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신계의 어버이로서 홀랑 벗어나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부처님도 똑갇은 인간이었는데
여러분은 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자기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까.
과감하게 뛰어넘어야 합니다.
입에 밥 들어가지 못할까봐 걱정, 옷 헐벗을까봐 걱정,
거리로 나앉아서 잘까봐 걱정, 죽을까봐 걱정.
이런 걱정을 하다보니 옹졸한 마음이 돼서
항상 노예로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감하셔야 됩니다.


먼데 각 지원에서 어저께 오셔서 오늘까지 고생이 많으시리라고 믿습니다. 하여튼 한마음으로 마음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다섯 가지 마음의 향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제일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더 말씀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렇게 하는 수행 자체가 바로 그 길을 들어서는 것이거든요. 지난번에 ‘계향(戒香)이니’ 했습니다. 계향ㆍ정향(定香)ㆍ혜향(慧香)ㆍ해탈향(解脫香)ㆍ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까지 다섯 가지의 그 목표를 세운 겁니다.
지금 없는 얘기를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염불할 때나 예불 올릴 때도 그렇고 항상 그것을 하고 계십니다마는 하면서도, 자기가 그것을 그저 입으로만 올려서 염만 하면은 되는 줄 알고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해놓으신 것을 그대로 우리가 실천하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자기 마음을 바로 발전시켜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걸 발전시키고 소신껏 계발시키고 해서 자기의 능력을 바로 창조로까지 끌고 가야만 우리가 자유인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관(觀)하라. 관하라.’ 해도 그 관하는 도리를 완전히 터득을 못해서 항상 미급하게 그저 놨다 뺏었다, 놨다 뺏었다 이렇게 가곤 있습니다. 하인한테 어떤 심부름을 시킨다 해도 믿고 “얘, 아무개야. 이거 사 오너라.” 하고 돈을 맡기는데 하물며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집합소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못 믿어서 꺼냈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심부름을 시키는 데도 뺏었다 줬다, 줬다 뺏었다 이렇게 해가지고 진짜 심부름을 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님네들도 더 한층,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창조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 스님네들이나 살림하는 유발승들이나 가만히 틀고 앉아서 게으르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그대로가 참선이니라.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이렇게 가르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실행을 제대로 못해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거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한테 광력ㆍ전력ㆍ자력ㆍ통신력이, 그 재료가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재료가 충만한데도 불구하고 그 재료를 끌어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또 짚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계향(戒香)이니…. 하하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마는 모르시는 분들은 열 마디, 백 마디 해줘도 잘 모르는 게 많습니다. ‘부처님의 법에 누가 되지 않게 해야 하며….’ 했습니다. 또 유발 거사든 유발 보살이든 또는 출가한 사람들이든 간에 자기 은사에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자기에 누가 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내 몸뚱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깐 모든 상대성이 생기고 모든 게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게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죠.

그러니깐 모든 거를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아니 되죠. 잘못된 것도 잘된 것도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일체를 내 탓으로 돌림으로써 남의 탓은 안 하게 됩니다. 남한테 증오도 안 하고, 원망도 안 하고, 부질없는 미움도 안 생길 거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이 스님네들의 테두리 안에서도 그렇지마는 모든 게 자기 있는 데가 절대로 도량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 탓으로 돌려라. 내 깊은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내면 마음속에 맡겨 내 탓으로 돌려라. 그리고 내 탓으로 돌리니깐 부드러운 말이 저절로 나오고, 부드러운 행동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니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모두를 그렇게 화목을 도모하고 의리를 도모하고, 가짜 사랑 아닌 진짜 사랑을 베풀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면서 내 탓으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못되는 거는 내 탓으로 돌리고 한생각에 잘 마음을 내서 내 탓으로 돌려놓고 이러는 것이 바로 계향 아닌 계향입니다.
그리고 정향! 정향이니, 정향(定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내면세계에 내 자성 주인공(自性 主人空)을 세워놓고 잘못되는 것도 잘되게끔 마음을 한생각 돌려서 거기 놓고 ‘너만이 바꿀 수도 있지 않아.’ 하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속에서 구정물이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새 물도 나오게 할 수 있다.’ 하고 관하는 겁니다. 모든 일체를 다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거기에 놓고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자기가 좋은 일을 했든지 좋은 말을 해줬든지 좋은 행동을 했든지 감사하게 거기에 생각해서 놓고 이렇게 해서 그 마음속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정향입니다. 이건 입으로만 불어서, 입으로만 그저 아무리 나팔을 불었던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이 차다 뜨겁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먹어보는 사람이나 뜨거운지 찬지 미지근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감칠맛을 알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먹어보지 않는다면 뜨거운지 찬지 얘기만 들었지 감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깐 각자 여러분이 진짜로 내가 체험하고 다스리면서 넘어가야 할 일은 넘어가야 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혜향(慧香)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로 보지 않으면서 관찰하는 겁니다. 관찰하면서, 즉 말하자면은 체험하고 또 체험하는 것이 바로 혜향입니다. 이것을 둘로 보지 않으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체험하지 않는다면 해탈이 올 수가 없죠.
그 다음에 해탈향(解脫香)이니, 만물만생 그 자체를, 그 무명에 묶였음을 풀어서 여여하게 다스려 나가는 것이 바로 해탈향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 집이 갈라지지가 않고 무너지지가 않듯이 계향을 아주 철저하게 잘하고, 정향을 철저하게 잘해야만이 해탈향ㆍ혜향ㆍ해탈지견향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지견향이니’ 했습니다.
그러면 삼라만상 일체 만물만생이 보살피고 느끼고 그것이 항상 밝아서 걸림 없이 구족한 것을 우리가 해탈지견향이라 이름하는 겁니다. 일체 만법을 내 마음 하나로 인해서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면서, 반복하면서 돌아가는 상대성 원리. 이 살림살이. 이 모두를 우리가 여기에서 공부하고 터득을 안 한다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느끼고 다스리고, 실험하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지금 시대에 생각하고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이 마음의 참선입니다. 이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기여할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고 창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문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지 않습니까? 죽는다면은 지금 이 시대가 과거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무명을 쓰고 어떤 모습을 쓰고 나오든지 간에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땐 미래이자 현실입니다. 그래서 삼세에 지은 모든 일이 유전성으로 또는 영계성으로 업보성으로 세균성으로, 내가 나쁜 일 또는 악한 일 모두를 행한 것이 바로 업보가 돼서 삼독이 된다는 얘깁니다. 삼독. 그러니깐 삼독이란 말이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일, 오늘. 내일이자 오늘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교차로를 연방 들고 넘으면서 이렇게 여기까지 우리가 온 것이며 가는 사람도 역시 그 삼독을 면치 못한다 이런 소립니다.
이 삼독을 면치 못하는 원리는 내 마음이 툭 트이지 못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한계성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지닌 그 관습에 젖어가지고 한 치도 나가지 못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요건 요렇게 해야 되고 요건 요렇게 해야 되고, 꼭 어디를 가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문을 열고 나와야 하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고, 불에 들어가면 타 죽고 또 무서운 데 가면은 전부 무서워서 죽고, 귀신에 말리면 그냥 무서워서 죽고. 이런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사를 잘못 가면 안 되고 삼재가 들리면 안 되고, 안 되는 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 온통 안 되는 것뿐이죠.

그래서 오간지옥고를 받는다 하는 거는 땅 끝에서 국내 밥내도 냄새 맡지 못하는 게 오간지옥입니다. 전체가, 전체가 한데 합쳐진 게 오간지옥이에요. 그런데 오간지옥이 무슨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찰나찰나에 나한테 용도에 따라서 차근차근히 살 만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기고, 살 만하면 또 일이 닥치고, 이게 해결되면 저게 터지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러니 지옥이 따로 있습니까? 이 세상이 지옥이지. 그러니 지옥도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지옥을 살고,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바로 승천해서 천당에서 산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삼독을 면하려면은 그런 그 마음의 관습에서 떠나야 될 텐데 삼독을 면하지 못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다는 얘깁니다. 한 치도 이거는 벗어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가지고도 내 마음대로 못 하니 이거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 한다면은 이거는 노예지 자유인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처럼 다 타고나서 부처님은 눈이 셋입니까? 코가 둘입니까? 여러분도 눈 달리고 코 달리고, 부처님도 눈 달리고 코 달리고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인간이었어요. 그랬는데 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왜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까? 과감하게 말입니다. 과감하게 뛰어넘어야죠.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입에 밥 들어가지 않을까봐 걱정, 옷 헐벗을까봐 걱정, 거리로 나앉아서 잘까봐 걱정, 죽을까봐 걱정. 이런 걱정을 하다보니까 과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옹졸한 마음이 돼서 항상 노예로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과감하셔야 됩니다.

마음은 이 자리에 앉아서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몸뚱이를 두고도 우주 탐사를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거니와 내 집도 갔다 올 수 있고, 내 회사도 갔다 올 수 있고, 모두 갔다 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신발 한 짝도 어디 놓여 있는지, 맛있는 음식을 얻다 뒀는지도 알 수 있죠. 그러고도 못 믿습니까? 아까 계향ㆍ정향ㆍ혜향 이렇게 해서 혜향까지 탁 둘 아니게 관찰하고 체험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바로 해탈은 스스로서 오는 것이고, 해탈지견향은 스스로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독을 제거한다면….’ 하는 소립니다. 삼독을 제거한다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한데 한마음으로 나투어 주신다 이런 뜻입니다. 나투어 주신다. 나투어 주시면 몸과 마음이 항상 밝아서 말입니다, 일체 고에 물들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번뇌나 고나 일체 굴레에서 벗어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라는 것도 이름해서 언덕이지, 우리가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는 교차로, 요것을 언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는 것도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걸 어렵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정신계와 물질계, 이 몸과 정신, 마음이 바로 공색(空色)입니다.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색이니라. 꽃이 필 때는 색이요, 꽃이 질 때는 공이니라.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어디다가 대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두 돌아가는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어떻게 글로 다 쓰리까.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 세밀하고 아주 묘한 도리는 바로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지혜롭게 해나가는 그 방도가 바로 혜향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지혜로워야…. 그래서 계향도 정(定)이요 혜향도 정이다. 그 정을 안다면 해탈향은 물론이거니와 해탈지견향도 그대로 포함된다. 그래서 오신통을 이룬다 하더라도 오신통을 이뤘다 하지 말라. 오신통을 벗어나야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신통을 구하려고 노력들을 하고, 해탈을 구하려고 노력들을 하고 부처를 구하려고 애를 쓰지만, 어리석지 않은 사람들은 해탈을 구하려고 아니 해도, 부처를 구하려고 아니 해도 저절로 구해진다 이겁니다.
욕심이 앞서면 바로 눈이 캄캄해집니다. 욕심이 앞서면 문을 찾아서 나고 들어야지 옴짝달싹을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진짜 사랑 아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야만이 문 아닌 문이, 전체가 문이야! 문 아닌 곳이 하나도 없어. 문 찾아 들고 나는 사람들은 소인이나 하는 짓들이고, 대인은 문이 있으나 벽이 있으나 없으나 그대로 문을 통달해서 그대로 한 도량이지. 그러니 마음이야 한 도량에 어찌 넘나들 수 없겠느냐 이겁니다. 허! 마음이야, 모습이 있는 거든 없는 거든 저 천당세계든 지옥세계든 인간세계든 마음이야 어찌 걸려서 못 가고 못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 마음부터 알아야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을 알 수 있느니라.’ 그 마음을 알아야 응신으로 화해서 여여하게 어떠한 용도든지 나투어 주신다 이겁니다.

그런데 모두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도 기복에 젖기도 하거니와 기독교든 카톨릭교든 불교든 모두가 그냥 기복에 젖어서, 하나서부터 열까지 어쩌면 그렇게, 외국에 가봐도 그렇고 한국을 봐도 그렇고 어쩌면 그렇게 기복으로 철석같이 모두 노예가 됐는지, 나는 알 수가 없어요. 한 세상 캠핑 왔다가 홀가분하게, 목마르면 물 마시고 말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자고 싶으면 자고 똥 마려우면 시원하게 똥을 누고. 아, 사람 사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지, 뭣이 따분한 게 있으며 뭣이 답답한 게 있으며 뭣이 그렇겠습니까마는 여러분은 그 마음의 노예가 돼가지고 한 발짝도 떼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누가 돈을 가지고 살질 말랬나요, 좋은 집을 갖고 살질 말랬나요? 정도에 넘치면 해가 오니 정도에 넘치지 않게 하라. 그리고 네 몸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관리인밖에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네 자생중생의 집합소니라. 자생중생들은 안에서 심부름을 하고 바로 외부의 집합소, 너 심부름꾼은 바로 겉에서 심부름을 해주느니라. 그러니 안에서 심부름을 해줘야 겉에서도 심부름하게끔 건강하게 뛰고 다닐 거고, 안에서 심부름을 안 해준다면 겉의 몸뚱이도 한 치도 걸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자생중생을 먼저 제도하라 했습니다.

그러려면 계향도 지켜야 하고, 정향도 지켜야 하고, 혜향도 지켜야 하고, 해탈향도 지켜야 하고, 해탈지견향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지키되 거죽으로 물질로다가 지키지 말라. 내 마음의 향. 다스리는 마음. 이 다스리는 마음이 첫째는 화목해야 하고 성내지 말아야 한다.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위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푸근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써 행을 해줘야 된다. 이 모두가 내 탓으로 돌린다면 하나도 남이 미울 게 없고, 불안하게 해줄 게 없고, 불안하게 말해줄 게 없고, 탓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 잘못하는 사람은 내가 몰랐을 때 내 모습으로, 내가 잘못했을 때 내 모습으로 보라 이거죠. 그렇다면 해탈은 물론이거니와 해탈지견향까지 해서 구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살아서 구족해야지 죽어서 구족할 리가 없죠. 살아서 먹은 마음이 죽는다고 더해질까요?
그래서 이 모습을 가지고 인간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생각해보세요. 한번 두꺼비가 됐다 합시다. 개구리가 됐다 합시다. 그러면 개구리의 습성이 딱 붙어서 그 습성 떼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개구리의 습성, 뱀의 습성, 개의 습성, 돼지의 습성, 소의 습성…. 이 갖은 동물에서 곤충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 각계각층의 천차만별로 돼 있으면서 살아나가는 그 습성을 떼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계단 없는 계단을, 곤충에서부터 태로 날 때까지 그 계단을 올라서려면 어느만큼 거쳐야 되며 그 습성을 어느만큼 떼야만 인간의 모습을 타고 나겠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을 타고 나서 이제는 정신계의 어버이로서 홀랑 벗어나야 될 텐데,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면서 회사에 들어가서 좌천되듯이 좌천이 돼서 되겠습니까? 인간 모습을 타고났으면 역시 그 모습이 다해지기 전에 이 도리를 알고 넘어서야죠. 이 모습으로 살다가 만약에 돼지가 됐다 합시다. 돼지같이 살아서 돼지가 됐다 하면은 속으로는 인간의 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돼지 모습을 썼으니 돼지 대접밖엔 못 받죠. 어쩌겠습니까? 의식이, 사람의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허, 아무리 꿀꿀대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돼지 대접밖엔 못 받습니다.
이것이 내 앞에 닥치지 않았으니까 지금 아주 너그럽게 그냥 ‘뭐가 그래? 죽으면 그만이지.’ 아, 이러고 아주 태평하겠지만 말입니다. 허, 그렇게 태평한 게 아닙니다. 무섭고 무섭고 에누리 없는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아주, 그 입력을 해놓으면 틀림없다고 하죠. 그러나 더 무서운 컴퓨터는 사람의 숙명통으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다 입력이 되는 오신통의 컴퓨터입니다. 그래가지고 자기가 마음먹고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나가는 그것이 일거일동 자동적으로, 자기가 아는 거는 자기가 아는 대로 그냥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생각이 안 듭니까? 하하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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