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와 감로탱화

서양 회화의 ‘해골의 춤’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 묘사
절대자에 대한 헌신 상징도

한국 불교의 감로탱화
당시 죽음의 모습들을 그려
죽음, 종결 아닌 삶의 연속

지혜로운 이의 삶은 전부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키케로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로마 시내를 퍼레이드 할 때 노예 한 사람에게 월계관을 들고 뒤따르게 하였다. 이 월계관에는 특별한 문장이 씌어있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생애 최고의 순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 노예는 개선장군에게 오늘은 최고의 날이지만 내일 또 다른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삶은 덧없고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어서 죽음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당황스럽고 두려운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불가피하게 맞이하는 죽음을 해석함으로써 죽음을 수용하고 삶의 질서를 세운다.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된 조건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종교에 따라 다르다.

서양 문학과 회화에 나타나는 죽음의 상징들은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가장 흔한 죽음의 상징으로 낫을 든 남자, 흑기사, 수레바퀴의 주인, 다리의 거장, 친구 하인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해골이나 썩은 과일, 불 꺼진 초, 시든 꽃, 모래시계, 연기, 거울에 비친 상이 죽음을 상징한다. 해골이나 썩은 과일, 불 꺼친 초, 시든 꽃은 생명이 사라진 것들의 추함을 강조한다. 또 다른 죽음의 상징인 모래시계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생명도 빠져나가는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환기시킨다. 이처럼 서양에서 죽음은 삶과 대비되어 무력하고 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서양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골의 춤〉은 죽음을 해골로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혼재된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죽음은 교황, 황제, 황후, 왕, 추기경, 농부, 아이, 아이의 엄마, 지위의 고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으로 중세기의 숨 막히는 완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만히 뒤에서 등장하거나 또는 불현듯 나타나는 죽음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 음습하고 추한 것이다.

나약한 여자들이나 죄 많은 자들은 겁에 질려 끌려가고 고관대작이나 성직자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버티지만 죽음은 끝내 거부할 수 없다. 주로 수도원 회랑이나 공동묘지, 납골당 외벽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지옥과 저주받은 사람들을 통해 지상의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천국의 영생을 동경하고 신에게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

이 그림들은 한편으로 돈이나 명예, 지위 같은 덧없는 것을 추구하지 말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살기를 설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상의 삶을 단죄하는 심판자인 죽음을 가능하면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죽음이 도래한다면 산 사람의 세계로부터 빨리 분리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 된다. 뒤집어보면 이 욕망 속에는 죽음을 금기시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고가 잠복해 있는데, 신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종교 권력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양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 죽음은 삶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을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준비하고 맞이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가족들은 묏자리도 미리 봐두고 윤달이면 수의를 준비한다. 서양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자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여긴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뒤에 반혼(返魂)을 통해 다시 생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해마다 치러지는 제사를 통해 조상들은 여전히 가족의 일원으로서 기억되고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지고 있다. 심지어 호상인 경우, 문상객들이 상갓집에서 밤새도록 시끌벅적하게 술과 음식을 먹고 화투놀이를 하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죽음은 이처럼 삶의 한 과정이며 장례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였다.

그런데 가족들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영혼들도 있다. 제사를 못 받은 배고픈 조상이 있다거나 묏자리가 잘못되었을 때, 또는 젊은 나이에 죽거나 객사한 경우, 억울하게 죽거나 전쟁에서 이름 없이 죽은 영가들은 그를 기억할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이승을 떠나고도 선뜻 생을 내려놓지 못하고 생과 사의 중간 어디에선가 떠도는 이름 없는 죽음을 위하여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장엄하게 단을 차리고 천도의식을 봉행하여 그들을 다음 생으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인도하였다.

불교에서 죽음의 길을 인도하는 자는 서양 회화에 나오는 것 같이 억지로 끌고 가는 혐오스러운 해골이 아니라 하늘거리는 화려한 옷을 입고 깃발을 높이 들고 하늘길을 안내하는 인로왕보살과, 정수리 광명으로 하늘길 밝히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대동하고 직접 마중 나오는 아미타불이다. 그리고 지옥이 다 비도록 사람들을 제도하겠다는 저 신심 깊은 지장보살도 마중을 나온다.

감로탱은 아귀들에게 감로를 베푸는 의식, 다시 말해 물과 뭍에서 외롭게 죽어간 영혼들을 천도하는 수륙제 때 법석에 걸어놓는 걸게 그림을 말한다. 단을 마련하고 걸게 그림을 내다 걸고는 그 아래서 스님들은 경을 읽고 바라춤을 추며 외로운 영가들에게 불보살님의 가피가 강림하기를 청하고 산 자들은 온갖 음식을 마련하며 정성을 다한다. 주변에 음식이 지천이어도 먹지 못하는 아귀들에게 이 날은 잔칫날, 비로소 주린 배를 채우고 타들어가는 갈증을 풀 수 있다.

감로탱에는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들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가장 참혹한 대규모 죽음의 원인이다. 17세기 이후 제작된 감로탱을 보면 한쪽은 창과 활 같은 전통적인 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한쪽은 조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상상의 소산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사실적인 장면이다. 그만큼 조선 사람들에게 임진왜란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지금은 드문 일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호랑이나 뱀에 물려 죽는 재앙이 흔했다. 수많은 민담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가졌을 공포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감로탱에 그려진 호랑이의 모습은 화공의 조잡하고 투박한 솜씨 탓인지 모르겠으나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처럼 친근하고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그밖에 술병 들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 바둑을 두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 담장이 무너져 비명횡사한 사람 등, 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을 초래할 법한 상황이 있는가하면, 오늘날로 치자면 교통사고에 해당하는, 말발굽에 깔려죽거나 소달구지에 깔려죽고, 벌거벗기고 포박을 당해 죽거나 산적들에게 봇짐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봇짐장수, 주인에게 매 맞아 죽는 노비 등 특정한 시대상황이 반영된 죽음의 모습까지 감로탱에는 당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감로탱에 묘사된 죽음은 끔찍하기는 하지만 괴기스럽지 않고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죽음의 고통은 구천을 떠도는 외로운 영혼에게 삶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도록 하기 위해 묘사된 것으로, 감로탱에 묘사된 죽음은 방종과 쾌락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감로탱은 죽음의 다양성 뿐 아니라 그 구체성 때문에 장엄용 종교화로 제작되었으면서도 시대상을 반영한 풍속화의 성격도 갖는다.

전통사회에서 수륙재는 일종의 축제이다. 조용하던 마을에 북소리, 꽹과리 소리 울려 펴지면 북적북적 사람들이 모여들어 신나고 흥겨운 놀이의 한마당이 된다. 의식이 끝나면 제자들이 정성껏 마련한 제수음식들을 맛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동네 잔칫날이다. 스님들은 소고를 두드리고 징을 치면서 구성진 염불가락으로 원혼들을 불러오고 아귀들은 음식을 얻어 허겁지겁 입에 넣거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강물을 마신다. 제단 한편에는 제자들이 무릎 꿇고 지극정성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청하니 하늘의 천신들과 불보살까지 왕림하여 그야말로 천상과 인간의 큰 잔치가 벌어진다.

영가를 천도하는 엄숙한 재식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조금 물러서면, 삶의 갖가지 양태가 드러난다. 근엄하게 경전을 읽는 양반네들이 흘금흘금 아낙네들을 곁눈질 하고, 촌로들은 바둑에 정신이 팔려있다. 남사당패들은 공을 던지고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줄타기를 하는 등 온갖 재주를 부리고 옆에는 무희와 악사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장고가락에 맞추어 소리꾼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 연회에 등에 어린아이를 들쳐 업은 아낙네, 젖먹이는 여인뿐 아니라 앞 못 보는 봉사들도 어린아이를 앞세워 길을 재촉한다. 흥천사 감로탱에는 일본강점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헬리콥터가 동원된 전쟁 장면과 전함의 모습, 모내기 장면, 신사를 찾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 코끼리 서커스단까지 등장한다.

역설적인 장면이지만, 감로탱에서 삶은 죽음과 대비되어 더욱 생생하게 빛난다. 생명의 약동을 이처럼 경이롭게 표현한 그림이 또 있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많은 삶이 죽음에 기대어 있는가? 삶과 죽음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 아닌가?

감로탱에서 죽음은 그 자체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며, 나아가 삶을 약동하게 하는 용광로이다. 그 생명과 죽음의 이중주 속에서 산 사람은 정화되고 죽은 자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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