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정토의 미적 세계

불교의 서방극락정토
아미타불의 주석처
욕망없이 法悅 가득해
모든 존재 이르는 곳

자리이타 아우름이
불교 미학의 요체

불국정토를 만들려면
자신부터 청정해져야

▲ 통도사 극락전의 반야용선. 모두 서방극락정토와 관계된 도상들이다. 불교가 말하는 극락세계는 선택된 자가 아닌 모든 범부 중생이 갈 수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찬란한 빛의 궁전, 화려한 보배로 장식한 누각, 난간에는 오색 깃발이 펄럭이고 보배로 만든 그물이 일곱 겹으로 드리워져 있다. 금모래가 깔려 있는 칠보의 궁전 연못에는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이 가득 차 있고 그곳에 갖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 저마다의 자태를 폼 내고 있다.

그곳으로 가는 유리로 된 투명하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노라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보배 나뭇잎 사이로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여의도 윤중제 흩날리는 벚꽃처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가릉빈가 등 진귀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천상의 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를 듣는 자는 깊은 평화와 환희 속에서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리라.

만약 누군가가 그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어릴 적 엄마 아빠 손잡고 탔던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같이 신나고 크루즈선보다 더 화려한,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용 모양의 호화로운 쾌속 여객선을 타고 간다면, 늦지 않도록 서둘러야 하리라.

예약한 사람들이 모두 승선하면 배는 떠날 것이다. 뱃머리에 선 뱃사공은 돛을 높이 세우고 방향타를 서쪽으로 돌려 출발을 서두르고, 막 불어온 순풍은 순조로운 항해를 예견하듯 시원하다. 승객들은 기쁨에 들떠 어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서 배를 타시오.”
“다 탔습니까?”

어수선한 부두에서는 내가 탈 배를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싹 차려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잠깐 한눈을 팔다간 놓칠지도 모른다.

지난번 항해 때는 어느 여인이 가족들과 작별인사 하느라 잠시 지체하여 배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 이처럼 허둥거리다가 배를 놓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뒤늦게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이미 떠난 배를 되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자비로운 뱃사공이 던져준 밧줄을 용케 붙들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서쪽나라까지 갔다고 한다. 그래도 용맹심과 끈기가 있었는지 그 여인은 십만 억 나유타 국토를 지나가는 긴 여행 내내 악착스럽게 밧줄에 매달려 버텼다고 한다.

모두 행복한 여행, 그 여인이 그토록 악착 같이 가려고 했던 그곳, 그곳이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라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신나는 여행을 예약해두었다고 속삭인다면?

불교에서 죽음은 이처럼 밝고 건강하며 때로 익살스러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서원을 세워 만들어놓은 서방 극락정토까지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여행. 얼마나 즐거우면 ‘극락(sukh?bat?,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했을까? 대성인로왕보살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주시고 아미타부처님이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을 대동하고 맞이하러 오신다. 얼마나 중생을 어여삐 여기셨으면 직접 마중 나오기까지 하실까?

가장 불안하고 가장 두려움에 떠는 순간을 위하여 불교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준비해두었다. 이 국토를 아미타불의 타수용국토인 극락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는 아미타부처님이 전생에 법장비구였을 때 마흔여덟 가지의 서원을 세워 만든 것으로, 다른 말로 편안한 나라, 안양국이라고도 하고 청정한 땅, 정토라고도 부른다.

이 세계는 가시적으로도 아름다운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특히 아미타부처님께서 전생에 인행을 행할 때 삼계의 더럽고 탁한 모습에 마음이 쓰여 특별히 맑고 아름다운 세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것은 마음을 흩트려 트리는 미혹의 원인으로 간주된다. 〈노자〉에서도 아름다운 소리는 귀를 먹게 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눈을 멀게 한다고 경계한다.

그러나 극락정토에서는 감각적인 즐거움조차 법의 즐거움으로 전환된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새소리를 듣고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락정토는 감각적 즐거움이 있더라도 욕망이 없기 때문에 욕계가 아니며, 여러 가지 궁전과 누각, 나무와 땅, 연못이 건설되어 있는 지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늘 세계인 색계가 아니다. 또한 소리와 형상, 향기, 감촉이 존재하는 감각의 세계이므로 무색계가 아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끝없이 윤회를 계속하는 변화하는 세계, 거짓된 세계가 아니라 맑고 청정하며 진실한 세계이며 다시는 삼계의 고통의 바다, 윤회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삼계의 제약을 벗어나 있다.

이처럼 삼계의 제약을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한 이 국토는 끝없이 넓다. 허공처럼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이 정토에 궁전과 누각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으며 아미타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곳이므로 모든 중생을 다 수용할 수 있다. 유마의 방처럼 병들어 아픈 중생,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중생을 모두 받아들여도 비좁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된다.

이곳은 아미타부처님의 청정하고 밝은 지혜로 가득 찬 빛의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궁전과 누각, 연못, 나무 등등 온갖 사물이 보배로 장식되어 있듯이 모든 중생의 마음도 보석과 같이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이 밝고 청정한 마음에 세상의 만물이 비춰지면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밝고 깨끗하게 빛난다. 마치 하늘에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추듯이 맑은 마음에 비춰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차별이 없다.

보석처럼 빛나는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러워서 만나는 사람마다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다. 마치 부드러운 풀이 바람이 불기도 전에 바람보다 먼저 눕듯이 청정한 마음은 중생의 인연과 근기에 맞추어 즐거움을 준다.

마치 여러 가지 꽃들이 한데 섞여 피어나더라도 조잡하거나 더럽지 않고 서로 어울려 더욱 아름답듯이 서로 다른 근기와 인연을 지닌 중생들이 함께 섞여 살지만 여러 가지 빛을 발하는 꽃처럼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로서로 무한한 보배의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그물에 달려 있는 구슬이 부딪힐 때마다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이 세상의 중생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법의 음악처럼 아름답고 조화롭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늘 꽃과 하늘 옷, 하늘 향은 세상을 향기롭게 하고 아미타부처님의 지혜의 밝은 빛은 이 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조금도 어두운 곳이 없다. 그렇듯 중생의 마음도 언제나 밝고 환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전혀 없으며, 범음으로 설법하시는 목소리가 항상 시방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무량한 겁 동안 수행하신 훌륭한 공덕, 무한한 자비로 만들어주신 이 세상, 여래께서 가시는 곳마다 청정한 꽃이 피어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중생들도 또한 부처님의 법미를 만끽하고 선열로서 밥을 삼아서 몸과 마음의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고 항상 즐거움이 넘친다. 이승이나 여인이나 장애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중생의 모든 욕망과 즐거움을 마음대로 하더라도 늘 흡족하여 만족하지 못함이 없다.

이와 같이 열일곱 가지의 청정한 공덕으로 성취된 극락정토는 불교의 이상향, 유토피아이다. 그곳은 고통을 지니고 아직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중생까지 받아들여주는 자비의 땅이다.

불교에서 미적인 것은 세속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중생의 아픔을 거두어주고 두려움을 덜어주는 자비의 방편이다. 지극한 즐거움의 세계는 부처님과 보살님들만이 즐기는 그들만의 세상의 것이 아니라 헐벗고 고통 받는 근기 낮은 중생들마저 껴안은 우리들의 세상이다.

청청한 세상, 정토를 만들려고 한다면, 〈유마경〉에서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그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하다.”고 하였듯이 청정한 마음, 올곧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불교의 미학은 자리와 이타의 어울림이며 청정하고 맑은 세상을 가져오는 방편이다.

아미타부처님이 자비롭게 망자를 맞이하러 오는 장면이 묘사된 것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가 있다.

이 그림은 가장 경전의 설명에 맞게 그려진 그림이며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성중내영도〉는 1476년 제작된 것으로 아미타여래가 여덟 명의 보살과 성중들을 거느리고 망자에게 내영하는 장면을 마치 구름을 타고 다가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은 통도사에 소장된 〈용선접인도〉와 김해 은아사, 신륵사, 안성 청룡사에도 남아 있다. 반야용선에 타지 못해 밧줄에 매달려가고 있는 악착보살의 모습은 운문사 대웅보전과 영천 영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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