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生九子→‘용의 변화무쌍한 변모’

 

용의 아홉 자식에 대한 내용은 중국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명(明)의 호승지(胡承之)라는 사람이 쓴 〈진주선(眞珠船)〉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호승지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眞珠船〉도 어떤 책인지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용이 아홉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만으로 족하다. 용이 아홉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호승지는 중앙아시아 사람인 듯한데, 그런 의미로 쓴 것이 아니고 9는 양수 가운데 가장 큰 수로 무한한 아들이라는 의미로 9라는 숫자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용의 본질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며 만물의 근원이며 최고의 신(神)이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 그는 아홉 아들에 동물이름을 각각 붙이고 그 기능을 설명하였는데 맞는 것도 있고 올바르지 않은 것도 있다.

 

중국 호승지의 견해가 중요한 단서

그러나 비록 후대의 기록이라 하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호승지가 용의 아들이라고 본 9가지 동물의 모습이 모두 용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더욱 놀란 것은 아들의 생김새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호승지는 그 모두를 용으로 보았던 것이다. 용의 아들은 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용구자설(龍九子說)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또 믿는 학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후 이 생각은 다시 다음과 같이 윤색된다. 즉, 용생구자(龍生九子)란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동물로, 용이 낳았다는 아홉 자식을 가리킨다. 각각 그 모습과 성격이 다르며 그 성격에 맞는 장소에서 각자 활약하나 용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용생구자불성룡(龍生九子不成龍)’이라고 한다. 형제들이 성격이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비록 후대의 기록은 그른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글만은 신빙성 있는 부분이 많아서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헌기록이다. 용구자설(龍九子說)은 말 그대로는 틀린 말이며 상징적으로는 옳은 부분이 많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틀린 용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말은 용을 동물로 보기 쉬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호승지가 말한 아홉 아들의 이름과 기능을 정리하여 보자.

 

1. 비희(贔屓): 모양은 거북이를 닮았는데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한다. 돌비석 아래에 있는 귀부(龜趺)가 비희이다.

2. 치문(鴟吻): 모양은 짐승을 닮았는데,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전각(殿閣)의 지붕 위에 있는 짐승머리로 혹은 치미(?尾)라 하며, 화재를 누를 수 있다.

3. 포뢰(蒲牢): 모양은 용을 닮았는데, 소리 지르기를 좋아한다. 바다에 사는데 고래를 제일 겁을 내어 고래가 습격 시에 크게 울어 그치지를 않는다. 종소리를 크게 하고자 할 때는 포뢰를 종위에 조각하고 고래 모양으로 만든 당(撞)을 친다.

4. 폐안(狴犴): 모양은 호랑이를 닮았는데, 위력이 있어서 옥문(獄門)에 세운다. 감옥이나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새기며, 범죄자들이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5. 도철(饕餮): 탐욕이 많아 마시고 먹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도 잡아먹는다. 그래서 솥의 뚜껑에 세우며 악수(惡獸)로 불린다. 鐘(종)이나 鼎(정)에 무늬를 새겨 넣어 탐욕을 경계하게 한다.

6. 공복(蚣蝮):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 그래서 다리의 아치에서 돌출하게 만든다.

7. 애자(睚眦): 죽이기를 좋아하며 칼의 콧등이나 칼자루에 새긴다. 예를 들면, 관우의 무기인 청룡언월도를 아시는가? 그 무기를 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애자다.

8. 산예(狻猊): 모양이 사자와 닮았고 연기와 불을 좋아하며 향로에 새긴다.

9. 초도(椒圖): 입을 닫아 있는 것을 좋아하며,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신수로 사용된다. 그래서 문고리에 붙인다.

 

이들 아홉 아들의 동물이름은 대체로 설명한 내용과 일치한다. 자, 그러면 아홉 아들의 동물이름과 아홉 아들이 실제로 조형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정리해 보자. 이미 정해진 용어와 내가 고친 용어를 함께 써 두기로 한다. 비록 동물이름들을 붙여놓았지만 결국 모두가 용임을 알 수 있다.

 

1. 비희(贔屓)→석비의 귀부(龜趺): 요즘 쓰는 용어. → 용[龍趺]

2. 치문(鴟吻), 치미(?尾)→용미(龍尾) 혹은 용 : 이미 설명하였음.

3. 포뢰(蒲牢), 鐘고리 → 용

4. 폐안(狴犴), 옥문(獄門)에 장식 → 용

5. 도철(饕餮), 청동기의 악수(惡獸) 정면 얼굴 → 용

6. 공복(蚣蝮), 다리에 장식 → 용

7. 애자(睚眦), 칼 도끼 등 무기를 생기게 함→ 용

8. 산예(狻猊), 사자모양을 향로 뚜껑에 장식→ 용

9. 초도(椒圖), 문고리장식 → 용

 

용의 본질 정확히 알고 접근해야

호승지는 이들 아홉의 용이 어디에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설명 내용은 모두 틀렸어도, 우리가 모두 귀면(鬼面)이나 도깨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모두 용의 아들이라고 지적한 것은, 호승지가 그 아홉 귀면을 모두 용이라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공헌은 아홉 아들을 용과는 다른 이름을 붙였어도 그 모든 것을 용의 얼굴의 측면이든 정면이든 용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날 이들 모두를 잘못 부르고 있어서 주변에 모두 용인 것을 귀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그 아홉 아들 하나하나가 용임을 증명하여 나갈 것이다. 이 중요한 문헌 기록의 진위문제는 용의 본질을 알아야만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알 수 있는데, 용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므로 호승지의 기록을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호승지의 기록을 지나치고 있으나, 그 기록 가운데는 매우 중요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어서 무엇인지 몰랐던 정면 얼굴들이 용의 정면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용의 정면얼굴을 용의 얼굴이라고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 그 까닭은 알았다. 정면 얼굴만 있지 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주변이나 박물관에 가면 사람들이 수면(獸面)이나 괴수(怪獸)나 귀면(鬼面)이라 부르는 조형의 대부분은 용의 정면 얼굴이라고 인식하면 좋다. 중요한 기물(器物)이나 석조(石造)의 중요한 부분에는 반드시 용을 조각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용은 물이요, 만물의 근원이요, 그러기에 변화무쌍하여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사람의 얼굴로도 나타난다. 사람이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은 암시하는 바가 매우 크다. 봉황도 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라만상이 비로자나의 현현(顯現)이듯, 삼라만상이 용의 현현(顯現)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처럼 용의 조형과 상징이 중요하므로, 용을 모르면 한국미술을 더 나아가 동양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비록 호승지의 이야기가 혼란스러워 보여도, 용의 본질을 알면 그리 어렵지 않게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릴 수 있다. 옳은 것을 취하면 세상사 그렇듯이 얻는 바가 크고도 크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