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10〉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삼보 스님

삼보 스님 / 수타사·정암사 주지 및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 역임 기원정사 회주, 동국학원 이사
배움에는 어떤 구애도 받지 않아
법문·강의 원고 없이 술술
숯으로 흙에 글씨 쓰며 공부
출가자 잘못·제도 강하게 비판


-그 무렵, 탄허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스님이 1966년 가을 무렵에 대학선원장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시고, 제가 시봉으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그런 이야기가 오가더니 그렇게 되었어요. 스님은 서울로 가시면서 저를 시봉으로 삼아서 갔는데, 거기에도 조그만 일이 있었어요. 원래 그 시절에는 소임을 6개월만 하고, 6개월이 되면 소임을 바꾸는 전통이 있었어요. 제가 시봉을 6개월 이상을 하였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시봉으로 하려고 하였는데 스님께서 저를 계속해서 하려는 심중을 종무소에서 몰라서, 난리가 조금 있었죠. 그것은 어른의 뜻도 모르고, 여쭈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군대 가기 전까지 근 3년을 시봉했어요. 우리 스님은 새벽부터 주무실 때까지, 어디를 가셔도 늘 원고를 쓰셨어요. 이런 정열로, 노력으로 화엄경 출간과 사집·사교 과정에서 승가에서 배우는 모든 경전을 번역하신 것입니다.

-시봉 시절부터 탄허 스님과 인연이 돈독하였네요?
스님이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하실 때의 간사는 황산덕 교수의 부인(대법선보살)이었어요. 그 시절 스님을 만나 뵈러 온 사람은 조재호, 동대총장을 한 송석구 교수, 법안 스님이었어요. 스님은 법안 스님을 좋아하셨죠. 그때 운허 스님이 동국역경원장이었는데 운허 스님은 아랫집이었고, 우리 스님은 윗집이었어요. 거길 경산 스님이 와 보시고는 어른 스님, 대강백 스님이 사는 게 너무 초라하다고 하셨어요. 머물던 집은 일본집인데, 오두막집 같았어요. 그래서 그해 12월에 두 달 만에 용주사로 가게 되었어요. 경산 스님이 우리 스님에게 용주사를 역장(譯場)으로 하려고 하는데, 당신 상좌에게 용주사 주지를 줄 터이니 그리 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님이 예산 향천사에 있었던 원보산 스님의 상좌인 희묵 스님을 연락해 불러서 “니 본사 주지를 해 봐라” 하셨어요. 그러자 그 스님은 1주일 말미를 달라고 하더니, 그만 못하겠다고 그랬어요. 아마 그때 장가가려고 마음을 먹었던지 그랬어요. 그래서 대신 온 스님이 상원사의 희섭 스님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용주사로 오셔서 역장장을 맡으시고, 희섭 스님이 용주사 주지로 왔어요. 그때 용주사에는 운허 스님을 비롯한 강사 스님, 무비·성파 스님과 같이 역경사 양성소에서 배우던 스님, 속인 등이 바글바글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요. 그런데 희섭 스님은 상원사에서 선방을 하셔서 보살들이 갖다 주는 것으로 먹고 살던 분이거든요. 그런데 용주사는 돈이 나올 곳이 없고, 오히려 쓸 곳이 많았어요. 대중들이 많이 모여서 공부를 하니 그 뒷바라지를 다 해야 되었거든요. 그래서 희섭 스님은 안 되겠다 하고는 꾀를 내어서 선방을 하면 돈이 나올 것 같다고 여기고는 용주사에다가 중앙선원을 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1968년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조실로 전강 스님을 모셨어요. 그러자 전강 스님의 상좌인 정달 스님과 수좌 스님들이 들어와서는 실권을 갖게 되었지요. 이렇게 되자, 희섭 스님은 한 달도 안 돼서 그만 용주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희섭 스님은 그런 일을 하면서 우리 스님과 상의를 전혀 안 했어요. 그래 탄허 스님은 기분이 나빠서,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1968년 가을에 용주사를 나와서 진관사로 갔습니다. 전강 스님은 들어오시고, 우리 스님은 전강 스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님은 당장 나오니깐 갈 곳이 없어서, 진관사로 간 것이지요. 그해 한겨울을 거기에서 지냈어요. 그 이후로 우리 스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희섭 스님과는 불편하게 지내게 됐어요.

-알겠습니다. 그간 용주사에서 나온 연유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탄허 스님은 그 이후에는 오대산으로 들어오셨는데, 그 무렵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들어오기 전에 화엄경 원고를 영은사를 옮기셨지요?
우리 스님이 원고를 영은사로 옮긴 것을 두고 예언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저는 그것보다는 우리 스님이 영은사를 평소에 좋아하셨던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스님을 모셔 보니, 우리 스님은 오대산에 대해서 큰 애착이 별로 없었어요. 오대산은 불안정하면서 춥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또 상원사에 있는 수좌들이 월정사로 3일에 한 번 정도로 내려와서 분탕질을 치고 그랬어요. 그래서 희찬 스님은 방에 들어가기도 껄끄러웠습니다. 그 시절에는 수좌들이 그랬어요. 그에 비해 영은사는 따듯하고, 쌀과 감이 나서 곡식이 그래도 있어서, 영은사에 애들을 데리고 있으면 밥은 안 굶는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영은사는 월정사와 멀리 떨어져서 푸근하게 여겼던 면도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 원고를 옮긴 것은 예지적인 것에 의해서만 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싶어요.
물론 스님은 평소에 예지적인 모습은 있었어요. 방산굴에서는 저보고 “야 대야에 물 떠와라” 그러셔요. 그러시면서 그 대야 물에 하늘의 별자리가 비치는 것을 보시고 그래서 저는 속으로 희한하다고 여겼지요. 또 미물인 개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고 그랬어요. 세상의 풍란이 나기 이전에 쥐새끼들이 움직인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의 짐승들이 그런 조짐을 미리 보여준다고 하신 말씀을 제가 들었어요.

-탄허 스님은 1975년에 화엄경 출판을 마치고, 1977년에 화엄경 특강을 하였는데, 그때에 특강이 어렵게 열렸다고 그럽니다.
그때 종단에는 조계사파와 개운사파가 대립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스님이 하려고 하였던 특강이 열리면 월정사에서 소란이 날 것이라고 그래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내가 볼 때에 그런 것은 별 무리가 아니라고 봐서, 스님에게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아도 되신다고 건의를 드리고 그래서 하기로 결정이 났어요. 그 강의는 스님의 실력이 입증된 중요한 특강입니다. 저도 그때에 상원사 주지를 하면서, 매일 왔다 갔다 하면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희찬 스님이 주지를 하시면서 그 뒷바라지를 한다고 고생이 많았어요. 그런 뒷바라지가 쉬운 게 아닙니다.

-탄허 스님은 대석학, 대강백으로 세상의 학자들은 다 와서 물으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배움에는 어떤 구애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스님은 배우는 것에는 가리지 않아요. 내가 군대에 갔다 와서 월정사 총무 소임을 볼 때인 1976~1977년 여름인가 그 무렵인데 월정사에 이기영 박사, 홍정식 교수, 김달진 등 당대 석학 서너 명이 왔어요. 그 분들이 와서는 3일간 계속 강의를 했어요. 그때에 보니깐 우리 스님은 제일 앞에 앉아서 그 분들의 강의를 다 들었어요. 방산굴에서 내려오셔서 매일, 안 빠지고 다 들었습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은 가리지 않아요. 그때에 보니, 스님은 메모할 것은 딱! 메모합니다. 이렇게 우리 스님은 대석학, 도인이면서도 배우시는 것에 가리시지 않았어요. 우리 스님은 법문을 하시거나 강의하실 때에는 그 원고를 쓰는 법이 없어요. 다른 스님들은 조금이라도 메모를 해서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스님은 그게 없어요. 그대로 가셔서, 말씀을 하셔도 그대로 줄줄 나옵니다.
저는 우리 스님의 그런 것을 보고는 감탄했어요. 우리 스님은 송재(誦才)가 뛰어나십니다. 사서삼경을 다 외우시고, 그뿐만 아니라 유불선의 모든 경전을 회통할 정도로 해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탄허 스님이 그런 실력을 갖추실 때, 보령의 이극종이라는 유학자에게 배웠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스님을 시봉해서 보령에 가서 이극종이라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기 전에 스님이 고향을 방문하시고, 보령에 가서 만났는데 스님이 그 어르신과 맞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저에게 그 분에게 삼배를 드리라고 해서 하였죠. 스님보다는 스무 살이 더 되는 분이었는데, 키가 크고 상투 틀고 갓도 쓰고 그랬어요. 스님의 원래 고향은 김제인데 아버지가 보천교 간부를 하셔서 정읍으로 이사왔어요.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을 보시고는 “이게 건물이여, 보천교 건물 중에서도 제일 조그만한 것을 가져온 것이여. 중들이 머리 씀씀이가 그렇지” 하였어요.

-스님의 뛰어난 실력, 암기력 등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스님은 어렸을 적에는 무척 가난하였다고 그랬어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어요. 하루 종일 책을 읽다 보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니깐, 큰 동이에 사카린을 뿌려 놓고는 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그 물을 먹었다고 하셨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못살았다고, 거지 생활을 하였다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군불을 땔 때에는 숯을 갖고 글씨를 썼다고 그랬어요. 종이가 없으니깐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어릴 적부터 숯으로 글씨를 쓰시면서 공부한 것을 외운 것이지요.
스님은 저에게 “나 고생 많이 했다”고 하셨어요. 내가 볼 때에 보령으로 처가살이, 데릴사위로 가서 이극종 선생을 만나서 제대로 학문을 하였다고 봅니다. 우리 스님이 이극종이라는 분을 극찬했어요. 참, 그리고 우리 스님은 보령으로 장가 가기 전에 정읍에서 고생하면서 공부할 적에 변산의 월명암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월명암에서 펴낸 <부설전>을 보니깐, 우리 스님이 열여섯 열입곱 무렵에 동네의 잘사는 집 학동(炳壽)의 독선생으로 있었다고 그래요. 훈장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규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스님의 성격을 한마디로 단언하여 말하기는 미묘하고, 어렵죠. 스님의 성격은 여러 측면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스님은 활달해요. 호연지기도 있고, 한량기도 있어요. 언제인가 서울 수유리 산골짜기에 조상현 같은 창을 하는 사람을 불러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어요. 그러면서도 사람을, 인재를 키우겠다고 하시면 다른 것을 제쳐 두고 하시는 면도 있어요. 스님은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잘못된 것을 보시면 용납을 안 하십니다. 인간성, 인간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자세가 안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거들떠도 안 봐요. 그리고 스님은 승려의 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었어요. 스님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과 스님의 출가 제도 같은 것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래 갖고는, 이런 정신머리 갖고는 불교가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외출을 하실 때에는 의관을 딱 갖추시고 나가십니다. 구두, 모자, 옷 같은 것을 제대로 정장 차림으로 하고 나가시고 그랬죠. 스님은 불법 사상에 대한 애정은 깊었지만, 승려들의 제도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우리 스님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워요. 요즈음 <탄허록>이라는 스님의 책이 나와서 <불교신문>에 소개된 것을 보니까 스님을 예측가, 풍수지리가처럼 쓴 것이 있어요. 이렇에 우리 스님을 보는 것은 문제가 많아요. 스님의 정체성, 성격은 더욱 연구를 해서 말을 해야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스님은 1977년, 이리역 폭파사고가 나자 서예전을 열고, 그 수익금을 사고를 당한 유족들에 기부하였지요?
그때 스님이 그렇게 기부를 한 것은 스님이 그 무렵에 여윳돈이 조금 있었고, 전시회를 하고 나서 남은 돈을 모아서 그렇게 하셨지요.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명분이 좋았고, 어떤 면에서는 스님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하셨던 것도 있어요. 스님은 항상 전라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김대중씨를 보고는 저에게 “두고 봐, 김대중이가 대통령을 해 먹을 거야”라고도 하셨어요.

-탄허 스님의 비석은 어떻게 해서 세워졌나요?
스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저하고 희찬 스님이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비석을 세우려면 비문이 있어야 하니깐, 제일 먼저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을 찾아가서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성철 스님이 탄허 스님의 학문이 너무 깊어서 당신이 손대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사양을 했어요. 그래서 그 후에는 관응 스님, 운허 스님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였어요. 그 스님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다가 희찬 스님이 입적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추진을 하였는데, 가만히 따져보고 나서 서울대 교수인 최창규를 찾아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이 분은 그때 국회의원을 하였는데, 면암 최익현의 손자이고 우리 스님을 만나기 위해 오대산에를 왔다 갔다 한 것을 아니깐 그랬어요.
내가 우리 스님을 가르친 스승인 이극종이 최익현의 제자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 분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미리 연락을 하고 그분의 집에 찾아가서 부탁을 하였지요. 그래서 최창규의 비문을 받아 1986년 상원사에 세웠지요. 그 비석은 양 측면에 용트림의 모양으로 만들었고, 아주 컸어요. 그런데 그 후에 그 비석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그것은 각성 스님이 비문을 썼지요.

-스님이 강조하신 말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스님이 저희들에게 항상 말씀하신 것은 언행일치입니다. 사람의 됨됨이가 되려면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것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속가의 가르침,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으로는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많이 말씀하시고, 붓글씨로도 써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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