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2〉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전창열 변호사

전창열 국방부 법무관리감, 육군본부 법무감 법조불교인회 회장, 변호사 활동
“나라·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돼야”
중국수교 예견… “중국말 공부해라”
성철 스님과는 서로 존경하는 외우
교양대학 ‘3·1선원’ 다시 문열계획

-언제, 탄허 스님을 만나시게 되었나요?
대불련이 1963년 9월에 결성되고 그해 겨울에 대불련이 법주사에 가서 제1회 수련대회를 하였어요. 그때 추담 스님이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해에 이기영 박사가 오대산에서 대불련의 제2회 수련대회를 하고 나오셨어요. 이때에 나는 대한불교청년회가 주관한 이기영 박사의 원효의 대승기신론 강좌를 들어서 이박사를 알고 있었지요. 이박사가 월정사에를 갔다 오시더니, 오대산에 생불(生佛) 같은 스님이 있다고 하시면서 탄허 스님을 극구 칭찬하시더라구요. 나하고 명호근이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후에 신문에 탄허 스님이 조계사에 나오신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래 나하고 명호근이 스님을 뵈러 조계사 주지방에 간 거지요. 잠시 인사만 드린다고 하였는데, 그만 한 시간이 넘어가 버렸어요. 그때 우리들은 대학생으로 혈기가 펄펄하였을 때였고, 그 당시만 해도 젊은 불자가 없을 때예요. 그래서 그러신지 우리를 만난 스님은 동양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국가와 불교의 문제를 죽 이야기하셨어요. 왕도정치와 패도정치, 국가적 과제와 지도자의 자세 그리고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도 하시면서 청년들의 자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어요. 동양사상과 역사적 사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면서 논리적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모습을 본 우리는 완전히 뿅 간 것이지요. 그때 스님은 돌안경을 쓰셨는데, 얼굴이 훤한 게 달덩이 같았어요. 눈에서는 광채가 나서,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지요.

-탄허 스님은 국가와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그럼요. 사실 스님은 국가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도 나름의 원칙이 있으셨어요. 스님은 크게는 우주의 진리를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셨어요. 그래서 옛날 식으로 동양사상에 입각해서 집권자를 제대로 교화시켜서 세상에 진리를 구현하시는 방식을 생각하였어요. 이를테면 왕사의 역할을 기대하셨지요. 스님은 출세간에서도 할 역할이 있지만, 세간에서는 국왕에게 부촉을 해서, 국왕이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게 해서, 나라를 공평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사람의 의지와 의리를 강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나라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그렇게 끼니가 없이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용돈도 주시면서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는 칭찬을 하셨어요.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해방이 되어서는 건국 시기에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신다는 뜻이었지요. 스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우리 젊은이에게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스님을 찾아온 사람 중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해운거사지요. 그 분은 주역, 정역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관상을 봐주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젊었으니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현상, 현실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청룡사 시절에 중국어 강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들으셨는가요?
그럼요. 그때가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핑퐁외교를 하기 직전인데 스님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우리나라가 중국과 통한다고 하시면서 중국말을 배우면 출세를 한다고 그러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조선 말엽에 일본말을 아는 사람이 일제시대 때에 득세를 하고 일할 수 있었고, 일제시대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해방이 돼서 득세를 하고 일할 수 있었다면서 앞으로 중국과 가까워질 터이니 중국어를 배워 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중국어를 배우려면 중국어 선생이 필요해서, 내가 선생을 찾으러 갔어요. 시청, 프라자 호텔 뒤에 중국 책방이 유일하게 하나 있었어요. 그 책방 주인의 딸이 화교학교 선생이었는데, 내가 그 분을 초청해서 시작하였어요. 강의는 스님 방에서 하였는데 한 3개월을 하였지요. 동양사상 강의는 청룡사의 누각 위에 있는 보제루에서 하였는데 4, 50여 명이 들었지만 중국어는 열댓 명이 들었어요. 나도 끝까지 들었지요. 그때 탄허 스님은 중국어를 배워서 짧은 의사표시도 하고, 중국 스님이 오시면 대화를 자유롭게 하실 정도가 됐어요. 중국 스님들은 고사에 어두우니깐 스님이 고전, 한문을 가르쳐 주시고 그랬어요. 하여간 스님은 중국과 통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계셨어요. 그러나 우리는 실제 그렇게 가까워질까 하면서 확신이 없었지요. 다만 배워 놓으면 좋다고만 했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또 할 일도 있고 해서. 그 통에 간단한 이야기와 발음 정도만 알았지요.
-탄허 스님이 다른 큰스님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스님은 현실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물으면 당신 나름대로의 처방을 갖고 계셨어요. 다른 스님들은 선문답이나 불교의 기본 교리를 전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스님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동양의 역사 속에서 적합한 사례를 찾아서 설명하시고 구체적인 방안, 처방을 내놓으셨어요. 내 생각에는 그 분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동양 역사를 통해서 현실의 대안을 내놓으셨어요. 스님은 우선 유교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다음에는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도교, 선교를 제시하고 그 연후에는 그런 것을 회향하기 위해 불교라는 종지로 정리하셨지요. 그러면서 스님은 불교종지를 강조하셨는데, 스님은 선지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불교의 종지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근본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분의 이야기는 대기설법이지만,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늘 종지에 의해서, 선지에 의해서 하신 것이지요. 즉 스님은 말이 없는 본원 자리로 가도록 모든 사람을 가르쳤어요. 스님이 입산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한암 스님이 중강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 전에는 한암 스님이 스님을 너무 편애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그러나 학문이 깊으니 그리 하신 것이고, 입산 후에 3년간 묵언을 시킨 것도 선을 체득시킨 게 아닌가 하고 봅니다. 스님은 거기에서부터 이미 선의 경지에서 학문을 한 거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화두 아닌 게 없어요. 구태여 우리가 간화선, 조사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화두가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것에 의심을 갖게 돼요. 그러나 그런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스님은 그 자리, 공(空) 도리 그 자리, 본원(本源) 자리로 회향하도록 사람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신 것이에요.

-그렇다면 스님의 화엄사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보기에 참선은 말이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도 자기 스스로는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써 대상을 보지만 눈은 눈 자신을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을 안다고 할 때에는 안이비설신의가 전부 대상이라, 그래서 그 자리는 달마(達磨)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지요. 내가 나를 드러내는 것은 내가 이 잔을 내리치면서 나는 소리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 소리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사람들은 알 수 없다고, 그런 것을 그래도 조금 친절하게 말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교학체계가 최상으로, 종합적으로 드러난 것이 화엄경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스님은 화엄경을 강조하신 것뿐이에요. 그러나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마설(魔說)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말로 조작된 것이라고 보셨어요. 이런 면에서 스님의 선사(禪師)의 경지가 딱 드러나지요.

-탄허 스님이 성철 스님의 책을 보지 마라, 혹은 선문정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어요.
글쎄, 그런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어떤 말 하나만 갖고 큰스님들의 평가, 위상에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김용사에 들어가 있을 적에 들은 것은, 성철 스님이 육조단경은 탄허 번역만 보라고 그랬어요. 성철 스님은 탄허 스님의 한문 실력이 그래도 제일 낫다고 하셨어요. 성철 스님도 탄허 스님을 인정했어요. 두 분은 서로 존경했어요. 내가 보기에 탄허 스님이 남을 비판하는 어법을 고려할 때에 성철 스님을 비판하였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워요. 두 분은 서로 존경하는 외우(畏友)예요. 성철 스님이 월정사 대웅전 공사할 때에 1주일을 방산굴에 머물렀다고 그래요. 그리고 선법으로 보면 점수(漸修)와 돈오(頓悟) 아닌 게 어디 있겠어요. 그것은 그때 그때의 방편설이거든요. 그런 말끝에 놀아나면 안 돼요.

-스님은 도의적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어요.
그것은 내가 화엄론 회석의 서문에 조금 이야기해 놓았어요. 스님은 원시시대부터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오행설에 근거하여 말씀을 하셨어요. 원시시대에는 목극토이기에 농경사회(농기구)가 온다, 그 다음에는 금극목이기에 철기구가 주도하는 사회가 오고, 그 후에는 화극금이기에 화약이 지배하는 사회가 온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그 이후 시대는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수극화예요. 수는 물이지만 지혜이기도 해요. 수극화가 의미하는 사회의 상징은 컴퓨터예요. 분별지가 최고의 극치가 되는 것이지요. 원시시대에서부터 부정을 거친 긍정이기에 앞으로는 도의적 인재가 필요한 세상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도의적 인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일즉다(一卽多)의 세계, 일즉다 다즉일을 생활하는 세계, 그것을 아는 세계, 말하자면 자기를 잊는 것 즉 동체대비(同體大悲)인 거죠. 그런데 그것은 말로만 표현하지, 실제는 그리 안 되잖아요. 요즘 시대를 보면 거의 안 돼, 하나도 안 돼요. 그래서 도의적 인재라는 것은 화엄경의 몇 구절을 아는 것이 결코 아녜요. 어떤 면에서는 도인(道人), 달사(達士)가 많이 나와야 된다는 것인데, 그런 큰 인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자기 에고가 엷어지든가 해야 하는데, 지금의 지도자들은 남을 등지고 있어요. 이것은 지도자가 아녜요. 스님이 말한 도의적 인재는 도덕, 윤리, 질서와 같은 가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동체대비, 다즉일, 에고(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갖추어진 인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분별지마다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는 직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도 볼 수 있지요. 내가 우주라는 화엄적인 생각이 있는 것이에요. 하여간에 도의적 인재에 대한 개념은 전달하기가 어려워요.

-탄허 스님은 조계종단과 공부 안 하는 스님들의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스님은 불교라는 주물 틀을 우주 진리가 감싸고 있고, 당신은 국가를 지도할 능력이 있으며, 살아 있는 진리를 민족에게 전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비구 대처의 싸움을 하는 조계종의 이권 다툼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스님은 민생구제와 국민정신 순화는 위정자의 몫이고 스님들은 위정자에게 철학과 사상을 제시하고, 뒤에서 역할을 독려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나라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열 명을 기르는 것보다 한 명의 불교 정치가를 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결국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원음(原音)을 승려들에게 가르쳐서, 승려들이 그 본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중흥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셨지요. 그것이 그분의 시종일관한 교육관, 불교관이에요. 어떤 때에는 앞으로 불교는 흥하지만, 조계종은 망한다고 농담 비슷하게 하셨어요. 스님은 한국에는 불교의 형태는 있지만 정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요. 스님에게도 부친에게서 배운, 전해진 습기(習氣) 같은 것이 있었을 거예요. 부친이 종교를 통한 독립운동, 개벽을 지향하였으니 스님도 말년에는 개혁을 말씀하셨어요. 수월 스님, 혜월 스님이 농사, 고행을 통해서 보살행을 하였는데 그런 농사, 고행은 그 스님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그것이 습기인 셈이지요. 이처럼 스님이 깨달았다면, 스님은 보림의 수도 차원에서 자기 적성에 따라서 그런 것을 한 것이지요. 즉 스님은 선사로서의 면모로 경학과 교육을 하신 것이지요. 그것을 당신의 살림살이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해요.

-스님은 대전 학하리를 인재양성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아요. 스님이 인재양성을 한 것은 오대산 수도원이 제일 먼저이고, 두 번째가 우리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면 사람을 잘 뽑아서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또 스님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자주 말씀하셨어요. 명치유신처럼 소수정예가 일본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하시면서 뜻과 이상을 같이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 생각을 말씀했어요. 스님은 학하리를 도의적 인재양성의 터전, 거점으로는 제일 적지라고 말씀했어요. 그곳은 송시열의 사당이 있던 곳인데, 스님은 늘 그곳을 인재양성의 적지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이 진관사에 계실 때에 나하고 명호근이 가서 뵈다가 우연히 인재양성에 대해서 말이 나와서 우리가 앞으로 스님의 뜻, 유지를 이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법인을 만들겠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그 법인의 이름을 ‘3·1’로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 주셨어요. 아마 그 3·1은 주역, 삼위일체, 삼덕일심 등 불교적 상징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재단을 만들 때에 3·1로 하려고 하다가, 그래도 스님의 이름을 넣어서 해야 한다고 하여 재단명칭에는 넣지 못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각성 스님을 모시고 서울 강북의 포교당을 만들 때에는 3·1선원이라는 명칭으로 했어요. 지금은 여러 사정상 문을 닫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열려고 합니다. 3·1선원은 1985년도에 만들었는데, 한국불교 교양대학의 효시입니다. 처음에는 방배동에서 시작하였지만, 그 포교당의 커리큘럼을 짜는 것, 법사를 모셔오는 것은 손창대 형이 주관으로 했지요. 그 형은 대불청 주관으로 법통사에서 나온 불교성전을 만든 주역이라, 그런 것에 능했어요. 앞으로는 3·1포교당을 재단 정관에도 넣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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