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희랑대 보광 스님 20년 만에 서울 법문

참불선원 아잔브람명상센터 서울 지원 개원 축하 법회


보광 스님(해인사 희랑대 회주)이 20여년 만에 서울서 법문하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됐다. 제자인 각산 스님이 5월 9일 참불선원 아잔브람명상센터 서울 지원을 개원하는 자리에서 보광 스님이 축하 법문을 하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한 이 자리에서 스님은 진정한 부처님오심의 의미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또한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심성의 이치를 알기 위해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임을 알고 이를 위해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글=정혜숙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탐진치 중병 벗어나려면
지옥 찾아가듯 정진해야
자신이 있는 곳이 기도처
심성의 이치 아는 것이 ‘불교’
부처님 법 듣는 순간
수행할 때임을 자각하고
‘정진’하면 성불 할수 있다 


참불선원 개원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부처님의 근본 뜻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내생에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지만 부처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그곳은 뜻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전에는 거기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처음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바깥에서의 모든 인연에서 벗어날 때 그것을 연해탈이라고 하고 모든 인연을 자기의 마음에서 벗어날 때 심해탈이라고 합니다. 심해탈과 연해탈을 얻었을 때 그것을 대열반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사는 곳에 부처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면 그곳이 바로 불국정토입니다. 앞의 극락세계는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니 어느 곳에서도 부처님 모시고 수행을 하면 불국 정토입니다.
〈열반경〉에는 부처님 전생에 설산 수행하실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의 부처님은 설산동자라고 하죠. 나찰귀가 찾아와서 그대는 “지금 뭐하는가”라고 물으니 “성불하기 위해 수행한다”고 대답하니 나찰귀가 이런 법문을 들려줍니다. “삼라만상은 인연과 업으로 거미줄 같이 얽혀 있으니 모든 현존하는 법은 시시각각 무상이다”


이때 말하는 무상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바른 법의 이치에서는 애초부터 없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설산동자가 뒤의 법문을 이어 달라 하니 나찰귀는 배가 고프니 너를 잡아먹어야만 법문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설산동자는 ‘지금 한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죽는 한이 있어도 법문을 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잡아먹고 힘이 생기거든 영혼에게라도 뒤의 법문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설산동자는 벼락에서 뛰어내리는데 이때 나찰귀는 제석천으로 변해 설산동자를 받아들고 이렇게 법문합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무상이고 환상이고 이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리면 열반에 들 수 있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법을 위해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한번 제대로 죽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매달려서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생사를 걸고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불교는 전기의 인도불교와 후기의 중국 불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열반하고 난 뒤에는 법을 근간으로 하라고 일러 주니 그것을 원시 불교 근본 불교라고 합니다.
중국으로 불교가 건너와서는 법에 대해서 얼마나 믿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불교의 성패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후기 불교에 속해 있지요.
부처님 법에 대해서 아무 의심하지 말고 오로지 내 근기가 부족하고 성심이 부족해 이루지 못했다고 믿을지언정, 내가 불교를 이만큼 믿었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나 없나를 따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처음에는 수행하러 잘 오다가도 나중에는 띄엄띄엄 오다가 잘 안 와버리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절에 가 보니 별 영험도 없더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부처님 말씀을 확고부동하게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바세계 절을 짓고 법문을 들으면 이것이 극락정토입니다. 주소도 없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극락세계에 가려고 하면 헷갈리니 말입니다.
이제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법문했는데 대중들이 못 알아들으니 싯다르타 태자가 뒷말을 해주게 됩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삼계는 마치 불난 집과 같지만 나는 편안하다고 말이죠. 이는 우리의 불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삼라만상 알고 보면 하나도 나쁜 것이 없고 깨달을 것 하나 없다고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는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처님 법문이 다 끝났는데도 대중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대원력을 세우고 사바세게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하필 왕자로 태어났을까요? 우리 중생들은 잘 살고 오래 살고 호강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돈 벼락 한 번 맞아 보고 죽고 싶다 또 왕과 같은 권력이나 한번 가져보고 죽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많잖아요.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출가했고 죽기를 맹세하고 6년 동안 고행해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궁의 왕자로 태어나 이 세상 부귀영화는 춘몽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출가는 왕의 자리를 버리고 침 뱉고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서 부처님 가피 받겠다고 영험 도량 찾아서 강원도 어디 산꼭대기로 절벽 타고 기어서 올라가고 팔공산 어디로 기도하러 가죠? 그렇다고 해서 소원이 이루어졌나요? 기도는 특별한 곳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두살 먹은 애들이 물가에 있으면 위험하지요. 엄마는 이러면 불안해서 한시도 아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물에 빠지면  엄마는 하던 일 던지고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자비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그곳이 화장실이든 어디든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면 됩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기도처입니다.


사바세계가 부처님 오신 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이 사바세계에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성불했노라고 얘기하셨습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어서 나와 똑같이 성불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출가와 고행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방에서는 죽을병에 들면 독약이 아니면 살릴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중생은 영원히 깨달을 수 없는 중생병 탐진치 삼독 중병에 들어서 이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삼독 번뇌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 때는 삼라만상이 불성이며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몰랐을 때 번뇌 망상 죄업 생사라 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자들이 붙인 것입니다. 도를 깨달으려면 지옥 찾아가 들어가면 빨리 깨달을 수 있습니다. 편한 거 호위호식 노는 것 찾으면 영원히 성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불할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지만 게을러서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봄에 씨앗을 심었더니 때마침 비가 내리니 저절로 싹이 터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더라는 것이죠. 부처님 법을 듣는 순간 씨앗을 심을 때고 수행할 때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팔만대장경의 핵심은 결국 ‘진성’ ‘진아’입니다. 심성의 이치를 알기 위해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배운다고 고생만 했지 결국 무식한 것도 유식한 것도 70이 넘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심성 하나 잘 찾으면 그것이 진짜배기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심지 않으면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태어날 적에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불자라면 살림이 있건 없건 의식주에 매달리는 자세는 넘어서야 된다는 말씀이죠. 이것이 장부심입니다. 장부심을 가져야 비로소 부처님 믿는 마음이 진심이 됩니다. 이렇게 돼야 불법을 믿고 배우고 닦아서 저절로 성불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