니 붙을 자리가 없죠.

더 말한다면, 부처님의 마음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면서 성장하는 마음,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마음, 바로 내가 대신 죽어 줄 수도 있는 마음, 그 자리에는 어느 것도 붙지 않습니다. 이유가 없고요. 자식이 물에 빠지면 부모는 그냥 들어가서 건지거든요. 자기 죽는 줄 몰라요.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와 같이 자식이 빠졌을 때 뛰어드는 그 순간의 마음,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그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둘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마음이 따로 있고 부처님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두루 하시고, 육의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두루 하지 못하는 차이는 있지만, 내 걸 다 버려서라도 너를 살리겠다는 그 마음은, 잘돼라 하는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과 같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더 큰 바다든, 한 그릇은 한 그릇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작은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도 한 그릇, 큰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도 한 그릇, 더 큰 그릇에 물 한 그릇을 떠도 한 그릇입니다. 작은 그릇의 한 그릇이라고 해서 한 그릇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대천세계, 중천세계, 소천세계가 셋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같이 하나가 돼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법을 배운다고 해서 부모를 소홀히 하고 자식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과 직결돼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생활이 천체물리학이기도 하죠. 과학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바로 사실인 걸요. 우리가 생각한 것이 바깥으로 나와서 중용을 할 수 있게 실천을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거지, 이론으로 백 마디 천 마디 만 마디를 알아도 목마른데 물 한 그릇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시지 않겠죠. 부적이나 가지고 다니면서 베갯속에 넣고 문간에나 붙이고 이럭하지도 않으실 거고요. 붙였다 하더라도 물 한 그릇 떠 놓고 소하세요. 부적이 여러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이 흔들리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삼재가 들어서 못 살고 또 어느 방향은 손이 있어서 이사를 못 가고…, 이런 것도 남의 말에 휘둘려서 당신네들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아! 이럭하면 우리가 좋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중심이 없으니까 마음이 흔들려서 그것을 또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권리를 가졌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 참 가난해서 죽겠고 병고에 휘달려서 죽겠고…. 이러니 하루하루 24시간 사는 동안에 즐거운 마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이사 가는 방향이나 날짜 등에 얽매이는 고통까지도 짊어져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대답들 좀 해 보세요. 여러분도 이 세상에 나왔을 땐 인간의 권리를 가졌겠죠. 그러니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예요. 이삿날도 노는 날, 내가 아무런 걸림이 없을 때에 ‘아, 우리 식구가 같이 이사를 하면 되겠다.’ 이러면 이사 가는 거지, 무슨 날짜를 보며 방향을 봅니까? 이게 뭐 말라빠져 죽은 겁니까? 이럭하고도 여러분이 불제자라고 하며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을 고깝게 듣진 마세요. 나는 내가 잘 안다고, 내가 또 여러분보다 높다고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닙니다.
예전의 조사들 말씀 한번 할까요? 예전 시절에는 그렇게 용도가 되고 또 환경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똥 친 막대기니라.” 했는데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는 변소에 막대기 하나를 떡 갖다 놓고 그 막대기로 밑을 씻었다는 얘기죠. 막대기 하나에다가 수없이 밑을 씻었을 겁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생을 다 건지시면서도, 건졌으면서도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청하는 대로,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가 돼 주시고 사람을 건지려면 사람이 돼 주시고 어떤 거 아니 되시는 게 없고 아니 듣는 데가 없고 손 안 닿는 데가 없으니 바로 똥 친 막대기죠. 안 그럴까요?

예전에 이렇게 또 말씀하신 예가 있죠.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와도 뛰지 마라.” 몸뚱이가 뛰지 말라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배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혜가 없어서는 안 되죠. 그래서 내 중심을 잡고 나가는 사람이라면 되지만 주인공을 모르는 사람, 나를 아주 내놓고 타력 신앙으로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뜻을 알래야 알 수가 없어요. 그 속에는 아주 깊은 뜻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미신이 있다 없다 이러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잘못될까 봐 겁나니까 잘되게 해 달라고 빌죠. 빌더라도 자기 주인공 안에 바로 자기 핵이 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그 핵이 있는 곳에는 질량이 그렇게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오븐이라면 여러분 입맛대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그 재료가 여러분 속에 다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칠성이 따로 있고 독성이 따로 있고, 산신이 따로 있고 조왕이 따로 있고, 지신이 따로 있고 용왕이 따로 있고, 지장이 따로 있고 미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군데서 다 나고 드는 겁니다. 미륵이라는 것도, 늙어서 죽어서 자식으로 다시 나오면서 돌아가는 과정 중에 다시 태어나는 때를 미륵이라고 하죠. 부처님이 나실 때도 한 바퀴 돌아서 딱 안 보였다가 다시 보일 때 미륵이라고 하는 거지, 어디 부처님이 따로따로 있어서가 아닙니다.

옛날에도 이런 예가 있었지만…, 나는 어저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데선 모르지마는, 예전에 부처님 당시에는 오백 비구를 뒀다 하더라도 다 부처님의 같은 제자인 것이지 따로따로 내 제자 네 제자 갈라서 싸움을 붙이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먼저 들어온 사람은 형이 되고 나중 들어온 사람은 아우가 되죠. 지금 여러분이 잘 들으시라고 말하는 겁니다. 절에서는 사형 사제라고 합니다. 그 사형 사제가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내 제자 네 제자 이렇게 자꾸 둔다면 얼마나 싸움이 잦을 것이며, 또 말을 잘못 옮겨서 사형 사제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전부 나 너 할 거 없이 더불어 부처님의 한 제자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바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90%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겠죠. 그러니 여러분 마음 한생각에 여러분을 구덩이에서 꺼낼 수도 있고 여러분 마음 한생각에 여러분을 구덩이에다 집어넣을 수도 있는 거죠.

내가 항상 카세트 얘기 했죠? 카세트에다 녹음하듯이 과거에 넣었던 거를 짊어지고 나왔는데, 그게 업식이에요. 여러분은 속아서는 안 돼요.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는 세포 구석구석, 그 모두가 지금 업식이 뭉쳐서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게 꼬드겨서 화도 나게 하고 꼬드겨서 안되게 하기도 하고 꼬드겨서 즐겁게 하기도 하고, 이렇게 순간순간 나오는 데 속지 마시라 이거예요. 어떠한 즐거움이 있어도 ‘아!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 맡겨 놔요. 또 악한 일이 생기더라도 ‘아! 거기서밖에 해결 못하지.’ 하고 거기 맡겨 놓으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지름길이요, 모든 업식을 바꾸어서 보살로 화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놓고 가면 재생이 돼서, 용광로에 헌 쇠를 넣으면 재생돼서 다시 새 쇠가 나오듯, 거기 다시 그 업식을 되놓는다면 바로 자동적으로 보살로 화해서 나온다 이겁니다. 이열치열이란 말도 여기에 해당되죠. 그러니까 그 공부가 첫째는 나를 발견하는 지름길이요, 둘째는 업식을 무너뜨리는 공부요, 셋째는 전체 항복을 받는 공부다 이거예요. 내가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항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옛날에도 그런 말이 있죠. 이야기가 길어서 한 부분만 떼어서 얘기하겠습니다. 어느 제자가 하도 자기라는 걸 세우면서, 학으로써 능통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만 스승으로 생각을 했지 그렇지 않은 스님은 그냥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어느 납자가 그렇게 얘기를 하더랍니다. “누더기를 입은 불목한이라도 네 스승으로 알아야 일체가 네 스승인 줄 알 것이다. 네 스승이 바로 네 제자이며 네 제자가 바로 네 스승이니라.” 그 얘기를 듣고는 일체를 다 허술하게 볼 게 아니더라 하는 거를 알았대요. 그래서 큰스님이 되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스님이 된 게 아니라 큰사람이 됐죠.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할 때 말입니다, 지금 교수님들도 계시지만, 연구 재료를 수집해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연구할 수 없죠? 나방 하나가 없어도 우리가 배울 수가 없거든요. 연구할 수가 없어요. 풀 한 포기 하나 버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첫째 모두가 내 스승이요, 전체를 나와 둘 아니게 봤을 때 전부가 스승이라 이겁니다. 하나하나, 꽃 이파리 하나 보고 돌 하나 볼 때도 거저 볼 수가 없고, 하다못해 나무 한 그루를 봐도 나 아님이 없는 까닭에 중생들은 부처에게 배우고 부처는 모든 중생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큰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그마한 사랑을 가지고 죽네 사네 하고 야단들이지마는 큰 사랑은 죽여도 사랑이요 살려도 사랑입니다. 그게 자비고요. 죽이는 게 없으니까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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