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그리던 벗, 추사를 찾아 제주로 향했던 초의는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조(李源祚1792~1872)의 도움으로 잠시 관아에 머문 듯하다. 초의가 말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제주 목사의 배려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난생처음 말을 탔을 초의였으니 말안장에 볼깃살이 헤지는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사정을 익히 알았던 추사였기에 초의에게 말 타는 요령을 알려주었겠지만 너른 대지를 가르며 달리는 호연한 기상, 아마도 그는 추사의 충고를 잊었던 것은 아닐까. 1843년 7월 2일에 쓴 추사의 편지에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말안장에 볼깃살이 벗겨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니 가여움이 절절합니다.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내 말을 듣지 않고 경거망동을 하셨으니 어찌 함부로 행동한 것에 대한 업보가 없겠습니까.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떠서 (이것을) 상처의 크기에 따라 잘라 밥풀을 짓이겨 붙이면 좋아질 것입니다. 이는 중의 살가죽이 어떻게 사슴 가죽과 같겠는가. 사슴 가죽을 붙인 후에는 곧바로 일어나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찌는 더위가 괴로울 뿐입니다. 겨우 적습니다. 그럼. 1843년 윤7월2일 다문

원장의 태도가 너무 냉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대는 천리 밖에서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와서 한바탕 놀라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속객이 산중의 옛일에 익숙하질 않아 이와 같이 되어 버린 것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허 소치는 매일 제 곁에서 많은 고화명첩을 보더니 지난 해 겨울과 비교하면 또 얼마나 격조가 높아졌는지 그대와 함께 참증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백나한진영첩 수 십 책을 보고 있는데 만약 그대가 보면 분명 크게 욕심낼 겁니다. 허 소치와 함께 날마다 펴보는 이 즐거움을 어찌 다 하겠습니까. 먼 곳에서 부러운 탄식을 그칠 수 없을 겁니다.

卽聞不勝鞍馬致有肉損脫之苦 奉念切切 能不大損耶 不聽此言 妄動妄作 安得無妄報也 以鹿皮薄薄片 量其傷處大小裁出 以米飯糊緊粘則爲好 此僧皮何如鹿皮者也 皮粘後 卽爲起身還來至可至可 此狀一味苦熱而已 艱草不宣 癸卯閏七月二日 茶門

院長之味太覺冷淡 師則千里外 不識何緣致此一番驚訝矣 但俗客不山中故事 如是做去 不覺噴筍 許痴日在傍側 多見古畵名帖 比之前冬 又長幾格 恨未令師參證耳 見有五百佛眞影數十冊 師若見之 必大生欲矣 與許痴日日對閱此樂何極 遠外艶歎不已

 

《완당전집》 <여초의> 18신에 수록된 이 편지는 《벽해타운첩》이 발굴된 후에야 그 연대가 밝혀진 것인데, 이는 초의가 표기 둔 간지(干支) 때문이다. 한편 말안장에 볼깃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던 초의는 일어나지도 못했던가보다. 추사가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떠서 (이것을) 상처의 크기에 따라 잘라 밥풀을 짓이겨 붙이면 좋아질 것”라는 긴급 처방을 내려준 것.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경거망동한 초의, 그의 아픔은 경거망동에 대한 업보라는 추사의 말은 초의에 대한 연민을 그리 표현한 듯하다. 한편 추사와 허 소치의 제주 일상은 “매일 제 곁에서 많은 고화명첩을 보며” 화삼매(畵三昧)에 몰두했으니 소치의 그림이 “지난 해 겨울과 비교하면 또 얼마나 격조가 높아졌는지 그대와 함께 참증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란다. 더구나 오백나한진영첩 수 십 권을 참구했으니 제주시절 불교에 심취한 추사의 일상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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