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공개되는 초의와 신헌의 교유시점을 밝히는 〈벽해타운첩〉
<벽해타운첩>에 수록된 추사의 이 편지는 해남 우수영으로 부임했던 신헌(1810~1884)과 초의의 교유 시점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실제 〈완당전집〉〈여초의〉에도 누락된 이 편지는 이번 연재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셈이다. 특히 제주 적거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추사는 지기, 초의를 위해 해남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신헌을 소개한다.  이는 추사의 초의에 대한 배려와 함께 경화사족들이 초의와 교유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 추사의 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해남 수군절도사에게 (사람을 사이에 넣어서)부탁해 두었습니다. 이제 곧 (그대의)안부를 물을 것인데, 이 수군절도사가 그대를 보면 크게 기뻐할 겁니다. 다른 사람의 소문을 풍문으로 듣는 것과 다를 것이요. 여기에서 보낸 사람은 바로 나와 삼대에 걸쳐 인연이 있는 사람인데 (제주도)나에게 와서 있다가 지금 돌아간다고 하기에 그에게 스님이 계신 선실을 찾아 가라고 했으며, 아울러 몇 자를 적었을 뿐입니다. 남평에서 나는 백책지 한 두 세권을 꼭 사서 대신 보내주심이 어떨지요, 비록 책지에 글을 쓰지만 백지는 희고 깨끗하며 단단하고 치밀한 것이 또한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좋은 책지가 없다면 계속해서 백지를 사용해야겠지요. 무환자나무로 만든 염주 3개는 (나에게)선차를 보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보내니 받아주심이 어떨지요. 차를 따는 시기가 아직 이른가요. 아니면 이미 따기 시작했습니까. 어떤 차일지 몹시 기다려집니다. 호의의 국축(菊軸)은 아직도 펴보지 못했고, 경월이 보낸 포장도 맛보지 못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海南水?許有轉託矣 果卽有問存而此?見師 必大喜之 不如他人之聲聞中逐影付響耳 此去人卽吾三世舊物 而委見我入來 今方告歸 使之歷訪禪室 ?付數字耳 南平冊白紙 限二三卷 必爲代購以送 如何如何 雖書冊紙 白紙之白淨堅緻者亦佳 然若有冊紙無庸 更事於白紙耳 木念珠三串 是仙茶所充淨供者也 收領如何 茶候尙早耶 抑已始採耶
甚庸翹懸  縞衣菊軸 竟不卽一示 鏡月泡漿 亦無可得喫耶 可呵)

이 편지를 보낼 당시 해남 수군절도사는 바로 신헌이었다. 그가 해남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것은 1843년경이다. 그는 추사의 소개로 초의를 만난 후, 서로를 존중하는 예를 갖추었고,  소치를 자신의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는 등, 이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보낸 인물이다.
그의 초명(初名)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이요, 호는 위당(威堂), 금당(琴堂), 우석(于石)이다. 어려서 다산에게 수학했으며, 추사에게 실학의 요체를 익혔다.
특히 남평에서 생산되는 책지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는 격의 없는 벗에게나 할 수 있는 것. 추사의 종이에 대한 안목 또한 “비록 책지에 글을 쓰지만 백지는 희고 깨끗하며 단단하고 치밀한 것이 또한 좋습니다”라고 대목에서 드러난다.


당시 전라도 남평에서 우수한 종이가 생산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는 좋은 차를 보내준 초의에게 무환자나무로 만든 염주 3천(串)을 증표로 보냈다. 이 나무는 제주 방언으로 “도욱낭”, “더욱낭”이라 부르며, 열매의 껍질은 비누대용품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바로 이 나무의 열매로 만든 염주를 초의에게 보낸 것이다. 실제 이 염주는 추사가 손수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늘 좋은 차를 보내주는 초의에게 자신의 정성을 담아 보낸 증표이리라. 또 그가 “차를 따는 시기가 아직 이른가요. 아니면 이미 따기 시작했습니까”라고 한 것은 이 편지를 쓴 시점이 1843년 늦은 봄일 가능성을 드러낸 언구이다. 더구나 차를 갈구하는 그의 마음을 “뒤꿈치를 세우고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이는  제주 시절, 차에 의존된 그의 일상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추사는 초의이외에도 호의나 경원 등, 대둔사 승려들과 폭 넓게 교유했는데, 이는 호의가 국축(菊軸)을 보낸 일이나 경월이 장류를 보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세상과 별리(別離)된 곳, 제주의 척박한 환경에서 추사를 견디게 한 힘은 간단없는 배려. 곧 사람과 사람이 이어준 따뜻한 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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