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1〉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정념 스님

정념 스님 (월정사 주지) 동국학원 이사, 중앙승강대 총동문회장 역임
오대산 수도원 수강생은 사부대중
지도계층 인재양성 사회변혁 기대
돈오돈수 비판… 깨쳐도 보임해야
스님의 독특한 서체 전승 선양 필요

-스님은 언제, 어디에서 탄허 스님을 만나셨나요?
저는 1979년에 쌍계사에서 행자로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대학생으로부터 오대산에 가면 팔만대장경에 통달한 도인 같은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 저는 갑자기 오대산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 도인이 바로 탄허 스님이었지요. 그래서 쌍계사를 떠나서 오대산 월정사로 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1979년 말이었습니다.

-1980년 가을에는 이른바 10·27법난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에 겪은 일과 탄허 스님과의 관련을 회고해 주세요.
저는 계를 받고 제 사형되는 혜광·현오 스님과 함께 그해 동안거 결제를 해인사 선원에서 하자고 약속을 하였지요. 그래서 방산굴에 계신 만화 스님에게 그런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경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슨 참선 공부냐는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초 약속대로 함께 해인사로 갔는데, 방부 날짜를 잘못 알아 늦었더라고요. 그래서 날짜 때문에 입방을 하지 못해서 학산 스님이 계시던 백련암, 월명암, 복천암을 거쳐서 대전 자광사로 갔습니다. 그때 탄허 스님이 그곳에 계셔서 인사를 드렸지요. 자광사에서 복천암에 방부를 들여서 참선 공부를 하기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를 하려면 화두(話頭)가 있어야 하기에, 저는 인천 용화사의 송담 스님에게 화두를 받으러 갔어요. 그렇지만 송담 스님은 구산·성철 스님 같은 방장 스님들에게 화두를 받으라고 하면서, 화두를 주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자광사로 돌아오면서, 그럴 바에는 탄허 스님에게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탄허 스님에게 “정진을 하러 가는데 화두를 주십시오” 하였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영운선사에 대한 수행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사미거 마사도래(驪事未擧 馬事到來)’ 화두를 주시고는 “열심히 정진하고 이 화두를 갖고 참구하라” 고 하셨습니다. 뒤에 가보니, 이 화두는 제 출가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경허 스님이 참구하던 화두라, 저로서는 인연이 많은 것을 느꼈고 그래서 애정 같은 것을 느꼈죠. 그래서 저는 그 화두를 갖고 복천암에서 참선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법난이 일어나고, 오대산의 스님들이 잡혀갔다는 말들이 들려오고 그랬어요.

-그렇군요. 그러면 복천암에서 수행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래서 저는 복천암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일단은 대전 자광사로 내려왔습니다. 그래 자광사에서 두 달 정도, 1980년 말까지 있었어요. 그때 탄허 스님은 왔다 갔다 하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광사 거기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자광사 주지로 있었던 원명 스님이 탄허 스님의 환심을 사려고 여러 일을 하였어요. 자광사는 신도관리, 집수리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지내던 곳인데, 원명 스님이 그런 것을 해결하면서 지내니깐 탄허 스님이 좋아하신 것이지요. 또 탄허 스님의 원력이었던 동양학연구소 같은 것도 해드리겠다고 하면서 신임을 얻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스님(원명)이 탄허 스님의 유묵과 출판된 신화엄경 상당 부분을 빼내는 사고가 생겼어요. 그래서 탄허 스님이 크게 상심했어요. 그때 인근 대전지법에 있었던 김동건 판사가 관여해서 해결을 하고 그랬죠.

-탄허 스님에게 본격적인 강의를 들은 것인데, 소감이 어떠하셨는지요?
탄허 스님의 강의는 정말 대단했어요. 스님은 정말 막힘이 없이, 책은 전혀 보시지 않고, 칠판에 가득하게 쓰면서 하셨지요. 처음에는 중국의 구류철학부터 시작해서 동양철학의 대강을 설명하셨어요. 그때에 스님은 유가, 도가, 묵가, 음양가, 종횡가, 법가, 농가 등등을 대의까지 설명하셨지요. 이렇게 스님은 동양학 전반을 정리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사교의 대의를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여덟 시간을 하시다가, 피로하시면 안 된다고 해서 네 시간씩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런 것을 하시면서 강의 내내 원본 외에 책을 전혀 안 보시고 지속하셨는데, 무궁무진한 것을 들려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장자〉를 하시면서,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까지 망라하셨어요. 저는 스님의 강의는 폭이 넓고, 깊이가 있는, 신바람 나는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참가 대중들도 다들 환희심으로 경청을 하고, 집중을 하였어요.
-졸업식 이후의 일화들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강의를 받은 일부 스님들은 스님의 강의에 환희심을 내서, 강의를 마치자 마자 상원사 선원으로 올라가서 참선 정진을 한 일도 있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담 스님, 시봉을 하였던 환원 스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방산굴에 가서 스님을 찾아 뵈었지요. 학담 스님과 환원 스님은 그 이전에 같이 선방을 다녀서 친했어요. 그래서 같이 행동한 것 같습니다. 학담 스님이 스님의 강의가 감명이 깊었다고 하면서 상원사로 올라가서 더욱 정진을 하겠다고 하니까 스님은 아주 좋아하셨지요. 애정어린 시선으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경봉 스님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부산의 구덕체육관인가 신도들이 모인 어느 법회장에서 말씀하시기를 “탄허가 가면 한국불교가 어렵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봉 스님이 돌아가셔서(1982.7.17) 스님이 경봉 스님의 비문을 짓기로 하였는데, 바빠서 아직 그것을 써드리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을 못 지으신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어요. 결국은 못 지어드리고, 그 후에는 병원에 입원하시고 바로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학담 스님을 비롯한 일행 10여 명은 상원사로 와서 참선 정진을 지속했어요. 당시 상원사에서는 만화 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학담 스님 일행이 기존 상원사 공부에 합류한 셈이지요. 제주도 출신으로 나이가 많았던 성관 스님이 입승을 보고, 지금 봉암사에 있는 지공 스님, 각윤 스님, 각일 스님, 환원 스님, 신룡·현오·현운·현성 스님 등등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상원사 원주를 보면서, 그 스님들과 함께 정진을 했어요.

-탄허 스님은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이론을 비판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것을 그 강의 때에 스님에게 직접 들었어요. 스님은 바로 출판된 성철 스님의 책인 〈선문정로〉를 들고서 하셨는지 그것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책을 갖고서 하시지 않았나 합니다. 탄허 스님은 이게 잘못된 것이 많다고 하셨어요. 특히 돈오돈수 논리를 많이 비판했어요. 이치적으로는 무수무증(無修無證)이요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부처님, 육조 혜능, 우두 법융선사 정도는 그렇다고 해줄 수는 있지만, 어느 누가 돈오돈수를 할 수 있겠는가 하셨어요. 깨달으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건 특별한 사람 정도, 설사 그런 사람들(부처님, 혜능, 우두법융)은 인정해 준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어요. 중생의 업력은 깨쳐도 순간에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보임이라는 더욱 정요로운 수행을 통해서 완전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성수불이(性修不二) 성(性)의 자리에서, 닦아도 닦음이 없는 자리에서 돈오점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탄허 스님은 교학의 대가이시지만 선사라고도 부르지요?
스님은 교학을 종지적으로 다루고, 유불선을 회통하는 안목이 뛰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록이나 경전을 두루 살피셔서 걸림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그러나 활발발한, 무애한 그런 선의 가풍, 선적인 측면도 겸수하였다고 저는 봅니다.

-탄허 스님의 유묵은 선필(禪筆)로 부르지요?
그렇지요. 저는 월정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스님의 유묵을 오대산문화 차원에서 보존, 전수할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스님의 유묵, 글씨체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서체, 서법이 담긴 유묵은 오대산 전통의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전승, 선양하기 좋은 대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을 기리는 휘호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스님의 서체에 대해서는 서예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독특하고, 살아 숨쉬고 있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또 스님의 서체를 기본·정도로 해서 서예 교본책이 시중에 나돌고 있어요. 이것은 스님이 살아 생전부터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작업을 한 분이 공군 장군이었지요.

-스님은 정치,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스님의 발언, 관심 등을 유의해서 살피면 정치적 관점이 많아요. 그것은 유년시절에 유교를 배운 것, 그리고 부친이 보천교라는 민족종교의 간부이었던 것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스님은 왕도정치, 제정일치를 많이 피력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맹자에 나오는 것을 활용해서 토지·경제제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정치가 모든 분야, 전반적으로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정일치가 동서양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효한 방안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스님은 지도자의 자질, 자격의 문제도 무척 강조했어요. 정치 지도자는 도덕,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덕, 철학이 빈곤한 지도자는 많은 실정을 할 수 있다고 보시면서, 제정이 불일치될 때에도 많은 문제가 나온다고 봤어요. 스님은 학문은 훈고학을 하셔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미래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러다 보니 예언을 하셨는데, 이는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와 연결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생활에서도 격식이나 전통성에 구애받지 않으셨지요. 이것은 스님이 세상의 변화를,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과거를 통해서, 과거를 배워서 미래를 전망하려는 것에 관심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스님은 정치를, 경세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1982년 겨울, 특강 시에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 스님은 신교육을 받았다면 진보 지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지요?
그렇지요. 스님은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정치를 통해서 구체적인 현실을 바꿔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스님이 직접적인 정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님은 왕사 국사와 같은 위치에 계시고 엘리트,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서 그들로 하여금 정치를 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도의적 인재, 즉 동양학 및 화엄사상을 배운 인재를 양성해서 그들이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정신문명을 개조하시고, 평화와 이상세계가 깃든 사회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도의적 인재양성을 통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도의적 인재는 동양적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지도자라고 볼 수 있지요. 스님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셨기에 스님은 오대산 수도원을 여실 때에 수강생을 사부대중으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 수강생을 사회 지도계층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재가 세상, 사회를 변혁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스님은 말년에도 대전 자광사에 그런 꿈을 실현시킬 무대, 공간을 만들려고 하셨지요.

-스님의 그런 꿈, 이상이 구현되지 않았던 것이 아쉽군요.
현해 스님께서 1992년에 월정사 주지를 맡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10여 년은 오대산에 많은 분란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문도들이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오기 위해 많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가 노태우 대통령 시절입니다. 오대산 일은 조계종단 차원에서 실랑이를 많이 하였고, 그러면서 그 일은 정치적으로도 관련되고 그랬어요.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의 비서관인 김성한이 그때 우리 일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그랬어요. 그 사람은 오대산은 한암·탄허의 문손이 살아야, 그렇게 되도록 배려해야 된다는 관점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종단과 우리 문도가 그런 문제를 갖고 비상한 상황이 되었을 때에 그 문제를 풀어가는 중심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 후에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을 해서 월정사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해 스님, 도완 스님, 저 등이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었지요. 그때 노대통령은 자기는 매사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기준이 전통에 입각해서 하였다고 은유적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저는 그 전통이라는 것의 의미를 오대산은 한암·탄허 스님의 권속이 오대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러면서 노대통령은 자기는 어렸을 때에는 파계사의 고송스님 무릎에서 컸다고 그러면서, 6공 치적을 북방외교로 말하고 거기에는 탄허 스님의 영향,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말을 했어요. 자기는 군인(수경사령관) 시절 평소 탄허 스님을 방문해서 탄허 스님에게 향후 한국의 30년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탄허 스님은 앞으로 세계(북방, 러시아, 중국, 미국 등)가 변화되는 속에서 한국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그랬대요. 그런 세계사의 흐름, 미래가 전개되는 역사가 올 것을 준비, 대비하라고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대통령은 그런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북방외교를 하였다는 말을 우리들에게 하였어요. 또, 북방외교를 추진할 적에 어려움이 생기면 탄허 스님을 생각하면서 이겨냈다고도 했어요. 이런 면에서는 탄허 스님이 국가에, 한국사에 기여한 종교 지도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상원사에 와서는 당신의 호(일해)를 탄허 스님이 지어주었다고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